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배제된, 오직 몸짓과 표정만으로 인간사와 온갖 종류의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예술 마임. 마임이 우리의 문화예술에 자연스럽게 자리할 때까지 많은 공연을 기획하고 오랜 기간 무대에서 연기를 해 온 김성구 씨. 지난 5월 22일 우리나라 마임 1세대의 대표주자, 마임니스트 김성구 씨를 대학로에 위치한 ‘김성구 마임극단’에서 만나 얘기를 들어보았다. ■ 마임이라는 말을 이젠 많은 사람들이 쓰고 또 알고 있습니다. 김성구 씨께서는 70년대 중반, 문화적으로 척박한 우리 땅에 마임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구축하셨어요. 김동수·유진규 씨랑 함께 ‘마임 1세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계신데요 “유진규 씨랑은 동성중학교 시절부터 가장 친한 친구사이입니다. 고등학교 때도 매일 만났는데, 그 때 처음으로 서양식 장르인 마임을 소개한 공연을 함께 보고 꿈을 같이 꾸게 되었습니다. 그 땐 참 어려웠죠. 뭐, 환경이 그런 것을 어떡합니까. 마임이라는 말 자체부터 영어 스펠링을 외워 사용했으니까요. 이게 긴가 아닌가 따지려 해도 어떤 잣대가 있어야 되는데 정말 선생님이 너무 없었단 말이죠. 그런 것을 가지고 ‘이 땅에 공헌을 했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너무 가난한 긍지 같고, 누군가 ‘둘 다 이 땅의 마임을 위해 무엇을 했나’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습니다. 당시 환경에 또래 연기자 중 우리처럼 매스컴을 많이 타 본 사람은 없을 거예요. 유진규 씨는 대사도 잘해서 서술적인 마임을 시작했고, 제 경우는 미술장르나 다른 장르와의 만남을 형상화하는 작업을 했죠. 둘 다 못하고, 둘이 하는 것이 예술은 아닌데 둘이 함께 서면 두 가지 색깔이 되고 둘 다 괜찮은 놈이 되어버린 거예요. 유진규 씨랑 만나면 농담 삼아 ‘같은 업자끼리 내가 너 마임을 모르겠다’합니다. 한쪽으론 축하이고 격려면서 한쪽으로는 시니컬한 말이지요.” ■ 그 이름에 대한 부담감이 있으실 것 같아요. 초기의 마임 하시는 분들과 지금 분들이 어떻게 다릅니까 “이제는 미덕이 되고 오히려 그러지 못하면 무능력이 되지만 우리 때는 방송출연을 상당한 외도로 봐서 금기시 했어요. 사실은 지금 경우가 훨씬 바른 상황일 거에요. 우리같이 외통수의 시대만 살았을 시에는 그냥 한정만 보이는 거고, 그것의 넓은 영역 같은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었으니까요. 어떤 책무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 방식의 마임만 알려주려고 하니까 과거와 똑같이 되니까 밥 빌어먹기 딱 알맞은 거에요. 아무래도 디지털 시대가 들어오면서 이 시대가 머리로서는 충분히 받아들여지지만 몸으로 받아들이기엔 아직 낯설음, 서투름이 있잖아요. 마임을 하면서 장르를 넘나들면서 이 버전을 때로는 다른 버전으로 바꾸기도 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럴 능력이 되어야지 돈도 벌고 사랑도 받을 수 있죠. 소위 말하면 요즘에 ‘대안예술’이라는 것도 많이 나오는데, 필요에 의해서 예술가들에 의해 막 받아들여집니다. 예를 들어 비보이나 엑스게임 같은 것들은 비언어적 개념이구요. 마임도 넘버벌의 개념이지만 넘버벌 개념은 어떤 극적인 것보다는 집단극으로 제 몸이 한쪽으론 가면서도 아직 쉽게 가지지 않습니다. 넘버벌에서는 감탄은 있을 수 있지만 감동이 없어요. 마임의 경우는 넓은 의미로 연극이라는 장르에 포함 될 수 도 있으니까 이런 것들이 지니는 가장 큰 생명력은 역시 보는 자에게 어떤 의미로든 감동을 낳게 하는 거잖아요. 지금 이것(김성구 마임극단)을 만든 것은 비언어적 행동을 좀 본격적으로 하려고 한 것입니다. 제가 아웃도어에 많이 관심이 있어요. 거리극이라고 해야 하나요.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도 역사가 제법 있는 마당극이라는 개념이 있지만 마당극은 아무래도 본다는 약속을 가지고 오는 것이고, 물론 요즘엔 예고편을 하긴 하지만 거리극은 그냥 아무 보려는 목적 없이 지나가는 행인의 눈길을 모아서 그들과의 감정의 교류를 통해서 어떤 것을 안겨 준다는 것은 어떤 목적성에서 좀 다르지요.” ■ 마임니스트로서의 지난 얘기 좀 더 들어 보겠습니다. 