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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과 「을미사변」

옐친의 타계를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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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5호 ⁄ 2007.07.03 10:17:21

1896년 2월 1일부터 약 1년간 고종과 태자가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아관파천(俄館播遷) 사건을 우리는 흔히 러시아 군부의 무력에 의하여 러시아가 저지른 사건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많았다. 물론 심약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생활을 하게 되자 이 기회를 활용하여 러시아 공사 웨베르(Waeber : 韋貝)는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취권을 비롯하여 경원(慶源)·종성(鍾城)의 채광권, 서울서 원산 간의 전신선(電信線)을 시베리아 선에 연결하는 권리 등을 러시아가 따내도록 한 과오를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나라의 정세는 풍전등화(風前燈火)였었다. 저 불법무도한 일본이 무자비한 자객(刺客)들을 앞세워 경복궁(景福宮)으로 쳐들어가 궁내부대신(宮內府大臣) 이경식(李耕植)과 연대장 홍계훈(洪啓薰)을 살해하고 옥호루(玉壺樓)에서 침전에 들어있던 민비를 끌어내어 참살한 뒤 시체에 석유를 뿌려 뒷산에 묻은 을미사변을 저질렀다. 고종은 이 왕후의 참살에 벌벌 떨기만하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친로파 내각을 물리치고 유길준(兪吉濬) 등 친일파를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 내각을 수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내각은 모든 방면에 일본식 개혁을 단행하여 음력의 폐지, 건양(建陽)연호의 시용, 단발령의 시행 등을 급진적으로 시행하였다. 고종의 입지가 오죽했으면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임금이 아니라 새장에 갇힌 새로다. 언제나 이 새장을 벗어날꼬』하면서 탄식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은 명동성당으로 파천하여 일신의 안위와 국제적 후원을 호소할 것을 군신 간에 숙의한 적도 있었다. 아관파천이 극비리에 이루어지고 남의 나라 공사관 안일지라도 고종의 어명이 힘을 탄지라 고종은 왕의 전지로 수상이하 대신들을 모두 잡아 죽이라는 영을 경무사(警務使) 허진(許晉)에게 내렸다. 한편 고종이 경운궁으로 나온 뒤 우리나라가 당당한 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표명하기 위하여 이해 8월 국호를 대한(大韓)이라 칭하고 고종이 황제 위에 오르니 건양(建陽) 2년을 광무(光武)원년이라고 개칭하였다. 이것이 대한이라는 우리나라 국호의 시초이다. 옐친 러시아 초대 대통령이 76세를 일기로 23일 타계했다. 옐친 전 대통령은 옛 소련해체와 공산주의 붕괴, 러시아 공화국 탄생과 자본주의 도입이라는 격동의 러시아 역사를 이끌어온 주인공이다. 그는 91년 8월 개혁에 저항하는 공산당이 모스크바에서 군사 쿠테타를 일으키자 의사당에 진입하는 쿠테타군 탱크에 올라가 개혁지지를 호소하는 연설을 한 위대한 영도자이기도 하면서 우리나라와도 잊지 못할 은연(恩緣)이 있다. 1994년 6월 2일 크렘린궁에서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친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검은 서류상자 하나를 건넸는데, 이것이 한국전쟁 전후 김일성의 남침 계획 등을 담은 고문서 사본인 것이다. 이 문서들은 현재 한국의 외교사료관에 보관 중인데 북한이 6·25를 남한의 북침이라는 억측의 말문을 열지 못하게 한 단서이다. 50년 9월 28일 유엔군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이 괴멸될 때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친필서한을 보내 『북한군 자력으로 38선 이북을 지킬 수 없다』며 소련이나 중공군의 즉각 개입을 간절히 요청하는 사실도 드러났다. 옐친 대통령은 91∼99년 대통령 재임기간동안 3차례나 한국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정도로 친한 외교를 펼쳤다. 시의(時宜)에 따라 개인이나 국가 간의 처신이 달라지겠지만 공산주의의 맹종(盲從) 스탈린과 후르시쵸프와는 달리 옐친 러시아 전 대통령을 우리는 추모해야 한다. 대한제국의 성립역사도 동시에 짚어 보아야할 일이다. -박충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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