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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화 주체세력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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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6호 ⁄ 2007.07.16 11:58:35

칼국수가 개혁의 상징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김영삼 정권의 문민정부는 청와대에서 칼국수를 먹으며 개혁의 그림을 그렸다. 그때 개혁이 성공했더라면, 아마 지금도 개혁의 상징은 칼국수였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먹는 칼국수의 맛은 옛 맛이 아니다. 그러나 개혁은 도도한 강물이 되어 흘렀다. 수평적 정권교체와 국난 극복의 과제를 떠안은 김대중 정권도, 국민이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노무현 정권도 개혁을 외쳤다. 문민시대부터 외쳐 온 ‘개혁’이라는 시대적 요청은 화두처럼 아직도 한국사회를 감싸고 있다. 개혁은 역사가 평가한다. 역사는 과연 이 시대의 개혁을 어떻게 평가할까? 개혁의 평가는 역사의 몫이지만, 개혁의 성격과 역사적 교훈, 성공인지 실패인지는 우리들의 몫이다. 아마 다음 정권도 슬로건과 지향점의 차이만 있을 뿐, 개혁을 부르짖을 것이다. 우파는 ‘선진화’로, 좌파는 사회민주주의로 말이다. 오늘은 우리 역사 속의 개혁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역사적 교훈을 밝혀내야 실패의 전철을 밟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 속에서 교훈을 얻기 위함이다. 우리 한국사에서 중요한 개혁들을 살펴보면 거의 실패로 끝났음을 알 수 있다. 공민왕과 신돈의 개혁, 조광조의 개혁, 정조의 개혁, 대원군의 개혁이 그러했다. 시대적 상황도 다르고 개혁의 주체도 달랐지만 이들 개혁의 실패에는 공통분모가 숨어 있었다. 그것은 전(前)근대적 봉건사회라는 시대적 한계를 뛰어 넘을 수가 없었고, 새로운 사회세력의 뒷받침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들의 개혁은 사회세력 간의 투쟁이 아니라 엘리트 간의 권력투쟁에 불과했다. 우리 역사 속에 ‘개혁’하면 우리는 가장 먼저 조광조를 떠올린다. 그것도 ‘실패한 개혁’의 대명사로 말이다. 조광조의 개혁은 소수파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실패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조광조가 살았던 조선은 알다시피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였다. 이런 중앙집권적 국가에서 대안세력들을 견제하고 활용하는 정책은 관료제로 편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앙집권적 관료제로 편입된 대안세력들은 수구세력과 경쟁하면서 서서히 기득권층으로 탈바꿈해갔다. 이런 현실에서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며 등장한 소수의 개혁세력은 새로운 사회세력의 뒷받침이 없기 때문에 급진적인 정책을 내세우게 된다. 더구나 대화와 타협의 정치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개혁의 실패를 자초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조광조의 개혁은 어떤 시대적 요청에 따른 것이었나? 조광조의 개혁이 요청되던 16세기 초반은 조선 전기의 통치시스템이던 <경국대전(經國大典)>체계가 점차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던 때였다. 또한 이 시기는 국가주도의 경제에서 민간주도의 경제로 변화하던 때이기도 하다. 그런데 건강한 민간주도의 경제시스템이 정착하기도 전에 문제가 발생했다. 훈척세력이라 불리는 기득권 지배세력이 사회경제적 변동 속에서 생겨난 사회적 부(富)를 국가 전체에 바람직한 방향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정치권력을 이용해 사회적 부를 개인이 독점하였다. 이런 시기에 바로 조광조로 대표되는 사림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주자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한 재야세력이었다. 이후 주자성리학의 세계관은 조선사회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되었고, 명분과 실천을 중시하는 경향이 조선 성리학의 주요한 흐름으로 자리잡게 된다. 조광조의 현실인식은 성리학에서 이상사회로 여기는 중국 고대 요순(堯舜)시대의 정치만이 조선의 사회적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사회·경제적 개혁보다는 정치·의식개혁을 개혁의 중심과제로 설정하고 밀어붙였다. 조광조와 사림세력은 처음에는 낭관권, 문묘종사, 향촌사회의 개혁 등 개혁정책을 실천하여 조선시대 통치제도와 이념의 기틀을 잡아갔다. 그 중 가장 급진적인 개혁은 당시의 기득권층을 뿌리째 뽑아내려 한 위훈삭제의 단행이었다. 