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임진록 봤어?” “역시 대단하던데…” 대학생들이 나누는 대화였다. 큰 대(大) 대학생(大學生)이라 역사소설 <임진록(任辰錄)>을 두고 하는 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뒷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역시 황제는 황제야.” “난 그래도 폭풍이 좋아.” 황제에 ‘폭풍’이라. 알고 보니 학생들이 말하는 임진록은 ‘임진록’이 아니라 ‘임진록(林榛錄)’으로 프로게이머인 임요환과 홍진호의 대결을 두고 붙인 이름이었다. 이름을 붙인 이가 누군지 그 재치가 돋보인다. 이를 계기로 젊은이들과 대화를 하려면 그들의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에 프로게임에 대해 알아보게 되었다. 그러다 게임을 전문적으로 중계해 주는 유선채널까지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가족의 눈치를 봐가며 유선방송에도 가입(加入)했다. 프로게임은 대단한 인기(人氣)를 끌고 있었다. 기성세대(旣成世代)들이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젊은이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로 모여 있었고, 게임결과는 그들의 주요 뉴스이자 화제거리가 되었다. 가장 인기 있는 프로게이머 중 한 명인 임요환의 애칭(愛稱)은 황제. 황제는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한 후 자신이 신화적 존재인 삼황오제(三皇五帝)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여 처음 쓴 단어인데, 전략가 임요환이 게임계에서는 그처럼 전설적인 존재라고 한다. 또 다른 인기 프로게이머 홍진호의 애칭은 폭풍. 경기 스타일이 폭풍처럼 상대를 몰아붙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아무렇게나 막 지어낸 애칭이 아니라 나름대로 심사숙고(深思熟考)한 데에서 나온 결정체들이었다. 기성세대 입장에서 보면 매일 컴퓨터 게임이나 해서 ‘나중에 뭐가 되려는지’ 하는 걱정이 앞설 것이다. 하지만 인기 프로게이머의 연봉이 억대에 이르고 사람들에게 많은 인기까지 얻고 있어 하나의 당당한 전문직종(專門職種)으로 봐야 할 듯싶다. 그들의 스타성도 연예인(演藝人) 못지않아 TV 오락프로에 출연(出演)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류를 못마땅해 할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時代)가 바뀌어 인기(人氣)직업도 바뀐 것일 뿐이다. 조선시대의 의사는 중인(中人)이었지만 지금은 선망의 대상(對象)이고, ‘딴따라’라 불리던 연예인들이 지금은 인기스타 아닌가. 젊은이들이 게임을 좋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바둑이나 축구, 야구 등을 좋아하는 기성세대나 컴퓨터 게임을 좋아하는 젊은이나 근본적(根本的)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다만 좋아하는 대상이 다를 뿐이다. 인기를 끌려면 실력은 물론 자신만의 독특(獨特)한 개성(個性)이 필요하다. 프로게이머도 마찬가지다. 황제(皇帝)라 불리는 전략가 임요환과 어딘가 모르게 슬퍼 보이는 폭풍(暴風) 홍진호 이외에도 많은 프로게이머들이 애칭을 갖고 있다. 상대(相對)를 휘몰아치는 투신(鬪神) 박성준, 가을의 전설(傳說) 영웅(英雄) 박정석, 상상을 초월하는 몽상가(夢想家) 강민, 미소에 비수를 머금은 천재(天才) 이윤열, 물량의 괴물(怪物) 최연성,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사신(死神) 오영종 등이 그러하다. 모두들 나름대로의 특징이 분명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애칭에 쓰이는 한자(漢字)들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비록 사이버 세계가 가상의 공간(空間)이지만, 그 중심(中心)은 역시 사람이라는 사실을 프로게이머의 인기가 대변해 준다. 삭막한 사이버 세계에서도 우리는 사람의 숨소리를 느꼈을 때 안도하는 것인가. 타인(他人)의 관심을 끌기 위해, 군중 속의 고독을 벗어나기 위해 인터넷을 뒤져 옛 친구를 찾고, 미니 홈페이지를 열고, 또 댓글을 보고 씩씩거리기도 하는 우리는 역시 인간(人間)이다. 인간끼리 살 비비며 살아가는 존재(存在)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말이다. 비록 ‘사이버 세계(世界)’라 해도 언제나 그 중심은 우리 인간에게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송원찬 한양대대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