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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믹>은 현실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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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4호 ⁄ 2007.07.02 15:37:47

고백합니다. 가끔씩 출근하기 너무 싫을 때, 영화 마니아로서 꿈꾸는 발칙한 상상이 있습니다. 왜, 영화에서 연기자들이 갑자기 입속에서 피를 내뿜으며 쓰러지는 장면 있죠. 그런 장면을 위한 ‘혈액캡슐’ 있잖아요. 전 가끔씩 그걸 생각하거든요. 미리 입 안에 그걸 물고 있다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확 깨물고 ‘피’를 철철 흘리는 겁니다. 그 다음부턴 본인의 연기력이 중요하죠. 거의 숨넘어갈 정도로 미친 듯이 기침을 하다가 캡슐을 깨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어쨌든 이걸 계기로 ‘조퇴’하고, ‘휴가’를 내는 겁니다. 단, 혹시 하겠다는 분이 있다면 말리진 않겠습니다만, 뒷일은 책임질 수 없습니다. 대종상 배우상급의 연기력을 터득하시는 게 중요하죠. 참고로, 전 상상만 했지 실천한 적은 없습니다. 제가 은근히 새가슴이에요. 요즘은 만화 <기믹!>을 보면서, 한동안 접어뒀던 이 생각이 가끔씩 떠오르곤 합니다. <기믹!>은 SFX, 영화 속에서 활용되는 특수촬영기술을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벌써 5권까지 나왔네요. ■ 기믹, 간베라가 무엇일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기믹(Gimmik)’이 무엇인지부터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믹’이란 한마디로 ‘트릭’을 이야기합니다.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마술사들이 주로 이용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극적인 순간에 관객에게 확실한 충격을 주기 위한 ‘구성상의 트릭’을 ‘기믹’이라고 합니다. 영화에서는 결정적인 순간의 갈등 해소를 위해서도 이 ‘기믹’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기믹’의 대가는 역시 “영화를 가지고 놀았다”고 봐도 무방한 알프레드 히치콕이었구요. 사실 그의 영화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싸이코>지만, 그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작품은 역시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나 <현기증>, <이창> 등의 1950년대에 발표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시기에 나온 영화들은, 그가 영화에서 활용한 ‘기믹’을 결정적인 클라이맥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영화들이기도 합니다. 특히나 <현기증>같은 경우는 왜 역사적인 걸작이 됐는지 그 이유를 여실히 확인시켜주곤 합니다. <기믹!>의 주인공은 젊은 나이에 할리우드에서 맹활약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일본으로 귀국한 ‘나가세 코헤이.’ 그는 SFX의 대가라 할 만합니다. SFX는 영상매체에서 특수촬영, 필름합성, 편집기법을 통해 연출하는 특수시각효과를 말한다고 합니다. ‘코헤이’는 정교한 특수 분장 실력으로 할리우드에서 맹활약했다고 합니다. 강호의 중심에서 맹활약하던 젊은 천재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숨어살다가 다시 그 숨어든 세상에서 맹활약한다는 식의 약간은 상투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영화와 SFX에 대한 작가의 연구가 대단히 성실하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기믹!>에서 각 에피소드의 결정적인 순간에, 유난히 굵은 글씨로 말풍선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대사들이 있습니다. “기믹은 현실을 바꾼다!” “신의 긴베라에 맹세컨대!” “기믹이 현실을 바꾼다”는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화의 이야기가 이 말에 다 숨어들어 있거든요. <기믹!>에는 세상사의 온갖 사건들이 모두 투영한 것처럼, 강도 사건이나 유산 분쟁 사건 같은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는데요. 이 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인 소재가 ‘코헤이’가 선보이는 기믹은 특수 분장 기술입니다. 