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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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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8호 ⁄ 2007.07.03 12:00:29

오래전에 구 소련의 미그 25機가 성능은 좋은데 베일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꿈의 비행기」로 알려진 적이 있었다. 미국의 프로농구선수들이 단일팀을 만들어 올림픽에 참가하여 망신을 당했으나 사람들은 그들을 「꿈의 팀」이라 불렀다. 이렇게 꿈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절정이나 극치 또는 환상이라고 표현을 해도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정치에서는 「꿈의 지도자」가 가능한 것인가? 나는 이 꿈의 지도자는 statesman이고 哲人정치가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대입(代入)을 해 본다면 어떠할 것인가? 나는 우리나라에는 과거에 없었고 지금도 없다고 단언한다. 있다면 국민들의 염원(念願)만이 있었고 숙원(宿願)이 있었으며 비원(悲願)만이 있었던 것이다. 또 우리나라 국민들의 의식수준으로서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기도 했다. 나는 지금 현실에서는 채워지지 않지만 「꿈의 지도자」를 비록 상상 속에서나마 그려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동양적 전인(全人)의 조건인 자·덕·용(智·德·勇)을 갖추었을 것이다. 동양에서는 제갈공명(諸葛孔明)이고 서양에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이다. 그들은 문·사·철에 정통한 인문학자이기도 했다. 나는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뚜렷한 국가관과 애민사상을 갖고 있었는지 의심을 한다. 나는 그들의 우매함과 용렬함에서 그나마 반면교사나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눈물겹도록 고마워한다. (이하 편의상 꿈의 지도자를 제갈공명과 아우렐리우스로 번갈아 쓰기로 한다.) 諸葛孔明은 정치가 샤먼(shaman)의 기능이 있음을 알아 오늘날의 정치인들처럼 반목과 질시를 조장하는 대신, 동과 서(지역), 남과 북(경제), 좌우(이념)를 아우르며 정서적 유대감을 북돋운다. 억울한 사람에게는 다가가 위무를 하며 원귀는 해원하여 하늘을 청명하게 한다.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Aurelius는 인간의 존립근거와 생존의 토대를 알기 때문에 그것과 상통하는 기초과학을 육성한다. 중간재와 부품산업 소재산업의 진흥 없이는 선진국의 꿈도 기술입국의 꿈도 헛것임을 알아 그것들에 집중한다. 諸葛孔明은 공인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 허유(許由)와 소부(巢父)를 본받으려 애쓴다. 그러나 현실정치에 참여를 해도 능력이 모자라면 사양하고 임무수행이 어려우면 사퇴를 한다. 그릇이 아니면서 경선에 참여하지 아니 하고 감당도 못하면서 높은 지위를 바라지 않는다. Aurelius는 나의 잘남 나의 우수함으로 대결을 펼치기 때문에 남의 약점을 기회로 삼지 않고 남의 실수에 편승하지 않는다. 설령 송양지인(宋襄之仁-송나라 양왕이 선제공격을 미루다가 패망한 고사)의 비웃음을 받을지언정 나의 강점 나의 장기로 승부를 건다. 諸葛孔明은 역사를 거울로 보기 때문에 말을 해도 국어(國語)에 벗어날까 염려하고 대통령의 말에 누가 상심하거나 자살할까봐 염려하고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의 안색을 살피면서 말을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Aurelius는 인간은 일을 계획할 뿐 성사는 하늘에 달려있음을 알고 욕심을 내지 않으며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다 같이 하는 것임을 안다. 국민들의 협조와 동참을 이끌어낸다. 일의 어려움을 알고 사태의 심각성을 알기 때문에 호언장담하지 않으며 교언영색하지 않는다. 윈스턴 처칠이 나치의 독일군이 프랑스로 진격하던 1940년 5월 13일 의회에서 한 연설「나는 피와 땀과 눈물 밖에 국민들에게 드릴 것이 없다.」와 J F 케네디가 1961년 1월 20일 미국의 35대 대통령취임연설에서 한 연설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물어보십시오. 」의 말 밖에 할 수가 없다. 諸葛孔明은 역사의 맥락을 알기 때문에 역사가 주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천재일우라 생각되면 아버지를 속여 축복도 받으며 절호의 찬스라 생각되면 형으로부터 장자상속권도 사는 것이다. 기회는 예상치 않은 데서 오기 때문에 대부분은 반신반의하다가 흘려버린다. 저번의 인혁당 무죄 판결은 역사가 주는 기회였던 것이다. Aurelius는 움직일 때가 아니면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경거망동은 찾아볼 수 없다. 서울시를 하나님에게 봉헌한다는 말도 하지 않고 아들이 히딩크와 사진 찍는 것도 제지한다. 한 쪽 편을 든다거나 직위를 이용하는 것은 다른 한 쪽의 반감을 사면서 모든 사람들의 빈축을 사는 일이다. 諸葛孔明은 책임정치를 숭상하기 때문에 세 불리하면 탈당하여 민주평화세력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지 않으며 자기를 등용하고 발탁한 사람과 진퇴를 같이 한다. 