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 이상수 노동부 장관은 최근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주최한 간담회에서, 비정규직법 시행에 앞서 일부 기업들이 비정규직을 외주화하거나 해고하는 일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 장관이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라고 말한 사건은 비정규직법 시행 꼭 하루 전인 6월 30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점에서 거친 파열음을 내며 시작됐다. ■‘비정규직을 보호’한다던 비정규직법 시행 첫날 풍경 정부가 비정규직을 보호할 것이라던 비정규직법이 시행 된 첫날.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점에서 벌어진 사건은 현재의 비정규직법 입법에 찬성했던 정부와 정치권을 낯을 뜨겁게 만들었다. 이랜드그룹이 소유한 유통업체 홈에버(옛 까르푸), 뉴코아 2001아울렛 등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600여 명은 30일 서울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점을 점거했다. 파업을 벌인 노동자들은 이날 오전 11시부터 홈에버 월드컵점의 영업을 중단시켰다. 킴스클럽 서울 강남점도 뉴코아노조에 의해 마찬가지로 문을 닫았다. 이랜드노조와 뉴코아노조는 이미 공동투쟁본부라는 이름으로 지난 6월 10일 공동 파업을 벌이고 있었다. 대부분 30대를 넘는 ‘아줌마’들이 가정을 뒤로 하고 일주일이 다 되도록 파업을 벌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정규직 대량해고 뒤엔 ‘비정규직법이 있었다’ 이랜드그룹 홈에버는 올해 ‘비용절감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보안·주차·카트·미화·시설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를 감원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본사 총무실에서 주도한 이 프로젝트는 ‘비용없이 효과를 낼 수 있는 실천안’으로 6개 과제를 정했는데, 이 가운데 대부분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해고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런 비용절감 프로젝트의 근본적인 추진 배경엔 ‘비정규직법’이 있다. 비정규직법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주장의 핵심엔 같은 일을 하는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임금 등 근로조건에서 차별할 수 없는 ‘차별시정제도’가 있다. 즉, 현재에도 홈에버 계산원들 가운데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모두 있기 때문에 같은 일을 하는 계산 업무 비정규직은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2년 이상 계약직으로 일한 비정규직도 정규직으로 전환해야하는 기간제노동자의 보호 역시 비정규직법의 중요한 내용이다. 이런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기업 입장에서는 단기적인 부담이다. 실효성엔 의문이지만 비정규직 차별을 하는 사업자는 수 천만원의 과태료도 내야한다. 그러나 사회구성원 대부분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꼽는 사회양극화의 주범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가와 차별이라는 점에서, 무분별한 비정규직 사용을 줄이는 일은 긴 호흡으로 보면 이는 미래를 위한 투자이다. 또한, 박성수 이랜드그룹 회장은 최근 주식배당금으로 82억원의 이익을 얻었고 현재 보유하고 있는 주식가치만 1000억원에 달한다. 또한 박 회장은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십일조로 110억원에서 130억원 가량을 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른바 기독교 종단에서 ‘믿음의 기업’으로 통하는 이랜드그룹. 기독교 방송 CBS의 데스크칼럼은 이랜드의 대량 계약해지와 외주화를 또 다른 측면에서 비판하고 있다. “믿음을 자랑으로 삼았던 그들이기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하면서 눈물까지 내보이고 있다. 이들은 이랜드가 믿음의 기업이라면 국민들에게 모범이 되고 올바른 삶의 지표가 되지는 못할망정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도 손가락질을 받는 사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기독교 전체에 주는 부정적 영향이 얼마나 큰 지를 새겨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또한 지금이라도 이랜드가 하루 하루 먹고 살기에 급급한 가난한 근로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길 바라면서 매일 기도하고 있는 말도 들린다” ■ ‘중규직’은 말뿐인 정규직 홈에버 비정규직노동자들이 점거 농성을 벌이자 회사 측은 파업 6일째 기자회견을 열고, “비정규직 대량해고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비정규직법이 시행된) 1일자로 비정규직 521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고 주장했다. 521명의 정규직 전환자는 최근 새롭게 생긴 ‘중규직’이라고 할 수 있는 직무급제에 따른 정규직이다. 차별시정제도라는 법망을 피해가려는 직무급제에 따른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도 정규직도 아닌 애매한 중간에 놓이고 만다. 즉 차별을 판단하기 위해 필요한 기준이 없는 ‘말뿐인 정규직’인 것이다. 이랜드 일반노동조합(위원장 김경옥)은 “직무급제로 분리해놓고 정규직과 업무가 다르다고 우기면서 사측은 차별시정제도를 회피할 수 있다”며 “직무급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완전히 분리해서 법적 소송조차 못하게 하려는 파렴치한 수작”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사측의 사실 왜곡은 지방노동위원회의 중재로 교섭을 벌이기로 한 노사 간의 신뢰를 깨뜨리고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키고 말았다. 민주노총도 이례적으로 총연맹 차원에서 이랜드그룹 홈에버와 뉴코아 등 전국 매장에서 집중 집회를 열고, 이랜드 불매운동까지 벌이겠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사측은 7일까지 ‘점거 농성을 풀라. 그러면 선처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이랜드 홈에버 사태의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는 힘들어 보인다. ■ 이랜드노조, “무조건적인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것 아니다” 최근 전경련회관에 열린 간담회에서 한 기업인은 “정규직을 사용할 수 있는 여력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비정규직을 쓰고 있는데 이 같은 현실을 감안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정규직화를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수 천억원의 자산과 수 백억원의 십일조를 내는 이랜드그룹에 ‘여력이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노동조합도 ‘무조건적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이랜드 일반노조는 기본적으로 모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고 있지만, “사측이 부담이 된다면 우선 2년 이상 계약직을 정규직화하고 3개월 이상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고용보장 후 2년이 지나 비정규직화할 것”을 제안했다. 경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시장만능주의를 그대로 도입해보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는 경영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오로지 저임금을 통해서 비용없는 효과만을 기대하는 기업은 시장에서 ‘0순위 퇴출대상’이 아닐까. <오재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