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들은 바로는 북에서 ‘주체의 축구이론’이라는 걸 정립(?)한 적이 있다고 한다. 내용을 들어 본 적은 없지만, 아무래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8강을 달성한 위대한 경험에 기인하고, 60년대까지는 남한을 압도했던 경제력에 바탕해, 예체능을 중시하는 사회주의적 사회사상의 일환으로 그러한 관제 이론까지 만들어냈던 게 아닌가 싶다. 도대체 주체의 축구이론이란 무엇일까? 주체사상이 수령-당-인민의 트리니티 사상이다 보니, 축구에서도 감독-선수-공의 트리니티 정도 될까? 그게 아니라면, 위대한 지도자(감독)-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선수-사회주의의 우월성에 대한 선수들의 당성과 집단주의적 패스-슈팅의 전략전술적 우수성? 아무래도 주체의 축구이론은 알 수가 없으니, 한국축구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주체의 축구이론에 비길 만한 남조선식 축구이론을 한 번 곱씹어 보고자 한다. 식민지에서 그 연속성이 유지된 채 굴러온 남한의 스포츠는 그 특징이, 예술계 및 학계 일반과 마찬가지로 ‘사대주의자로 살아남은 선생 - 그 아래 노예적 도제로 그 선생의 노예성 재생산’이라는 관계가 재연되는 부문의 하나다. 거기에 차범근류의 ‘종교적 일탈’까지 더해져서, 진정한 해방은 없이 정체된 삶의 한 분야일 뿐이다. 2002년 월드컵과 히딩크의 성공신화를 돌아볼 때, 오늘 한국축구는 그 역사적 전환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점을 확인한다. 히딩크의 부하였던 베어벡이 오늘 한국 감독으로 있지만, 히딩크의 카리스마만은 넘겨받지 못했다. 왜 히딩크 지휘하의 한국팀이 위대한 성공을 거두었는지는 많이 논해졌으나, 히딩크 리더십을 배제하는 순간, 히딩크 현상은 현장에서는 사라진 것이다. 우리는 94년 월드컵의 분전과 98년 월드컵의 허망함도 기억한다. 한국선수들은 뭐 빠지게 뛴다는 점만은 늘 확인되어 오지 않았는가? 문제는 도대체 무엇인가? 히딩크는 무엇을 새롭게 해서 성공했는가? 축구기술적인 측면에서, 기량보다는 체력에 주목한 히딩크의 선택을 많이 강조한다. 그러나, 히딩크가 체력에 주목한 것은 히딩크 식 한국축구의 1/3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히딩크의 선택 중에서 2002 한국축구를 지배한 것은 ‘선후배 질서 타파’가 가장 크다. 이천수는 경기 중에 홍명보를 “명보~!”라고 불러야 했다고 말했다. 처음엔 외국인 감독이 원하니까 그렇게 해줬겠지. 그러나, 그렇게 “명보~!”를 부르는 순간 이천수는 경기장에서 홍명보와 동등한 선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이천수가 월드컵 직전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과감하게 골을 넣었었다. 한국축구의 기술과 체력? 이거 아무것도 아니다. 아랍권에는 존댓말이 없다는 거다. 7월 11일 사우디와 아시안컵 경기를 치르는 장면을 보니, 사우디 선수들의 자유분방한 개인기와 강인한 체력이 느껴진다. 한국선수들은? 여전히 전체주의적 틀 안에서 위계질서의 제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인기나 체력을 발휘하기도 이전에 뭔가에 갇혀있는 참으로 낯익은 그들의 모습을 진정 못 봤다고 우길 건가? 한국축구는 히딩크 이전으로 확실히 돌아가 있다. 한국의 예체능계 전반에는 사제 간의 끈끈한 결탁과 선후배간의 넘지 못할 경계가 여전히 존재한다. 축구에서 우리가 그토록 얘기하는 개인기와 골 결정력이 왜 안생기는지 정말 모르는가? 개인기는 후배가 설치면 대가리 박게 하는 선후배질서 때문에 안생기는 것이고, 골 결정력은 뜨면 밟아버리는 경기외적인 권력관계 때문에 안생기는 것이다. ■보라, 히딩크가 무슨 짓을 했었는지! 히딩크는 모든 경기외적인 압력과 청탁을 거부하고 자신의 눈에 보이는 실력만으로 선수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월드컵 이전 최고의 기대주였던 이동국을 주전에서 과감히 빼버린 것은 일종의 시위였을 것이다. 그 결과 이동국은 2002년 그 뜨겁던 여름을 밤마다 술로 지새다가 ‘군대스리가’를 거쳐 새로운 선수로 다시 태어나야만 했지만, 이동국에게 있었던 시련의 의미를 오늘 한국축구가 못살리는 것은 또 하나의 거대한 실패가 될 것이다. 히딩크는 실력만으로 선수들을 선발했고, 김병지의 쇼맨십보다는 2인자 이운재의 성실성과 욕망을 관리했다. 참 약은 선택이었다. 그리고, 외국인이라는 핑계로 한국인들의 선후배 질서를 눈앞에서 배제했다. 홍명보는 그 와중에 히딩크에게 다 맞춰주면서도 은근히 그 질서를 관리했던 맏형이었다. 홍명보가 베어벡과 함께 팀을 관리하는 오늘, 과연 홍명보는 히딩크의 약은 선택의 의미를 진정 이해했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오늘 한국축구에 이론이 필요하다면, 일제시대를 거쳐 박정희 시대까지 뿌리를 내려 버린 선후배질서 및 폭력적 지도방식을 온전히 벗어나는 ‘자유주의 축구이론’이다. 조금 오버하자면 ‘축구에서의 전근대성 타파’라는 요구이고, ‘근대적 히딩크 이념’을 넘어서는 ‘사커 리버럴리즘’을 추구해야 한다. 개인기로 맘껏 재롱부리는 선수들이 팀 안에서 왕따 당하지 않아야 하고, 선배들이 잘 나가는 후배들을 군기잡지 말아야 하며, 결정적인 순간에 주변에 선배가 없나, 애초 (권력에 의해) 선정 받은 스트라이커가 없나 눈치 보지 않고 과감히 골문만 보고 질러대는 선수들이 나와야 한다. 아무리 포지션이니 훈련양이니 개인전술이니 세트포지션 훈련이니 해봐야 소용이 없다. 한국축구에 필요한 것은 ‘자유주의’다. <이병철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