1998대의 어떤 작품 설명에 대한 보도를 보니까 ‘마임의 서정성 회복’이란 말을 하셨더라구요. 그 말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요 “그 때는 깊이 생각한 후가 아니라 어떤 필이 닿아가지고 그 단어가 나온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때 당시 마임의 기술적인 문제, 그것 자체가 제겐 큰 화두였어요. 왜냐하면 번지수를 못찾겠으니까요. 그런데 그 고민은 1978년도에도 그랬고 1988년도에도 그랬어요. 그런데 몇 차례 나가서 일시적인 연수도 받으면서 ‘어느 정도 내가 중간은 가겠구나’, ‘내가 이들에게 보여주는 것들이 아주 빗나간 것은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어떤 체계적인 훈련을 통하지 못하니까 매일 보면 어떤 아마추어리즘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고 또 실제가 그랬어요. 그런데 언젠가 ‘이게 아니잖아’ 하는 생각이 들면서 자꾸 우리 주변에서의 산 이야기를 담고 싶다 보니 제일 근저적으로 내통할 수 있는 정서가 서정이더라구요. 표현이 적당할지 모르지만 돌이켜보면 역시 벗어날 수 없는 어떤 청승이라는 게 있더라구요. 그래서 미국에서 다시 들어오면서 본격화 하려고 내세운 슬로건 중의 하나예요. 소위 말하는 집단 마임을 통해서 마임의 대본화, 희곡화 작업이 이루어진 셈이죠. 그전까지 대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만 알아보는 일종의 작품메모나 시놉이었죠. 그런데 이것을 후배들에게도 재연 할 수 있는 대본의 필요성을 느껴서 제가 일부러 극작가들에게 ‘아픔 같은 우리 주변의 어떤 이야기들을 서정을 바탕으로 해서 마임으로 꾸며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그래서 흥행은 안됐지만 접한 사람들에게는 어떤 이미지 변모를 시켰다는 이야기를 좀 듣기도 하고 역시나 또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더라구요.” 일■ 반 관객이 봤을 때 마임이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마임은 희화성, 추상성, 상징성이 강합니다. 그것 때문에 코드가 금세 맞아 떨어지면 이해가 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정말 재미가 없고 어려운 마임이 됩니다. 그게 제일 함정이에요. 그런데 서정성이면 사람들이 일단 열어요. 그것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센티멘트이고요.
작년에 건축가 김수근 선생 타계 20주년 기념으로 공연한 ‘우수,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라는 작품도 그 일환의 하나인데 요번에는 표현술을 빌어다가 쓰더라도 줄거리를 연결하려는 게 아니라 그것의 이미지화를 통해서 각자의 감성을 자극시키거나 유발시켜 주는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그런 것들이 근저적으로 풍겨지는 서정이 아닌가 해요. 그래야만 마임이 많은 관객을 불러 들여야겠다 해서 시도해 봤습니다.” ■ 결국은 그것이 대중성의 문제와 연결이 되는 것이네요. 그래서 계속 다른 시도를 하고 계신 것 같아요. 연보를 보니 소리꾼 김용우, 기타리스트 이성우, 사물놀이꾼 이광수, 플룻스트 문록선 씨 등과도 같이 공연을 하시고 가야금과도 같이 공연하시는 등 여러 가지 시도를 많이 하셨어요. 마임이라는 한정된 장르를 계속 변화시키고 있는데요 “마임이라는 공연 양식이 지금은 호소력이 약하잖아요. 그러니까 지금은 퓨전화 시켜서 갔다 붙여야 되잖아요. 그것은 일종의 퓨전이나 크로스 오버 작업이었는데, 서로의 장르 간에 줄거리를 놓고는 못 덤비죠. 작품을 할 때 적당히 서로의 고집도 눈치 채고 양보도 해야 하고 양쪽 장르가 녹아들어가는 게 있어요. 물론 그냥 말도 안 되는 것을 갔다가 딱 붙이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어떤 공통점을 가진 것들을 진지한 사람들이 연구해서 잘 살려야죠. 대중의 어떤 바탕 속에서 고급예술이라는 말을 쓴다면 차별화의 타당성이 존재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천편일륜적인 것으로 나가면 도외시 당하고 뭐 마치 예술을 소외지역으로 돌면서 선심이나 쓰는 행위로 간주되어 아주 안 좋은 태도입니다.” ■ 1974년부터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 오시고 미국에도 약 8년간 다녀오셨지요. 