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넬슨 만델라는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무장투쟁 조직 「민족의 창(槍)」을 결성하면서 선언했다. 『모든 국가는 투쟁이냐, 복종이냐의 갈림길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할 때가 반드시 있다. 지금 그런 시간이 다가왔다. 우리는 복종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역량을 모아 미래와 자유를 위해 반격할 것이다』― 그 만델라가 백인정권에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악명 높은 로벤 섬에 수감된 것이 64년이었다. 만델라를 수감하면서 그가 남아프리카공화국 흑인들로부터 「잊혀진 존재」가 되기를 바랐던 백인들의 꿈은 무산되었다. 그는 오히려 흑인들의 「작은 예수」로 추앙받으며 인종차별 거부운동의 꺼지지 않는 불길로 살아남았다. 85년 보타 대통령이 폭력 포기를 조건으로 석방을 제안했을 때 그는 한마디로 거부했다. 『오직 자유인만이 협상할 수 있다. 나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협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뒤 90년 2월에 만델라는 복역 27년 만에 무조건 석방되어 「남아공의 태양」으로 떠올랐다. 그는 석방되고 나서야 난생 처음 팩시밀리라는 것을 보았다. 27년 동안 그는 외부세계와 완전히 격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흑인의 자유와 해방에 대한 그의 신념과 열정은 여전히 뜨거웠다. 달라진 것은 대결과 투쟁대신 협상과 화해를 택한 유연한 전략이었다. 만델라는 93년 데 클레르크 전 백인 대통령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94년 백인 지배를 청산한 최초의 다인종(多人種) 총선을 통해 남아공 대통령에 취임했었다. 그는 64년 종신형을 선고받은 유명한 리보니아 재판의 최후진술에서 『모든 사람들이 조화 속에서 평등한 기회를 누리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가 자기의 이상이라고 말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순간 『원한은 과거사』라며 대화합 정치노선을 채택했다. 이 넬슨 만델라가 우리나라를 다녀간 적도 있었다. 최루탄 파편에 머리를 맞은 이한열(李韓烈) 군이 사경 27일 만에 끝내 숨지고 만 6월이 또다시 돌아왔다. 87년 6월 9일 「6 · 10대회 출정식」 후 시위를 하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 파편이 큰골·작은골을 뚫고 들어가 연 600명의 의료진이 동원되었으나 끝내 사바(裟婆)세계를 떠나고 만 것이다. 『그대 가는가, 어딜 가는가/ 그대 등 뒤에 내리깔린 쇠사슬을 손에 들고/ 어딜 가는가/ 그대 끌려간 그 자리 위에/ 4천만 민중의 웃음을 드리우자/ 그대 왜 가는 가』― 자작시 『그대 가는 가』의 구절처럼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20)군은 이 시대 젊은이의 아픔을 안고 꽃다운 나이에 끝내 가버린 것이다. 『광주 사태 때(당시 중2)는 죽을까봐 겁이나 이불 속에서 지냈다』라고 말하던 이군은「 광주의 아픔」에 대해 평소에 몹시 괴로워했다고 한다. 같은 서클 이태직 군은 『친구의 슬픔엔 팔을 걷고 나서 위로해주었으나 술을 마시면 광주 이야기를 하며 우울해졌다』고 이 군을 회상했다. 『5월의 광주가 백양로에서 울렸다.… 어린 날 나는… 사회의 외곽지대에서, 무풍지대에서 스스로 망각한 채 살아왔던 지난날이 부끄럽다』 하여 오늘은 다시 살아나는 날. 내가 우리가 되는 날이어야 한다.(5월 18일자 이 군의 일기) 『최루탄 가스로 얼룩진 저 하늘 위로/ 오르고 싶구나』― 참변을 예견이나 한듯 한 시구를 남기고, 병상을 지키던 친구들의 애잔한 합창 속에 이 군은 기어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넬슨 만델라는 법률을 전공했다가 정계로 입문하였는데 이한열 군도 저렇듯 드높은 애국애족 하는 정신으로 정계에 입문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매년 돌아오는 6월. 『폭력정권 끝장내자』는 시위의 진두에서 희생된 이한열 군의 추모행사는 시들해지고 있다. 『사자(死者)는 말이 없다』여서 그런가, 만델라는 살아있어서 호사(豪奢)하는가. 호국영령들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이 나라 하늘에서, 이 나라 민주발전을 주시하고 있다. -박충식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