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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생활 사나이, 조직사회와 공권력을 향해 쏘긴 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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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9호 ⁄ 2007.07.03 11:50:33

사회의 부정부패가 하루이틀이 아니다 보니, 세상에는 별일이 다 일어난다. 세상에는 조직 논리에 희생당하지 않기 위해 양심을 접어둬야 하는 일도 늘 벌어지며,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많은 사회인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진리 아닌 진리가 됐다. 이런, 글을 쓰는 나도 다 짜증이 난다. 우리 사회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바른 생활 사나이’가 과연 우리 사회에 있을까? 물론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뉴스를 보게 되면, 안타까운 비극을 당하는 사람들은 늘 바르게 살려 노력하고, 착실함의 표본을 보여주던 사람들이 많았다. 뭔가 잘못된 것이다. 상식대로라면, 사회는 그런 사람들부터 잘 살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반드시 돈을 많이 버는 삶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정한 행복을 충분히 누리면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인간이 사회라는 울타리를 만들고 정부라는 합의기구를 만든 이유 역시 행복과 안전이다. 하지만 아주 오랜 옛날부터, 평범한 우리는 그에 대해 보장받기 어려웠다. 인간이 있는 곳에는 다양한 이유로 서열이 생긴다. 가진 돈에 따라, 혹은 가진 힘(권력, 혹은 학벌)에 따라 어디를 가든 서열이 생긴다. 우리의 행복이 보장받지 못하는 이유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힘을 사회적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고, 과시하고 싶어 하며, 그 힘을 이용해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려 한다. 많은 사람들의 제각기 다른 행복을 조절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조직과 권력이지만,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에 휘둘리면서 악용되는 것들이다. 영화 <쏜다>를 이야기하기 위한 필자의 넋두리, 이만하면 된 것 같다. ■ 바른 생활 사나이, 분노를 폭발시키다 이런 설정의 영화가 없던 것은 아니다. 할리우드에서는 그 유명한 한국인 비하 파문을 낳은, 마이클 더글라스 주연의 <폴링 다운>(1993)이 있었고, 우리나라에는 검사와 수사관 역할을 맡은 무명배우들이 ‘행세’를 하면서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부정부패와 부딪치게 되는 <엑스트라>(1998)가 있었다.

이런 설정의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대리만족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부정부패를 나열하면서 평범한 우리의 처지와 가까운 캐릭터로 하여금 그들을 과감히 단죄토록 하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어려운 일이지만, 상상의 실현 공간인 영화이기에 가능한 설정일 듯이다. 어쩌면 영화의 순기능이자 중요한 힘 중에 하나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쏜다>에는 교과서적인 인생을 살던 공무원 ‘박만수(감우성)’와 파출소를 제 집 드나들듯 다니던 ‘양철곤(김수로)’을 등장시킨다. 윤리 선생님이셨던 아버지의 말씀대로 남들 다 했던 ‘독재 타도’에도 끼어들지 않고, 공부만 하며 살려 노력했지만, 쉽지는 않다. 청탁을 거절했다는 점이 작용돼 ‘눈치가 없다’는 이유로 정리해고당했으며,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이혼을 선언당하기까지 한다. 억울할 뿐이다. 그저 상식적으로 살았을 뿐인데, 그는 단 하루 만에 낙오자가 된 것이다. 분노한 그는 ‘소변 금지’라는 말에 울컥하며 파출소 담벼락에 자신도 모르게 소변을 봤다가 파출소 안으로 끌려가게 된다. ‘양철곤’ 역시 만만치 않다. 그는 <모던 타임즈>의 찰리 채플린처럼, ‘먹여주고 재워주는’ 교도소에 가기 위해 무전취식을 저질렀다가 파출소로 끌려간다. “제발 교도소로 보내달라”면서 소동을 부리면서 ‘박만수’와 만나게 된다. 