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머리에서 바라본 산자락들은 왜 그리도 멋있을까. 빼어난 풍경은 그것을 이루는 여러 요소들이 묶일 때 비로소 우리의 눈 속으로 걸어들어 온다. 예를 들어, ‘남해 금산’은 그냥 ‘금산’이라고 부르면 안된다. 내륙의 금산과 구별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반드시 ‘남해’라는 풍경과 함께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섬진강은 이른 봄에 찾아야 강 주변의 매화 가득한 섬진 마을이 강 풍경을 더욱 살갑게 해주는 것처럼. 풍경은 단순히 그 자리에 그 형상으로 있음으로 하여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기억의 습작’과 풍경이 만날 때 하나의 형상으로 남는 것이다. ■ 사람의 풍경, 풍경의 노래 해마다 휴가철이면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위안과 넉넉함 혹은 즐거움을 줄 수 있는 ‘풍경’을 찾아 떠난다. 그러나 멋진 풍광과 마주했을 때 감탄사 한 번만 던지고 돌아서면 그대로 잊는 것이 대부분이다. 풍경이라는 게 아직은 시각적인 호사 이외에는 별다른 인상을 주지 않는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누구나 감겨진 눈을 뜨기만 하면 볼 수 있는 게 풍경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그냥’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에 누군가 지적했듯이, ‘사랑하게 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비로소 전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육체적인 눈뿐만 아니라 마음의 눈 즉, 주변의 사물과 현상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풍경들이 하나씩 둘씩 ‘제대로’ 보인다는 것이다. <풍경의 발견>은 현재 동아대학교 조경학부 교수인 강영조의 책이다. 그는 이미 지난 2003년 풍경미학 입문서인 ‘풍경에 다가서기’에서 독자들에게 각자의 영혼 깊이 간직하고 있는 어린 시절의 고향 풍경을 발견하는 방법을 이야기 한 바 있다. 이 책에 실린 풍경은 산과 계곡, 해안과 초원 그리고 강에 놓인 다리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우리가 그 동안 무수하게 보아온 ‘한국의 명풍경 100선’ 류의 관광가이드북과는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왜냐하면 이 책은 풍경 그 자체에 대한 저자 개인의 호불호(好不好)를 말하는 게 아니라, ‘풍경미학’의 이론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풍경이라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나’와 깊은 인연이 있다. 우리가 무심코 바라보는 산자락 하나조차도, 입장을 바꿔놓고 본다면 그 산자락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즉, 풍경은 자신을 바라보는 이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온다. 풍경은 또한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발견하고 만나는 곳이다. 강릉 경포의 벚꽃축제는 벚꽃을 보기 위해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꽃무리와 어우러질 때만이 아름다운 하나의 풍경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삼다(三多) 혹은 삼무(三無)와 더불어 살아가는 제주도 사람들은 그네들의 삶 자체가 하나의 풍경이며, 지리산 자락의 다랑이논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하나의 풍경이다. ■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아침 출근길마다 우리 눈에 밟히는 보도블록 사이의 여린 풀꽃. 우리는 그런 것들에게 풍경이라는 호칭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의 어리석은 영혼에 ‘풍경’이라는 것은 ‘뭔가 웅장하며 호사스러운 것’을 의미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풍경이라는 것은 사실 자연만이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우리네 선조들이 만들어놓은 일련의 건축물들을 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네들은 지금의 우리와는 달리, 자연 속으로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동화되는 방식의 건축방식을 썼다. 그것은 단지 건축기술이 지금에 비해 낙후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경복궁 인정전이나, 부석사 무량수전, 석굴암 등의 건축물들을 지금의 기술로 완벽하게 복원이 가능하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하긴, 구한말의 건축물조차 복원을 장담할 수 없는 이 첨단 하이테크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는 하다. 그러니 기껏 한다는 게 컴퓨터시뮬레이션으로 가상현실이나 만들어 낼 수밖에. 풍경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풍경은 왜 우리로 하여금 “좋다!”라는 감탄사를 터뜨리게 할까. 풍경은 비와 바람이, 그리고 세월이 만들어낸 건축물이다. 인간의 재주가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금강산의 일만 이천 봉을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풍경에 감동한다. ■ 말(言)이 만드는 풍경 빼어난 풍경을 노래한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그 아름다움에 취해 풍경을 찬양하기 바빴을 뿐, 풍경을 바라보는 법을 일러주지는 않았다. 풍경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발견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풍경을 바라볼 때조차도 사람마다 보이는 형상이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설악산 대청봉 암벽에는 벌거벗은 여자의 뒷모습과 흡사한 모양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두 형상의 유사성을 미리 발견한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일러주었을 때 비로소 벌거벗은 여성의 형상으로 우리의 망막에 각인된 것이다. 그러므로 풍경은 객관인 동시에 주관이다. 풍경은 그저 보기에 좋은 자연경관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풍경 속에는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으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보다 나은 삶의 방식과 소중히 가꾸어야 할 가치들, 또 때로는 철학적인 질문들을 던져주기도 한다. 또한 풍경은 그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자, 우리 뒤를 걸어오는 이들과 공유해야 할 세월의 흔적이다. “서면 백산(白山), 앉으면 죽산(竹山)”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동학농민전쟁 당시 지금의 전북 백산면의 한 지명을 가리키는 말이다. 동학농민전쟁이 아니었다면, 그 야산은 그저 농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야트막한 구릉에 다름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이름 없던 야산 하나를 역사의 기준점으로 만들었다. 봄이 깊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아침저녁으로 무더운 바람과 더불어 여름이 올 것이다. 가고 싶은 곳,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서’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가 매일 마주치며 살아가는 일상의 풍경, 그것의 재발견 속에 있다. 그리고 그 출발은 굳이 명승지가 아니더라도 삶의 근거지 여기저기에 있는 산과 들과 나무와 바람과 풀꽃들의 어울림을 ‘맑은 물에 씻은 눈으로’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 속에 있다. “좋지 않은 날씨란 없다. 다만 적절하지 않은 옷이 있을 뿐이다” - 요하네스 뮐러 -유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