그러니 서공(鼠公)이라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하는 것이다. Aurelius는 구중궁궐에서 「다음 대통령은 정치를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등 언어의 유희를 즐기지 않고 산발(散髮)하여 기우제를 지내는 태종 같이 눈병이 나도록 한글창제에 열심인 세종 같이 자기 몸을 아끼지 않는다. 諸葛孔明은 이전투구(泥田鬪狗)를 싫어하며 작은 일에 노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左하면 나는 右하고 상대방이 우하면 나는 좌한다. 항시 여유롭고 이순(耳順)이 아니 되었어도 고까운 것이 고깝지가 않다. 나의 때를 알며 그것은 1000년 후에 다른 사람에 의해서도 이루어짐을 알기 때문에 마냥 한가로울수 있는 것이다. Aurelius는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나라의 안녕만을 생각하고 국민의 편안만을 생각한다. 태풍이 불어도 내 불찰이요. 홍수가 나도 내 부덕의 소치이니 질투나 시기가 시비를 걸 수 없는 것이다. 諸葛孔明은 의기를 느끼는 사람이기 때문에 병사의 종기고름을 빨아주는 대장(大將)이면서 측근이 잘못하면 눈물을 머금고 수족을 자르듯 잘라버리는 사령관인 것이다. 이러니 병사는 결사적으로 싸울 것이오. 令은 중하고도 엄한 것이다. Aurelius는 임기를 생각하지 않으며 當代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로지 후대를 생각하고 후손을 생각한다. 뜻이 신실하지 않을 수 없고 졸속행정이나 전시행정은 발붙일 수가 없는 것이다. 선로후락(先勞後樂)과 선인후락(先忍後樂)을 주창하니 모두가 기꺼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諸葛孔明은 일신의 영달이나 안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흉중에는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의 경륜이 있으므로 참담해도 낙담하지 않고 암담해도 낙심하지 않는다.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알고 있으며 치열하게 접근하며 고독하게 결단하는 것이다. Aurelius는 생활은 검소하지만 생각은 광활하며 머리는 냉철하지만 심장은 아주 뜨겁다. 그는 초막에 기해도 궁전에 사는 것과 같고 남루한 옷을 입었지만 비단옷을 입은 듯하다. 기품이 있으며 누가 감히 범접할 수 없고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인품의 향기는 그윽하고 품성은 상긋하다. 보기만 해도 기쁘고 생각만 해도 즐겁다. 諸葛孔明은 휴머니스트이다.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을 사랑한다. 민족도 사랑하면서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를 지향한다. 이것이 발전되고 확장되니 그 정은 미물(微物)에까지 미치는 것이다. Aurelius는 세상에는 다 때가 있으며 전성기가 있으면 몰락기가 있음을 알고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아픔도 아는 것이다. 그러하니 발흥기 때 근신하고 小 스키피오처럼 전성기 때 몰락의 날을 위해 눈물도 흘리는 것이다. 만날 때 헤어짐을 예비하는 것은 「님의 침묵」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諸葛孔明은 세상은 넓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음을 알고 강호는 험난함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래서 당태종같이 경청을 즐기며 한나라 유방같이 구슬을 꿰는 역할을 좋아한다. 자연히 현자들이 운집하고 꽃들이 경염(競艶)하듯 준재들이 재주를 뽐내는 것이다. Aurelius는 문·사·철(文·史·哲)이 지금은 박대 받지만 옛날에는 제일로 우러러 받던 시절이 있음을 알고 문·사·철이 다시 지 날의 위력을 찾을 때 나라는 국력(國格)을 갖게 되고 사람들의 기풍은 활달하며 진취적이 될 것도 아는 것이다. 諸葛孔明은 솔선수범한다. 대통령을 지냈어도 공수거(空手去)임을 알아 퇴임 후 아방궁 같은 집을 짓지 않으며. 행사에는 말석을 찾으며 공은 아랫사람들에게 돌리는 것이다. Aurelius는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알고 오래된 것에서 새것을 만드니 고전을 아는 사람의 유리함을 마음껏 발휘하여 오늘에 치용(致用)한다. 諸葛孔明과 Aurelius는 용장 밑에 약졸 없다고 기품 있는 지도자 밑에 기품 있는 국민이 있는 것이다. 諸葛孔明과 Aurelius는 지도자의 길이 독배를 드는 것과 같고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고 형극의 길을 가는 것과 같음을 알기 때문에 헌신과 봉사로서만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격을 당해 장렬하게 죽는다. 하늘의 것을 많이 취했기 때문에 인간의 것을 요란하게 벗어버리는 것이다. 사리가 이러할진대 누가 지도자의 반열에 오르려하는가? 우리나라에 이런 정치인은 없으며 가까운 날에도 없을 것이라 예견한다. 그것은 우리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지고 최강의 정치시스템을 갖출 때 나타나리라고 본다. 나는 이렇게 내가 바라는 지도자상을 그려봤지만 이 글을 읽는 분은 또 나름대로의 그림이 있을 것이다. -千里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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