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은 지금 거듭나고 있는 중이다. 7월 수뇌부 개편에 이어 8월 삼성테크윈의 디카부문을 정밀기계 사업부문과 분리해 삼성전자와 합친 것이라든지 예전과 다른 방식으로 한달에 한 번 꼴로 새로운 안이 발표되면서 스피디하게 진행되고 있는 모양새다. 재계에서는 최근의 삼성움직임을 ‘삼성식 빅딜’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외환위기 당시의 방식은 타 그룹 계열사 간의 맞교환을 통해 이뤄진 ‘외부빅딜’이라면 지금의 시도는 이건희 삼성 회장이 전자·화학 등 그룹내 계열사 간 헤쳐 모여식 ‘빅딜’을 통해 4, 5년 뒤 경쟁력확보를 주문하고 있다는 의미다. 전략기획실 김준식 상무는 3일 CNB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금융만 제외하고 나머지 전자·화학 등 제조계열사들이 내부 논의를 거쳐 글로벌 경쟁력 강화 방안을 도출하면 전략기획실에서 스피디하게 경영진단하고 위에 승인을 거쳐 발표하는 식이다”고 말했다. ‘삼성식 빅딜의 핵심’은 삼성전자에 있다. 그룹의 핵심인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덩치를 키우며 전자계열사들의 시너지 효과를 최대화 시키기 위해 사업재편을 서두르고 있다. 삼성테크윈 디카사업부를 삼성전자 박종우 DM총괄 사장이 맡은 것이 대표적이다. 삼성내부에서도 이번 조치에 대해 디카사업부가 삼성테크윈 산하이긴 하지만 ‘느슨한 고리’일 뿐 사실상 삼성전자 소속과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이 중공업 분야를 강화하기 위해 삼성테크윈의 방산 사업 등을 중공업과 합치는 방안도 고려해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하지만 합병을 위해서는 계열사 주주들의 반발, 최고경영자 등 직원 간 공감대 형성 등을 삼성이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LCD와 삼성SDI의 PDP 등 삼성의 디스플레이 사업도 삼성전자와 삼성SDI 간 중복 업무조정을 통해 ‘선택과 집중’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특히 디스플레이 사업은 이재용 전무가 삼성전자와 소니의 합작사인 S-LCD의 등기이사를 맡고 있어 그룹으로서는 더욱 신경을 쓰는 분야다. 현재 삼성전자와 삼성SDI는 차세대 패널인 능동형유기발광다이오드(AMOLED)사업을 동시에 진행 중이며 삼성SDI는 먼저 양산체제 들어간다. 화학분야는 삼성이 조만간 브리티시 패트롤리움(BP)이 보유한 삼성석유화학 지분 47.5%를 인수할 예정이다. 3년 전부터 BP가 정리를 위해 내놓은 지분을 인수해, 독자경영으로 바꾼 뒤 삼성정밀화학·삼성BP화학 등 화학계열사 간 사업조정을 진행할 것이라는 게 설득력 있는 전망이다. 그러나 삼성 계열사 한 관계자는 “발표가 나기 전까지 해당 계열사 사람들도 모르는 일들이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전략기획실은 계열사 경영진단 등을 통해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한 뒤, 계열사 CEO들과 논의해 결과물을 내놓는 식이다. 다만 조직 동요를 막기위해 최대한 비밀에 부친다. 지난달 27일 ‘2007 선진제품 비교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삼성전자 윤종용 부회장이 삼성테크윈 신만용 부사장 곁으로 다가가 등을 두드렸다. 주변에선 그 의미를 몰랐지만 곧 그것이 ‘환영한다’는 뜻이라는 것이 알려진다.
