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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천항로> 조조가 꿈꾼 푸른 하늘, 그 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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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2호 ⁄ 2007.07.03 10:50:23

“그는 민심을 사는 게 아니라, 얻고 있다.” 명쾌한 해답이다. 뒷받침하는 인재와 세력에서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던 유비를, 조조가 기어이 꺾지 못했던 진정한 이유다. 평생에 걸쳐 실리를 추구하며 파죽지세로 천하를 얻으려 했던 조조였지만, 가는 곳마다 그를 막는 이는 언제나 유비였다. 유비는 결국 ‘혈통’이라는 근거로부터 비롯되는 정통성과 명분의 이점을 앞세워, 조조가 기어이 오르지 못한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 누군가가 그랬다. 센 사람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사람이 센 것이라고. 유비는 진정한 강자였던 셈이다. 다방면에 걸쳐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는 천재적인 재능을 과시했던 조조였지만, 역사는 정치적인 명분과 필요에 의해 그에게 악역의 굴레를 씌운다. 수성형 인간 손권에게는 큰 매력이 없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악역을 맡기기에는 무게가 떨어졌다는 해석도 있다. 악역이 거대해야 주인공도 더욱 빛이 나는 법. 그렇다면 그 악역은 조조가 맡을 수밖에 없었다. 명분 좋아하는 당대의 선비들은 어쩌면 환관의 양자라는 그의 신분을 주목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조조를 재해석하며, 지구상에 둘도 없을 완벽한 인간으로 그려낸 <창천항로>는, 그에게 ‘유학자와의 전쟁’이라는 또다른 짐도 부여했다. 억울하게 죽었다고 알려진 명의 화타도, 유학자로서 조조와 충돌했기 때문에 죽었다는 흥미로운 가설과 함께 말이다. ■뜬구름 잡아 3만 리, 무협과 권력의 활극 <창천항로> 2006년 10월, 드디어 국내에도 <창천항로>의 마지막 36권이 출간됐다. 재일교포 작가 이학인이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작화를 맡았던 킹콘타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마무리한 것이다. 무협과 권력 활극, 파격적인 전투 묘사와 성애 묘사가 결합하면서, <창천항로>는 조조를 통해 남성이 꿈꾸는 ‘완벽한 남성’에 대한 기나긴 강의를 마쳤다. <창천항로>는 비단 조조 뿐 아니라, 주연과 조연 가림없이 모든 캐릭터에게 인격과 무게를 부여한다. 난세를 살았던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난세를 살았으며, 자신의 삶에 얼마나 최선을 다 했는지에 대해 피가 넘치는 전쟁판을 계기로 보여주려 노력한 것이다. ‘최선’을 다했음은, 겉보기엔 무능력한 도망자로 그려지는 유비에게서도 느껴질 수 있다. <창천항로>는 그의 인(仁)을 협(俠)으로 해석하는데, 작품 속에서도 유비는 순간순간 누구의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 영웅으로서의 자각, 현실을 이겨내야만 하는 사명,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때때로 저질러야만 하는 냉혹 등, 그의 트레이드마크로 그려지는 ‘거대한 그릇’에는 다양한 장점이 채워져 간다. <창천항로>는 그가 ‘그릇의 크기’와 이유모를 인기만으로 조조와 맞상대하며, 판타지의 새 기원을 열어낸 조조를 긴장케 하는 영웅으로 남을 수 있었다고도 주장하는 것이다. <창천항로>는 그런 그에게 ‘천하인’의 호칭을 부여한다. 일생에 걸쳐 가장 위태로웠던 형주에서의 조조의 추격을 계기로, 자신의 협을 잃고 성적 욕망에 사로잡혀 미쳐있던 유비는 “내가 있는 곳, 그곳이 천하”라고 선언하면서, 드디어 조조의 라이벌로 격상된다. 그 유명한 천하삼분지계도, 천하를 셋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천하를 만들어 천하를 늘리는 것’이라는 파격의 해석이 뒷받침된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무를 완성짓고자 하거나 뛰어넘고자 하는 무인들의 이야기, 시대를 넘고자 하던 수많은 책사와 정치인들의 이전투구. 그 중심에는 늘 조조가 서 있으며, 말 한 마디가 명언이라고 할 수 있는 언어의 향연을 쏟아낸다. 일각에서는 조조가 도저히 약점이 없는 있을 수 없는 인간으로 그려지면서, “<창천항로>는 삼국지가 아니다”라거나 “고도의 수법으로 조조를 깐다”는 주장도 한다. 그럴 수도 있다. 해석의 차이일 수도 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는 남성의 판타지를 두 가지 유형으로 분석해 다른 방식으로 그려내는 것일 수도 있다. 