1998년에 미국에서 돌아오시고 나서 마임에 커다란 변화를 시도하셨습니다. 가장 크게 변화 된 게 얼굴에 하얀 분칠을 지우시고 공연 하셨더라구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게 아까 말씀드린 ‘마임의 서정성 회복’과 연결이 되는 것 같아요. 마임이 궁극의 목표도 일반 연기와 똑같아요. 단지 의지적으로 말을 배제하는 건데, 배제하는 만큼 왠지 반쪽짜리 연기같다는 그런 생각을 보다 조금 더 극대화한 특성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몸짓의 문법’이라고 불리는 어떤 테크닉이 있기는 하지만은 그런 것이 불필요하다는 의미보다는, 먼저 선행해야 할 것들이 그냥 일상의 쉬운 몸동작부터 나가려면 좀 ‘얼굴에 환칠하는 것부터 깨보자’ 하는 것이었어요. 과거에도 작품상 매번 그런 것은 아니고 필요시에는 했습니다. 마임을 하는 사람들이 거기서 구축되어지는 성격이 상당히 양극대화적인 어떤 요소를 지니고 있어요. 그 중에 삐에로라고 불리는 거나, 클라운이라고 불리는, 채플린 같은 트램프라는 이름을 가진 종류는 광대들이잖아요. 그들 얼굴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은 한쪽은 웃고 있는데 한쪽은 울고 있는 표정이란 말이죠. 한 얼굴에 희비극을 다 담고 있는 것들이 마임 분장의 특성이 아닌가 해요. 하나의 관행이고 유형이고 교과서 같은 것입니다. 슬플 수 있는 것은 어떤 서정성이 깔려 있으니까 가능한 것 같아요.” ■ 당시 미국 판 일간지에 미국 뉴욕에서 계시는 동안 공연하신 모습이 나왔더라구요. 그곳에서의 생활은 어떠셨는지요 “뉴욕 등 가장 첨단의 젊은 예술을 하는 곳 한복판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죠. 문화적 충격도 있었지만 사는 데 많이 부대껴서 그런지 확실히 못견디겠더라구요. 그곳에서 놀고는 먹었지만 그게 결국은 나를 많이 망가뜨리더라구요. 약 2년간 백남준 선생 아래에서 있기도 했고 짐 자무시라는 영화감독 아래에 있기도 했어요. 그런데 요즘 서정과 ‘떼마임’을 표방하며, 대본화 시키는 작업을 하는 바로 지금에서야 그때의 경험들이 나옵니다. 일은 막 정신없고 허우적거리며 살고, 문예진흥자금을 타지만 그래도 수입은 별로 없어도 지금에서야 자유스러워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 김성구 씨께서 해 오신 공연도 그러하듯이, 다른 문화장르인 문학, 영화, 음악, 미술 등이 문화 간 교류가 활발해 지고 있습니다. 조금 우문인 것 같지만 지금의 퓨전이나 크로스 오버 같은 문화현상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지요 “이제야 개인적으로는 조금씩 부딪치면 스킨십을 느껴요. 어떤 다른 장르를 보면 순간순간 머리칼이 쭈뼛하는 그런 기쁨이 오기도 하고요. 역시 그런 것들이 낯설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없었던 것들이 아니라 원래 있었지요. 있었던 것들이 다르게 패키지화 되어가는 거고요, 또 이런 것들을 형상화 하는 중에 코드가 조금씩 다른 버전으로 표출되는 것뿐이지요.
이제는 수용하는 시장이 많이 후해져서 예술이니 하는 이런 말들이 조금 불필요해졌고요. 물론 아직까지 그런 것들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들이 있음으로 해서 또 존재 이유가 있으니까 상당히 좋기도 하지만요.” ■ 다른 어떤 공연보다도 마임이 사람의 진실성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근접한 방법이라고 하셨는데요 “음악도 문학도 다 똑같지요. 그런데 마임이 갖는 어떤 특별한 호소력이 있는데, 직접적이니까 육화되어서 설명의 강렬함이 드는 것 같습니다. 그것만 삶의 진실이라는 게 어디 있어요? 이젠 마임만 가지고는 못살겠으니까 마임의 영역을 넓히고 다른 인터 장르들을 많이 흡수해서 오늘의 세계에 필요한 넓은 마임의 세상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궁극의 목적입니다. 미국에 있었을 때, 플로리다 같은 지역에는 곳곳에 마임의 이미지가 살아있고, 또 저글링이나 매직 같은 것들이 많이 있더라구요. 