아, 여기서 ‘간베라’란 흙을 다듬는 조소용 주걱 ‘헤라’의 일본식 발음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뭔가 느껴지시는 것 없습니까? <기믹!>의 이야기 구성 작가는 요자부로 카나리, <소년 탐정 김전일>입니다. 김전일 소년이 사건의 결정적인 순간에 매번 하던 말이 있죠.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라고. <기믹!>에서는 “신의 간베라에 맹세컨대”가 주인공이 각오를 다질 때 하는 말입니다. ■ <기믹!>에서는 ‘김전일’의 향기가 작가가 같기 때문에 일어나는 흥미일 겁니다. <기믹!>에서는 역시 김전일 소년의 향기가 많이 느껴집니다. 가는 데마다 사건에 휘말린다는 점, 여자를 너무 밝힌다는 점, 평소에는 장난끼 넘치는 허술한 녀석 같지만 ‘일’에 있어서는 역시 프로라는 점 등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코헤이’ 소년의 ‘신의 간베라’에 맞먹는 ‘악마의 간베라’라는 숨은 악당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김전일’과의 공통점은 정점에 달합니다. 김전일 소년에게는 천재 범죄자 ‘지옥의 광대’ 요이치라는 무시무시한 적이 있었죠. 주인공의 표면적인 허술함과는 달리 탐미주의적인 악당 캐릭터 묘사, 요자부로 카나리의 취향인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악마가 프라다를 입을 때’, 더 작품이 돋보이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 겉으론 허술해 보일지 몰라도 주인공에게도 “이런 녀석을 상대하는 대단한 주인공”이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도 있을 거구요. <기믹!>은 사건을 끌어가는 구성의 힘과, 작가 스스로가 조사하고 즐겼던 영화사적인 지식이 매끄럽게 어우러지면서 괜찮은 작품이 된 듯합니다. 대체로 성선설을 내세웠던 <소년탐정 김전일>과는 다른, 욕망에 미친 악당들이 주로 나온다는 것도 재미가 꽤 쏠쏠합니다. 인간은 그놈의 그 욕심 때문에, 어느 순간에 파멸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예, 바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나는 특수 분장으로 얼굴을 만들어. 배우는 기분으로 표정을 만들고. 그리고 기믹이 현실을 바꾼다. 그 다음 미래는 스스로 바꾸는 거야.” ■ 탐욕을 이겨내는 ‘열정’의 힘? 하지만, 주인공이 궁지에 몰린 ‘의뢰인’에게 하는 조언의 요지는 여전히 ‘김전일스럽’습니다. 김전일 소년도 유독 미래를 강조했습니다. 절벽에서 떨어질 것 같은 궁지에 몰린 피의자에게 김전일 소년은 “이 동굴만 벗어나면 햇살이 보일 거다. 죄값을 치르고 희망찬 삶을 살려는 의지만 있으면 된다”는 식의 ‘조언’을 많이 했습니다. 다소 아쉬웠던 건, 그 어떤 악에 받친 피의자라도 이 ‘조언’에 무조건 넘어가 눈빛이 달라지면서 의지를 불태우는 경우가 많았다는 건데요. 사실 <소년탐정 김전일>은 그렇듯 다소 무모해 보이는 ‘희망론’이 좀 아쉬웠던 면이 있었습니다. 중고등학생들이 많이 보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내세운 ‘희망론’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기믹!>도 어느 정도는 그 ‘희망론’을 답습하는 듯 하기도 합니다. 가슴에 벅차오를 듯한 ‘희망’은 역시 그런 식의 ‘훈계’보다는 정밀하게 편집된 한편의 영화와도 같았던, <슬램덩크>에서 산왕광고와 혈전을 치렀을 때의 ‘마지막 5초’만한 게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기믹!>의 저 멘트는 의미 있는 한 마디입니다. 영화 장르의 요체를 저렇게 한 마디로 요약하기도 어렵거니와, 극중 ‘릭키 베이커드’로 나오는 할리우드의 특수 분장 전문가 ‘릭 베이커’, 작품에 실제인물로 등장시킨 <씬 시티>의 ‘베네치오 델 토로’를 보면, 앞서 이야기한 요자부로 카나리의 영화광 기질이 잘 드러나죠. 영화든, 만화든, 그 어떤 장르에서든 작가 스스로의 진심어린 열정이 확인되면, 독자는 그 자체에서 즐거워지는 겁니다. <기믹!>이 즐거운 이유입니다. 다소 무모해보이지만 결코 탓할 수 없는 요자부로 카나리의 ‘희망론’, 탐욕이 어우러진 악을 이겨내는 힘은 열정이 동반된 순수한 힘이라는 것은 식상할 수는 있어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거든요. 그는 <기믹!>에서 자신의 열정까지 듬뿍 담아놓음으로써, 그렇듯 <소년탐정 김전일>에서만큼의 약한 딴지도 걸기 어렵도록 만들어놨습니다. 저 역시, 열정의 힘이 세상을 빛낼 수 있다는 꿈을 꾸기 때문에 공감하는 것일 듯합니다. 어쩌면 ‘열정’ 자체가 ‘환상의 기믹’이 될 수도 있거든요. 세상은 역시 그런 희망이 있어야지 살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욱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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