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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운동장에 부는 개발 ‘광풍’

청계천 복원에 쫓겨난 노점상들 또 내몰리나‘근대체육 산실’ 명성도 매장될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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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9호 ⁄ 2007.07.03 11:50:08

서울시는 지난 2월 20일 ‘동대문운동장 공원화 사업’ 부지 안 5천평에 예산 900억원을 들여 ‘디자인 월드 플라자’를 건설할 계획을 발표했다. 작년 10월 오세훈 시장이 취임 100일을 맞아 ‘시정운영 4개년 계획’의 첫 사업으로 발표한 이 사업은 ‘동대문운동장 공원화’ 사업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서울시는 동대문운동장 공원화 사업 부지에 세계적인 디자인 패션도시 육성을 위한 박물관과 전시실 등을 지을 계획을 밝혔다. 동대문 일대와 이명박 전 시장의 청계천을 연결하는 관광명소로 키우겠다는 장밋빛 청사진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서울시 계획을 두고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청계천 복원사업으로 쫓겨나 동대문운동장 축구장 안에서 삶터를 일군 노점상들을 또 한번 길거리로 내몰 것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또한 우리나라 ‘근대체육의 산실’이라고 불리는 동대문운동장의 문화·역사적인 가치도 개발 광풍에 매장될 위기에 놓일 것이라는 우려도 높다. ■ 상인들 손으로 만든 동대문풍물시장, 이제 막 명소가 되고 있지만… 동대문운동장 축구장에 위치한 동대문풍물벼룩시장은 청계천 황학동 벼룩시장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실제로 이 곳을 둘러보면 50~60년대 추억의 물건들이 유통되고 있다. 오래된 카메라, 전축과 LP판 등, 다양한 각종 민속품과 골동품, 생활용품 등 쉽게 접하기 힘든 물품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곳의 물건은 영화소품으로 이용되기도 하고 중·장년층에게는 잃어버린 과거의 추억을 끄집어 내주는 곳이기도 하다. 이색적인 볼거리를 보기 위한 외국인들의 발걸음도 잦다. 아이러니하게도 동대문풍물벼룩시장이 생긴 것은 청계천 복원 공사로 인한 노점상 단속때문이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청계천 복원공사를 위해 2003년 11월 용역 3,000여명을 동원해 대규모 노점상 단속에 들어갔고 결국 노점상들은 오랜 삶터를 잃고 말았다. 서울시는 궁여지책으로 노점상들에게 동대문운동장 축구장 안에서 영업을 하도록 할 수 있도록 약속했다. 세계적인 풍물시장이 되도록 돕겠다던 이 전 시장의 약속은 ‘말뿐인 헛약속’으로 남았고, 결국 동대문운동장 1천여 명의 노점상들은 1년 가까이 십시일반 돈을 걷어 약 6억원이라는 돈을 투자해 햇빛과 비를 피할 수 있는 차양막 등을 짓는 등 생계기반을 스스로 일구었다. 그러나 동대문풍물벼룩시장의 끈질긴 생명력은 오세훈 신임 서울시장이 동대문풍물벼룩시장에 대해 “배려는 배려일 뿐 항구적으로 영업권을 인정해 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또 다시 위태로워졌다. 서울시는 동대문풍물벼룩시장 노점상들에 대해 “이들이 불법 노점상 출신으로 법적 보호 하에 있을 수 없으며 축구장 이전 조치는 한시적인 것”이라는 입장이다. 서울시 건설기획국 관계자는 “확정된 부분은 없지만 공원화 사업 착공 이전까지 노점상들이 안정적으로 영업을 할 수 있도록 서울시가 노력하고, 이후 생계대책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점상이나 주변 상인들에 대한 대책 없이 서울시는 오로지 5대 패션도시 육성을 위한 개발에만 집중하고 있다. ■‘노점상 없는 노점상대책’, 이대로 좋은가 서울시는 그동안 단속위주의 노점정책을 펴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노점단속을 명목으로 ‘용역깡패’를 투입하고 과태료 부과, 재산가압류 등 탄압도 강화했다. 2004~2006년 서울시의 노점상 단속 계획을 보면, 2003년에 비해 2004년 30%이상, 2005년 35%이상, 2006년 40%이상 감축을 목표로 용역발주 및 관련 법령의 강화를 추진해왔다. 노점정비 실적이 우수한 구청에는 포상금까지 지급했다. 그러나 IMF 이후 경기 불황으로 생계형 노점상은 줄어들지 않았다. 서울시 발표 자료를 보면 노점상 수는 1989년 20,305개, 1997년 10,391개, 2000년 18,454개, 2003년 15,325개, 2006년 말 11,784개로 꾸준히 줄어들긴 했지만, 서울시 목표만큼 대대적으로 노점상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런 와중에 최근 서울시는 전문가와 구청 담당자들과 간담회와 대책논의를 진행해 노점관리방안을 발표했다. 정작 노점상관리방안 정책에 대해 서울시는 노점상과 단 한차례의 사전협의를 갖지 않았다. 전국노점상연합은 “일방적으로 노점상관리방안을 발표해놓고 서울시 및 자치구에 ‘노점개선자율위원회’를 노점상 등과 구성 운영하여 단계적인 해결책을 협의 강구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며 “서울시 스스로 노점상들과 대화할 자세도 의지도 없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스스로 신뢰를 무너뜨려놓고 노점상들과 무엇을 협의하겠다는 말인가”라고 반발하고 있다. ■ 우리나라 근대체육 100년의 산 증인, 동대문운동장 문화재 전문가들은 동대문운동장이 우리나라 근대체육의 산실이라는 문화역사적 가치도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동대문운동장에서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을 위해 만들어진 잠실운동장에 ‘국내 대표 축구장과 야구장’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 각종 국가 대항전 축구와 야구 대회가 열렸다.

