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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몬로의 비극

'섹시 컨셉트'는 아무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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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7호 ⁄ 2007.07.23 11:28:50

“나는 여자로서는 실패했다. 남자들은 내게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들이 나를 가지고 만든, 또 내가 나를 가지고 만든, 섹스 심벌로서의 이미지 때문에, 남자들은 너무 많이 기대하고, 나는 그 기대에 맞춰 살 수가 없다.” 구소련의 모 신문은 “미국 문화를 생각할 때, 뭐니 뭐니 해도 풍선껌과 마릴린 몬로를 빼놓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하네요. ‘풍선껌’은 자본주의 사회의 단점을 대변합니다. 단물이 빠지면 버리는 거죠. 마릴린 몬로도 그랬습니다. 그 역시 ‘단물’이 빠지는 순간,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물론, 세상은 마릴린 몬로에게 제대로 된 빛을 만들어준 적도 없었습니다. 그에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집중시켰고 최고의 스타로 만들었지만, 어디까지나 이용하고 조롱할 뿐, 그가 원하는 행복을 선사한 적은 없었던 겁니다. 인간은, 원하는 타인을 만나 서로를 사랑하고 지켜주는 것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마릴린 몬로가 추구했던 행복도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여기, 그의 생생한 한 마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사람이 아니라 무슨 거울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봐요. 나를 보는 게 아니라 자기들의 음란한 생각을 보는 거죠. 나 보고 음란하다고 몰아붙이면서 결백한 척하지만, 그 사람들은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알려고 하진 않아요. 그 대신, 나라는 사람을 마음대로 지어냅니다. 굳이 시비를 가릴 생각은 없어요. 그들은 내가 아닌 ‘그 누군가’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지금껏 살면서 내가 바란 건 나와 사람들이 서로 친절하게 대하는 거예요. 그래야 공평한 거래죠. 난 여자예요. 한 남자에게 사랑받으면서 살고 싶어요.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과 똑같이. 난 정말 그렇게 살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스타가 겪어야 하는 숙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스타를 보면서 그 당사자를 보는 게 아니라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가상의 이미지를 봅니다. 그 가상의 이미지를 충실히 재현해 끊임없이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스타의 할 일입니다. 특히 마릴린 몬로, 그녀는 다름 아닌 ‘섹스 심벌’이었습니다. ■ ‘남자들’과 마릴린 몬로 딱하죠. 마릴린 몬로를 되새겨 보면,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보는 듯합니다. 김기덕 영화의 진의는, ‘여성의 비하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여성을 그렇게 전락시키고 나 몰라라 하는 남성의 이중심리를 들춰내는 것에 있다고 보거든요. <파란 대문>, <해안선>, <사마리아> 등을 기억해 보시죠. 하나같이 비겁합니다. 아닌 척하면서 훔쳐보고 뒤에서 즐겼던 위선자들입니다. 남성 성욕의 핵심이죠. 그러면서도 외면까지 합니다. 그나마 책임을 진 남자가 있다면 <나쁜 남자>의 ‘한기’ 정도가 있다고 해야 할까요? 하지만 그 역시 교묘하고 비겁했습니다. 스크린의 흑막에서, 남성들은 마릴린 몬로에게서 ‘그 누군가’를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그 누군가’는 성욕을 채워줄 대상입니다. 어차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것이 세상의 법칙. 나이 60의 영화제작자와 관계를 갖기 시작했고, 10살 연상의 남배우 프레드 카거를 만나 열렬히 사랑했지만, 그 역시 몬로의 몸만을 원합니다. 그의 삶에서는 끊임없이 남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정숙한 아내를 원했지만 이미 그러기엔 너무 스타가 된 그를 만나버렸던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 그를 농락했던 케네디 형제(몬로의 죽음을 교사했다는 설도 있다), 무명 시절에 찍은 누드 사진들을 구해 협박했던 남성들. 말년에는 자신을 집까지 태워준 택시 운전사와도 관계를 가졌을 정도로 자포자기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는 그렇듯 만인의 연인, 아니 만인의 ‘파트너’였던 셈입니다. 