어제만 해도 우리 사회 최고의 모범생이었던 남자와, 갈데까지 간 것 같은 남자가 만났으며, 강력계에서 파출소로 좌천된 경찰 ‘마동철(강성진)’이 만나면서, 영화는 최악의 파국으로 치닫는다. 소동에 소동을 거듭하다 ‘박만수’와 ‘양철곤’이 어처구니없게도 총과 순찰차를 탈취해 달아나는 것이다. ■ <쏜다>와 <폴링 다운> <폴링 다운>의 마이클 더글라스의 분노를 유발한 것은 ‘더위’와 ‘교통체증’이었다. <폴링 다운>은 우발적이었으며, 미국인의 시선이 깊게 개입된 영화였던 탓에 우리 눈에 낯선 광경이 많이 보인다. 엉뚱한 사람들에게 분노를 풀어버리는 마이클 더글라스의 행동도 다분히 우발적이다. 아니, 우발적이다 못해 돌발적이다. 우리 식 표현으로 ‘골통’, 혹은 ‘고문관’의 기질이 엿보인다. 그를 대하는 아내(바바라 허쉬)의 자세도 다소 지나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행동을 보면 아내의 그 지나친 자세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쏜다>의 ‘박만수’는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는 이성을 잃지 않으며, 미쳐버리지도 않았다. 단지, 지금까지의 ‘바른 생활’에 대한 분노가 폭발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바른 생활’을 인정하지 않는, 조직 논리에 찌든 주변인들과 사회 그 자체에 어필하고 싶었을 뿐이다. 분노와 불만이 쌓이면, 언젠가는 제대로 폭발한다. <쏜다>가 포착한 것은, ‘박만수’의 그 ‘언젠가는 제대로’인 것이다. 은퇴를 앞두고 동료들의 방해를 이겨내고 마이클 더글러스를 제지하는 <폴링 다운>의 로버트 듀발은 침착한 경관이다. 하지만 <쏜다>의 ‘마동철’은 자신의 권력을 매개로, 자신의 처지에 대한 화풀이를 평범한 민주시민에게 한다는 것이다. 벌금만 물리면 될 것을, 갖은 피해망상과 자격지심 속에서 ‘박만수’를 코너로 몰아넣는다. ‘박만수’와 ‘양철곤’이 저지르는 그 일탈과 분풀이는 사실 ‘마동철’이 유도한 것이며, ‘마동철’에는 우리 사회의 시민들이 바라보는 경찰의 부정적인 이미지와도 일맥상통한다. ‘박만수’를 코너로 몰아넣은 ‘공무원 사회’와 ‘경찰’, 바라보는 서민들의 눈초리가 곱지만은 않은 사회들이다. <쏜다>에는 ‘바른 생활 사나이’의 분노 폭발 외에도, 진정한 부패권력에는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서민을 억압한다고 알려진 공권력에 대한 이야기도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 비약과 과장, ‘멈춤’이 아쉽다 <쏜다>는 자연스럽게 일종의 로드 무비 형식을 취하면서, 할리우드의 여러 명화들에게서도 흔적이 발견된다. 하지만 일부 한국영화 특유의 단점인 어설픈 비약과 과장, 그리고 ‘멈춤’이 아쉬움으로 작용한다. 분노가 폭발해 방아쇠를 당겼지만, 그 총알은 더 멀리 나아갔어도 됐다. 아예 우리 사회의 부패한 조직사회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그런 시도가 엿보이기는 하지만, 뻔한 구석이 없지는 않다 카타르시스를 주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확실하게 내질러버리는 것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들의 행동이 일정한 선에서 멈추면서, ‘마동철’의 캐릭터도 설익어버렸다. 그의 동기는 어딘가 이해가 가면서도, 어설프다. 콤비에게 명분을 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명분을 줘야 한다는 그 관념은 성공적이기는 했지만, 각본의 이음새 면에서는 아쉬움을 노출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법체계가 비판의 대상이 된다 할지라도, 노상방뇨가 경찰관 맘대로 구속사유로 연결되는 것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좀 더 다른 설정은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이다. ‘조직 사회’를 정면으로 다룬 드라마 시리즈 <하얀 거탑>이 인터넷 내에서 큰 화제가 되면서, <쏜다>를 보는 관객 역시 그 이면을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 사회는 어디까지 평범한 우리를 분노시킬까? 비약과 ‘멈춤’으로 인해, 평론가들의 반응은 썩 좋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로서는 공감할 요소가 꽤 많다는 점이 흥미롭다. 어쨌든 우리도 조직 사회와 인간의 무리에서 신음하는 평범한 사회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박형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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