그래서일까? 야구선수 출신인 나진균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사무총장은 “정신적인 고향이 되는 이런 곳은 많은 사람들에게 의미를 지닌 곳이다”며 “그런데 이런 곳이 바뀌는 중요한 일을 일부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저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동대문운동장이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과 울분의 호흡을 같이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82년 전인 1925년 10월15일이다. 그 무렵 지어진 건물로는 서울역사(1925년), 경성부청(서울시청·1926년), 동아일보사(1926년), 지금은 헐리고 없는 조선총독부(1926년) 등이 있다. 그 시절 동대문운동장의 이름은 ‘경성운동장’이었고, 경성부 토목기사 오오모리의 설계로 경성부가 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옛 훈련원 터 2만2700평에 15만5천원을 들여 지었다.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는 1925년 5월30일자에서 “운동장이 완공되면 고시엔(甲子園)에 이어 일본에서 두 번째 규모를 자랑하는 종합경기장이 된다”고 적고 있다. 식민지 반도의 옛 수도에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새 운동장을 지었던 것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었다. 경성부가 운동장 관리를 위해 만든 ‘조례’ 1조에는 “본 조례에서 경성운동장은 1924년 동궁(東宮)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설치한 운동장을 말한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 동궁은 영친왕 이은이 아닌 훗날 일왕의 자리에 오르는 히로히토를 뜻한다. 즉 조선인의 체육 증진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다. 일제는 근대 체육시설을 건립함에도 그 들만의 침략정서로 일관하였다. 준공 열흘 뒤 열린 개장 이벤트는 이름부터 침략의 의도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조선신궁봉찬경기대회(朝鮮神宮奉贊競技大會). 관변단체 주관으로 내선일체(內鮮一體)의 한마당을 꾸미려는 계획은 민족진영의 보이콧으로 반쪽 행사에 그쳤다. 3·1운동 이후 출범한 조선체육회는 이 대회와 같은 날짜에 따로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전조선 야구대회를 열었으니 민족체육의 고난의 길을 택한 셈이다. 하지만 이듬해 축구장·정구장이 완공되고 관중석도 정비되면서 경성운동장은 서울의 명물이자 체육인의 보배로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 우리나라 최초의 홈런이 나온 곳 연희전문 학생 이영민이 처음 날린 장외홈런(외야석이 없었으므로 구장 너머 숲으로 공을 날려야 홈런이었다)에 전국이 들썩거렸고, 경평(京平)축구에는 2만여 명의 인파가 모여 일경(日警)을 긴장시켰다. 우민(愚民)정책을 위해 마련한 운동장이 민족 에너지의 분출구가 되자 일제는 1932년 학생야구를 제한했고, 1938년에는 조선체육회를 강제 해산시킨다. 광복 후 서울운동장이 된 이곳은 군중집회 장소로 변신한다. 반탁과 찬탁집회가 모두 이곳에서 열렸다. 1946년 노동절에는 우익은 축구장에서, 좌익은 야구장에서 집회를 갖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훗날에는 박스컵 축구대회와 대통령배 축구대회가 열렸다. 또한 경성운동장은 식민지 조선인들의 울분을 달래는 창구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운동장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조선에는 배재학당·경신학교·휘문의숙 등 민족학교들의 운동장을 빼놓곤 운동 경기를 펼칠 만한 체육시설이 없었다. 그 때문에 축구나 야구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민가의 담장을 넘어 장독대를 깨뜨리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 위원장은 “동대문운동장은 공공시설로 다시 확보되어야 하며 장소가 가지는 역사성인 도성이 복원되어야한다”면서 “서울시가 추진 중인 디자인센터는 또 다른 난개발 사업에 불과하고 이는 문화적 감수성이나 역사성을 무시한 저급한 신개발주의 또는 우리의 진정성을 밀어버린 일제의 만행과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동대문운동장. 이 곳을 터전으로 고단한 하루하루를 버티는 도시빈민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나라 근대 체육 100년을 기록하기 위해서라도 계속 그 자리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오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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