위훈삭제는 중종반정 때 책봉된 정국공신들 가운데 상당수가 거짓 공훈이니, 이들을 골라내어 공신명단에서 삭제할 것을 요구한 혁명적인 개혁조치였다. 이는 곧 훈척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키겠다는 급진적인 개혁안이었다. 공신에서 삭제되면 그 대가로 받았던 토지와 노비까지 국가에 반납해야 한다. 당시 기득권을 가졌던 훈척세력이 이를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을까? 당연히 거세게 반발했다. 117명의 공신가운데 3/4에 해당하는 76명이 위훈삭제를 당했으니 훈척세력의 분노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결과, 안타깝게도 조광조와 사림세력은 위훈삭제 조치가 결정되고 3일만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중앙정치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조광조의 개혁은 시대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세력의 뒷받침이 없이 중종에게만 의지하여 급진적인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였고, 그 과정에서 많은 적들을 만들고 말았다. 대화와 타협, 설득하는 권력이 아닌 ‘밀어붙이기’식 권력의 실패는 예고된 것이었다. 그러면 조광조와 사림세력은 개혁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과연 몰랐을까? 결코 그들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 즉 큰 화를 입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개혁을 거칠게 밀고 나갔을까? 그들은 주자성리학 패러다임에 근거한 실천이 조선사회의 지배적 실천이념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요컨대, 조광조 개혁의 실패 원인은 ▲뒷받침할 만한 사회세력이 없었고 ▲개혁세력이 중종이라는 군주에게 많이 의존했고 ▲비전은 있었으나 비전을 담을만한 철학이 다듬어지지 못했고 ▲뒷받침할 만한 사회세력이 없다보니 개혁 조급증에 빠져 급진적인 정책만 일관하는 등 정치력의 미숙함을 드러냈다. 이런 한계 때문에 조광조의 개혁도 엘리트 사이의 권력투쟁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시대의 개혁은 어떠한가? 개혁주체는 있는지, 개혁의 사상적 기반은 있는지, 개혁세력을 뒷받침할 새로운 사회세력은 있는지, 개혁의 비전은 있는지 등. 명확하게 대답할 만하게 눈에 확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지금 말하는 개혁은 하나의 흐름일 뿐 구체적인 그 무엇은 아닌 것 같아 보인다. 다행히도 지금 우리 사회는 ‘대한민국의 선진화’에 대한 상당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 같다. 대선을 앞두고 여·야의 주자들이 ‘선진화’라는 비전 자체에 대해서는 거부하지 않고 있다. ‘선진화’ 용어의 문제와 선진화 방법의 차이를 두고 논란은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선진화의 비전과 방법만 있다고 선진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가장 중요한 것은 선진화를 추동할 주도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해방 후 건국의 시기에는 건국의 주체세력이 있었다.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의 시기에도 이를 주도할 주체세력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업그레이드 시켜야 할 선진화 세력은 아직 실체가 분명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우리 정치권은 컨텐츠는 없이 정치적 수사(修辭)로 선진화를 부르짖는 ‘입’들만 있을 뿐이다. 이념과 비전이 아니라 후보에 대한 개인적 선호 내지 이익에 따라 ‘무리지어’ 있을 뿐, 선진화 추진세력으로 ‘조직화’되어 있지는 않다. 한나라당의 소위 ‘Big 2’ 진영의 싸움도 범여권의 통합 논의도 대한민국의 비전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다. 오로지 권력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정당은 권력을 얻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국가와 국민을 부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지와 실천의 뒷받침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공허한 메아리만 들을 뿐, 실천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대한민국에 우리는 살고 있다. 별다른 능력이 없는 민초이지만 세금을 꼬박꼬박 내는 필자로서는 앞날이 너무나 답답하고 막막할 뿐이다. 앞으로 남은 인생 누굴 믿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모든 게 내 탓이러니 하기엔 너무…. <글 우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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