유비는 가깝게, 조조는 다소 멀게 느껴지는 우리의 오랜 심리와 역사적 근거를 차용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영악한 시선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상상 속에만 자리 잡고 있는 두 캐릭터의 신적 재능을 바탕으로 해 세상과 부딪쳐 싸우는 영웅에 일면 환호하는, 남성의 ‘뜬구름’을 유감없이 잡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자 한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조조의 길은! 뭇 인간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조조가 만민에게 사랑받는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땅을 달리는 조조의 두려움은 백 일이 지나면 잊혀질 것이다. 백 년이 지나면 그 이름조차 깨끗이 지워져 없어지겠지.” 조조를 승자라고 해야 할까? 패자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 영역을 넘어섰다고 해야 할까? 얼핏 보면 승자로 보이지만, 승자라고 하기엔 어렵다. 그의 왕국은 사마 씨 일족에 의해 수십 년 만에 무너졌다. 게다가 <창천항로>에서 ‘유학과의 전쟁’으로 규정한 그의 정치적 투쟁도, 끝내 완성됐다고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고 할 수 있다. 유학의 위세는 그의 사망 이후에도 근 천 몇 백 년을 더 이어져갔다. <창천항로>에서 그려지는 그의 정치적 철학은 ‘두려움’이다. 이문열은 황제의 자리를 아들의 대에서 이루기로 하고 견뎌냈다는 해석을 이끌어냈지만, <창천항로>에서는 “천자는 사랑받는 대상이므로, 두려움의 화신을 작심한 조조가 앉을 자리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펼친다. 난다 긴다 하는 책사들 조차도 일장연설을 감수해야만 했던 천재적인 그의 재능은 두려움의 모체가 되며, 조조는 그 두려움을 정치적 패러다임의 변화와 적대 세력과의 혈전에 활용한다. 일종의 공포정치다. 하지만 공포정치와 독재정치는 권력을 행사하는 독재자 본인이 사라지면 오래 유지될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안고 있다. 게다가 ‘두려움’을 모체로 정치 철학을 펼쳤음에도 권력 내부에서의 ‘반(反) 조조 운동’은 끊이질 않았다. 인간이란, 공포에도 끊임없이 적응하면서 극복할 수 있는 동물이다. 신적 재능을 가진 이의 초보적인 판단 실책이라 아이러니하다. ■<창천항로>, 남성의 가슴 속 ‘푸른 하늘’을 잡아내다 어쩌면 <창천항로>가 ‘고도의 수사법으로 조조를 공격한다’는 평을 듣는 근본적인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재능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려 했다지만, “사람을 다스리면서도 사람을 살피지 않는다”는 군주의 조건을 내세운 그의 이면이 돌출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여포 패망 이후, 사로잡힌 여포의 책사 진궁이 조조에게 “너는 군주의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안다지만, 나는 그 세 가지 모두 알고 있는 자를 섬길 수는 없다”고 주장했던 장면이 있다. 물론 그 대답의 의미는 “조조는 그 스스로의 재능을 믿기에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는 부연설명이 증명하지만, 먼 훗날 임종을 앞둔 조조의 한 마디를, 그는 수십 년 앞서 미리 짐작했을 수도 있다. 미련을 버리고 체념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비상한 감각이 이끌어낸 대답일 수도 있다. 어쨌든 <창천항로>는 삼국지 마니아들 사이에서 다양한 격론을 이끌어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상업적인 성공을 이끌어냈다. 게다가 ‘다른 방식의 묘사’도 묵직한 묘사와 설득력이 보장된다면 주목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일깨웠다. 이야기를 맡은 이학인의 사망으로 인해, 연재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도 다양한 격론을 이끌어낸 화두를 완성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어쩌면, 그 격론마저도 의도된 계산은 아닐까? 거침없는 뜬구름, 압도적인 명대사의 향연에 굴복했던 적이 있기 때문에 든 생각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푸른 하늘’이 있으며, 그를 향해 가는 길을 꿈꾼다. <창천항로>가 인상적인 이유는 아주 사소한 것일지도 모른다. 조조와 유비에 대한 논쟁을 떠나, 비록 뜬구름일지라도 남성의 가슴 속에 자리 잡혀 있는 ‘로망’이라는 한 때의 푸른 하늘을 거침없이 잡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유치한 뜬구름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바라보고 상상하며 진한 감동과 쾌감을 느끼는 것, 남자의 로망은 그런 것이 아닐까? -박형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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