마릴린 몬로는, 운명의 남자를 만나 ‘노마진(마릴린 몬로의 본명)’을 사랑해주길 원했지만, 그들은 ‘섹스 심벌’ 마릴린 몬로를 탐했을 뿐이었던 거예요. ■ ‘영화배우’ 마릴린 몬로 마릴린 몬로가 배우로서의 진가를 드러낼 수 있었다면, 그의 삶도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연기력은 치명적이었습니다. <뜨거운 것이 좋아>에 출연했을 때는 “버번 위스키 어딨죠?”라는 한 마디를 제대로 못해 59번의 NG를 냈다는 겁니다. <지옥에서 텍사스까지>에 출연했을 때는 더 가관이었죠. 발성이 제대로 안 돼 85번의 NG를 냈습니다. 마릴린 몬로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백치미’도 ‘연출’이 아닌 ‘현실’이었기에 슬픈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수없이 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가졌던 어머니 밑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던 겁니다. 사람들은 늘 이중적이거든요. 스크린에서의 ‘섹스 심벌’에게는 찬사를 보내지만, 현실의 ‘마릴린 몬로’에게는 늘 ‘뒷담화’가 존재했습니다. 그 자신이 더욱 도덕적이라는 자격지심으로부터 출발하는 거죠. 게다가 인간이란, 자신이 우월하다는 판단이 들면 과시욕을 불태우는 동물입니다. 마릴린 몬로라고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녀는 ‘마릴린 먼로 프로덕션’이라는 영화사를 만들어 ‘영화 제작’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원작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영화화해 출연하기도 했는데, 기자들은 짓궂게도 ‘스펠링’을 아느냐고 묻습니다. 그는 뭐라 대답했을까요? “하나도 몰라요.” 연기력과 지성이 결여된 ‘섹스 심벌’의 몰락은 이미 정해져 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조 디마지오와의 짧고도 불행했던 결혼생활, 그리고 마약의 품 속에서 서서히 몰락해가고 있었던 겁니다. 마릴린 몬로는 1962년 8월 5일 아침, 변사체로 발견됐습니다. ‘약물 과용(수면제)으로 인한 사망’이라지만, 수면제 성분이 혈액에서는 발견됐으나 위에서는 발견되지 않았고 주사기 바늘자국도 발견되지 않았답니다.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것치고 너무나도 점잖은 자세로 사망한 것, 그리고 로버트 케네디와의 석연치 않은 결별 과정 등, 이런 점들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죠. ■ ‘섹시 콘셉트’의 유혹, 하지만 그 속에 숨은 비극 ‘섹시 콘셉트’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더더욱 범람해갑니다. 신인 여가수와 신인 여자연기자들, 저마다 기기묘묘한 노출의 콘셉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 여자가 오늘 벗었다면, 이 여자는 내일 더 현란한 노출 콘셉트를 보여주는 시대. 하지만 마릴린 몬로와 같은 흡입력과 파괴력을 겸비한 아이콘은 없습니다. ‘풍선껌’일 뿐입니다. 마릴린 몬로의 시대보다 더욱 더 빨리 단물이 빠지는 허망한 ‘풍선껌.’ 그럼에도 ‘비키니진’이니 뭐니 아이디어들도 기막히죠. 순간의 ‘관음증’을 자극하는 것도 훌륭한 승부 방법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릴린 몬로’를 꼭 기억해야 합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마릴린 몬로’는 당신들과는 비교도 안 될 시대의 ‘섹시 아이콘’이었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었던 욕망을, 그를 스타로 만들어준 남성들의 끈적한 시선이 망가뜨린 아이러니한 사례였습니다. 벗고 활개친다고 모든 게 다 해결되지는 않아요. 연기력이 모자라서, 지성이 모자라서 그는 인기와는 별개로 끊임없는 조롱에 시달렸어요. 게다가, 그 관능미란 평생 보장되는 매력도 아닙니다. 게다가 신은 인간에게, 아주 냉정한 원죄를 부여했거든요. 바로 늙는다는 거죠. 인간의 매력은 나이가 듦에 따라 시들해지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원숙한 품위와 매력도 있지만, 그런 매력은 부단한 노력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자칭 ‘섹시스타’들, ‘섹시 콘셉트’로 대박신화를 꿈꾸는 우리 시대의 ‘섹스 심벌’들은 마릴린 몬로를 기억해야 합니다. 미치지 못한다는 것도 분명히 기억해야 하구요. 잠깐의 단물만 제공하고 사라질 ‘풍선껌’으로서, 기억조차 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인물이 될 것인지. ‘섹시 콘셉트’를 내세우고 ‘비키니진’을 자랑하기보다, 오랜 사랑을 얻어 행복을 쟁취할 수 있는 좀 더 근본적인 방법을 생각해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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