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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서평] 님웨일즈의 <아리랑>을 넘어선 <김산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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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4호 ⁄ 2007.07.02 15:39:59

지리산 천왕봉 일출은 아무나 볼 수 없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삼대 째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다’고 어느 시인이 노래했겠는가. 지리산 노고단에서 바라보는 구름떼 역시 아무에게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비단 지리산뿐만이 아니다. 대관령 구름바다 역시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풍경이라 이름 붙인 모든 것들이 대개 그러하다. 백두산 천지의 맑게 갠 하늘과 소백산 천왕봉 아래 억새바다도 땀 흘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허용된다. ■ 우리 역사의 보통명사, 김산 ‘역사’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국정교과서의 고정된 인식의 틀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만 역사는 제 몸의 속살을 드러낸다. 물론 ‘뉴라이트’처럼 또 하나의 고정되고 편벽한 세계관을 ‘학문적 진보’라고 주장하는 집단도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역사는 ‘진리’가 아닌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와 문학은 동일한 색채를 지닌다. 문학 또한 진리를 외치는 것이 아닌, 진실을 노래하는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이원규의 새 책, <김산 평전>을 읽는다. 김산,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인 님 웨일즈의 책 <아리랑>을 통해 비로소 우리 곁에 돌아와 누운 사람이다. 본명인 ‘장지락’보다, 금강산에서 따왔다는 ‘김산(金山)’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그는 남과 북 모두로부터 제대로 된 대접을 받아보지 못한 이들을 상징하는 우리 역사의 ‘보통명사’다. 세상은 그를 일러 ‘비운의 조선혁명가’라고들 한다. 그의 일생의 단면만을 놓고 본다면, ‘비운’이라는 표현은 썩 어울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김산의 일생이 그 누구에 의해 강제된 것이 아닌, 스스로가 선택한 ‘고난의 행군’임을 생각한다면, 그의 삶은 결코 ‘비운’했던 것이 아니다. 당대를 견디고 살아간 많은 조선혁명가들은 대부분 ‘망명자’였다. 특히 중국 관내에서 활동하던 조선혁명가들은 이방인인 동시에, 조선혁명의 전초 단계로 여겨졌던 중국혁명에 복무하는 ‘경계에 선 사람들’이었다. -유성호 기자

김산 역시 그러했다. 그는 현재의 우리의 기억 속에 ‘용천역 폭발 사고’로 남은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지만, 조선반도에서의 그의 삶은 17년에 불과했다. 1938년 ‘일제특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되기까지 김산은 낯선 땅 중국에서 17년이라는 조선반도에서의 그것과 같은 세월을 살았다. 어찌 보면 우연일 수도 있지만, 그의 일생에서 조선의 운명과 중국의 운명이 똑같은 비중으로 남았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 그는 혈연적으로는 조선인이되, 정치적으로는 중국공산당 소속이었다. 또 중국 여인과 결혼해 아들을 낳았지만, 그 아들은 ‘백의민족’으로 키우기를 희망했다. 김산은 중국혁명에 복무했지만, 그것은 조선혁명의 그날을 위한 방편이었다. 수구보수 인사들은 말한다. “우리가 일제에 협력했던 것은 민족의 장구한 이익을 위해서였다”고. 그런데 왜 그들은 ‘역사 바로 세우기’에 그토록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일까. 차라리 미당 서정주처럼 “나는 그때 일본이 200년은 갈 줄 알았다”고 고백하는 게 더 아름다울 지경이다. ■ 지푸라기로 다가와 어느덧 섬이 된 그대 김산을 비롯한 조선혁명가들의 일생은 그 동안 제대로 알려진 게 변변치 못하다. 고작해야 님 웨일즈의 <아리랑>과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에서의 언급이 전부일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원규의 책 <김산 평전>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이원규는 지난 2005년에는 의열단을 조직했던 약산 김원봉의 삶을 담은 책을 내기도 했다. 작가는 말한다. “김산의 등 뒤에 선,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어간 수많은 ‘김산들’이 어른거린다”고. 우리 현대사에 드리워진 ‘레드콤플렉스’의 망령은 아직 유효한 모양이다.

예를 들어, 김익상·오성륜·이종암·김지섭·나석주 등과 김성숙·오성륜·장건상·박건웅·이영·양림·박진·장일진·한위건·서휘·정률성·김찬 등의 의열단원들은 그들이 분명 ‘빨갱이’가 아닌 ‘아나키스트’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에서 다분히 ‘의도적으로’ 지워져 있다. 왜일까. 과거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은 ‘아나키스트’를 ‘공산주의자’보다 훨씬 위험한 존재로 봤다. 우리 현대사를 ‘지도’하고 ‘지배’해왔던 전직 친일파와 그 후손들 역시 그러할 것이다. 김산은 분명 자신을 일러 ‘공산주의자’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정치적 신념은 무슨 ‘주의’에 방점을 찍고 있기보다는 ‘민족’이라는 것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원규는 이 점에 주목하고 있다. ■ 반동과 저항, 그리고 하기야 요즘도 민족화해 문제를 논하려 들면, 가장 먼저 날아오는 대답 중 하나가 ‘친북좌파 빨갱이’라는 말이다. 수구보수 진영의 언어적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이 말은 그들 시야의 협소함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발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따금 되묻는다. ‘우리의 역사에 희망이 있는가’하고. 여러 가지 논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단언하건데 이원규 같은 이들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김산과 같은 ‘우리 역사의 빛나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별’들이 있는 한, 역사와 그 역사를 증거하는 작업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뉴라이트’ 진영에 속한 교수 집단의 역사교과서 수정 움직임이 마침내 한나라당으로 하여금 “역사 기술의 좌편향도 문제지만 우편향 역시 문제”라는 일종의 ‘항복선언’을 하게끔 만들었던 씁쓸한 기억도 우리는 갖고 있다. 역사에 대한 반동이 거세질수록 그것에 저항하는 진실의 힘 역시 강해지는 법이다. 길가에 호젓이 피어 있는 들꽃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그 자리에 피어나지 않듯, 우리 현대사에서 가려진 이들의 이름 또한 반드시 우리 곁으로 돌아와야 한다. 바람이 여의도를 몰아치고 있다. 그러나 그 바람 사이로 우리 현대사를 바로잡으려는 이들의 외침이 들리고 있다. 어제가 아닌 바로 지금의 시점에서 말이다. 그들의 팍팍한 마음에 시 한 편 읊어주고 싶다. <김원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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