우리 속에서 우리 얘기 잃어버리지 말고 바른 삶의 태도를 갖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환경·시사 이런 문제들은 꿈으로 가지고 있어서, 난 어떤 정치적인 힘도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사회사업가도 아니지만 어쨌든 공인 의식이라는 것을 가지고 제일 천박하면서도 제일 사랑 받는 마임 하는 사람인가 보다는 인정을 받고 싶어요.” ■ 인기 없는 예술의 배우라는 이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임배우의 길을 후회하신 적은 없으신지요 “외국의 한 연극인 얘기지만 ‘배우의 길은 매춘부와 같다’고 해요. 그런데 매춘부와 다른 것이 뭐냐고 하면 바로 성인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이죠. 그 말은 그만큼 길이 많은 인생을 모방하고 모든 경험을 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무언가를 다 받아서 늘려서 베풀어 줌으로 해서 바로 성인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는 거죠. 그 터무니없는 희망에다 목을 걸고 가기 때문에 우리가 예술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고 배우라는 이름을 달 수 있는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도 않는 것에다 가격표를 붙일 수 있겠습니까. 이 길이 그렇게 무모한 함정이 있는 길이란 말이죠. 자꾸 그런 자괴감들이 많이 오고 이제 쉬운 것으로 가려고 하는 이유가 뭔가 그냥 삶이 막 싸구려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다소 좀 그들로 가기 위해서는 통속적이기도 하고, 갖지 않은 것들에 대해 어깨에 힘주고 있는 것들을 뽑아버리는 것으로 가지 않으면 후배들도 똑같이 배우고 그러면 여전히 소외 속에서 그저 스스로 자위만 하면서 ‘나만 예술한다’고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앞으로 젊은 친구들한테 마임의 길을 어떻게 제대로 가게 일러주나 그게 고민입니다.” ■ 가까운 시기에 공연계획이 있나요 “6월 27일에 LIG 아트홀에서 벌어지는 ‘특별한 수요일’이라는 공연을 하는데요. 전부 16개 팀의 젊은 예술인들이 영상퍼포먼스, 설치퍼포먼스, 인디밴드, 휴전댄스 그룹 같은 것들을 공연하는데 우리의 마임이 가서 공연을 합니다. 이번 공연은 스테츄 마임이라고 소위 조형 마임인데요. 일상의 모습이든 드라마틱한 장면이든 전혀 움직임이 없는 무동의 마임들을 석고상처럼 조형해서 피켓 등을 이용해서 메시지를 전하고 적당한 타이밍에 긴장을 풀어 위치를 옮기면서 직접 관객과 교감을 하면서 그들에게 어떤 삶의 모습의 하나를 보여 줄 생각입니다. 거기가 비즈니스 빌딩이니까 점심시간 한 시간씩 보여줌으로써 근로자들에게 어떤 위안을 주려고 합니다. 이미지 전달이죠, 뭐. 7월 14~15일에는 인천에서 120석 짜리 소극장에서 공연이 있습니다. 그 제목이 아까 말씀드린 ‘우수,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라는 공연입니다. 드라마를 구성하는데 소위 36가지 감정 표출 단어가 있는데, 우수라는 단어가 ‘근심 우(虞)’, ‘근심 수(愁)’자입니다. 되돌아보니까 어린 시절에 꿈이 있었고 시행착오 끝, 연방 사랑에 깨지고 그러면서도 동어반복의 부질없는 행위를 통해서 아프면 아픈 대로 그러면서도 아직 놓치고 싶지 않은 가보고 싶은 지난날이 있단 말이죠. 거기에서 표현 하는 것은 어떤 추억이라는 것일 수도 있고요.” ■ 앞으로 공연이든 김성구 씨 개인의 삶이든 절실한 무언가가 있으실 것 같아요 “얼마나 살지 모르겠지만 앞으로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햇수로 지금 35년인데, 40년 차로 들어가면 어쨌든 거짓말도 진짜가 될 거예요. 돌이켜보면 가책이 오니까 어느 순간에 한방만 걸려서 진하게 서로 교감하고 진한 어떤 눈물을 흘려 봤으면 해요. 이번 ‘우수…’의 목표도 뭐, 울게까지 만들려는 것은 아니고 센티멘탈이 아닌 센티멘트라는 것은 요즘 흔히 우리가 말하는 느림의 어떤 이미지가 아닌가 해요. 그림자 속에서는 사랑했던 장면, 젊은 시절 군대에 끌려갔던 장면이 이미지들로 교차되면서 보는 자로 하여금 여러 이미지 중에 하나만 걸려들면 괜찮다 생각이 들어요.” -김서연 객원기자 / 정리 유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