삼성 측은 1일 디카나 캠코더 같은 디지털 광학기기 경쟁력 강화를 위해 삼성전자 박종우 디지털미디어총괄사장이 테크윈 디지털카메라사업부문장을 겸임한다고 발표했다. 테크윈 직원들은 올 11월부터 그동안 일했던 성남사업장 대신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으로 출근한다. 소속은 그대로 테크윈이지만 삼성전자에서 일해야 하는 것. ■겹치는 사업을 한곳으로, 인력 재배치도 시작 삼성전자 출신으로 2005년 테크윈으로 옮겨 디지털카메라사업을 성공적으로 키운 신 부사장도 다시 수원으로 간다. 그는 그동안 자기가 맡은 분야의 매출을 2배, 순익을 16배 올려 놓았다. 캠코더를 만드는 삼성전자와 디지털카메라를 개발·판매하는 테크윈은 그동안 디지털 광학기기사업 주도권 경쟁을 벌여 왔다. 삼성은 같은 회사 내 여러 팀, 나아가 다른 법인에 같은 사업을 시작하도록 만들어 내부 경쟁을 유도해 왔다. 경쟁에서 생기는 긍정적 효과가 더 크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최근 삼성은 중장기적 위기를 느껴 중복 사업을 정리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꿨다. 삼성그룹 전략기획실 윤순봉 부사장은 지난달 26일 “그룹 차원에서 사업 재편·인력 재배치·불요불급 비용 축소를 핵심으로 하는 경쟁력 강화 방안을 추진중”이라고 밝혔다. 그 첫 사례가 삼성전자와 삼성테크윈의 디지털 광학사업 통합이다. ■얽히고 설킨 중복 사업 그룹 내 대표적인 중복 사업은 차세대 디스플레이장치, 이른바 능동형 유기발광다이오드(AMOLED). AMOLED는 종이처럼 얇게 만들어 접어 들고 다닐 수 있는 고화질 디스플레이장치다. 삼성SDI는 2000년 AMOLED를 차세대 사업으로 선정하고 지금까지 4500억원을 투자했다. 기흥에 이미 공장도 만들었다. 문제는 SDI에 이어 삼성전자도 AMOLED를 향후 전략 사업으로 선택했다는 점. 삼성전자는 각종 정보기술(IT) 전시회에 AMOLED 시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전자와 SDI는 사업 주도권을 놓고 물밑에서 치열한 신경전을 벌여 왔다. 이번 사업 재편작업에서 AMOLED의 주인이 가려질 확률이 높다. 그래서 요즘 두 회사 관계자들은 잔뜩 긴장해 있다. 삼성전기와 삼성테크윈도 모두 카메라 모듈(부품)을 만든다. 심지어 삼성전자 내부에도 사업부서 간 같은 사업을 따로 하는 경우가 많다. 삼성전자 정보통신(TN)사업부문과 디지털미디어(DM)사업부문은 모두 음원과 동영상 서비스 사업을 하고 있다. 정보통신사업부문은 휴대전화 안에 집어 넣을 음악과 동영상을 서비스한다. 디지털미디어사업부문은 MP3플레이어에 들어갈 음악과 동영상 서비스를 한다. 두 사업 부문은 모두 인터넷TV(IPTV)용 셋톱박스(TV 수신장치)를 만들고 있다. ■타협 성격 짙은 중복 사업 정리 일부에선 삼성전자 사장이 테크윈 디지털카메라사업을 맡은 것은 ‘계열사 벽을 허문 파격 인사’라고 말한다. 그러나 삼성그룹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삼성전자 브랜드와 세계적인 유통망을 이용해 디지털 카메라 사업을 세계 최고로 키우고 싶지만 디카 사업을 삼성전자로 몰아 줄 방법이 없었다. 작년 테크윈 순익의 절반은 디지털 카메라 사업에서, 나머지 절반은 군수용 정밀기계 사업에서 나왔다. 그룹 관계자는 “디카 사업을 삼성전자에 넘길 경우 테크윈 소액주주들의 반발을 감당할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 결과 삼성전자가 사업을 주도하고 실적은 테크윈 장부에 적는 특이한 사업구조를 택한 것이다.
한편 그동안 판로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어왔던 브리티시 페트롤리움(BP. 영국석유)의 삼성석유화학 지분 전량(47.5%)을 삼성그룹 차원에서 인수하는 것으로 최종 가닥이 잡혔다. 이에 따라 왜 BP가 떠나려고 하는지 또 삼성그룹차원에서 인수를 결정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를 놓고 업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 2일 삼성석화에 따르면 최근 BP사가 보유한 지분 전량에 대한 인수를 요청해 온 상태다. 삼성석유화학 관계자는 “BP가 지난해부터 매각을 추진해 왔지만 마땅한 매입처가 없자 우리 측에 요청을 한 상태다”면서 “현재 매입을 검토중”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삼성석화 지분은 BP 47.5%, 삼성전자·제일모직 등 그룹측 47.5%, 신세계 5%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그룹차원의 이번 인수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많다. 일각에서는 BP가 지분매각에 나선지 1년이 넘었지만 주인이 나타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인수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다. 일부에서는 그룹 차원에서 석화사업을 강화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 보면 국내 TPA(Terephthalic Acid. 폴리에스터 원료)업계의 구조조정을 본격화 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 아니냐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삼성석화는 국내 최대 TPA 업체로 연간 180만t의 생산이 가능하다. 하지만 고공행진을 지속하고 있는 원재료(PX. 파라자일렌) 가격과 중국의 급속한 신증설로 자급률이 갈수록 높아지는 등 업계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전형적인 샌드위치 상황이다. 현재 국내 TPA 생산기업들은 올 상반기에 적게는 50억원대의 적자를 기록했고, 덩치가 큰 기업들은 200억원 이상의 손실을 기록중이다. 특히 3·4분기 들어서도 이 같은 상황은 지속되고 있다. 실적악화 원인은 크게 두가지. 원료인 PX가격 초강세와 중국의 급속한 신증설에 따른 전세계적인 공급과잉이 주 요인이다. TPA의 원재료인 PX는 지난 2005년 평균 t당 904달러(FOB Korea, ACP 기준)에 거래됐지만 2006년에는 연평균 1145달러로 급등했다. 올 1·4분기에는 1126달러, 2·4분기 1200달러를 넘어섰다. TPA가격이 t당 930달러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현 상황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인지 짐작 가능하다. 원료가격 강세와 더불어 세계 최대 TPA 수요시장이자 한국의 최대 수출시장인 중국 생산능력 확장에 따른 자급률 상승세도 국내 관련업계를 벼랑 끝으로 내 모는 요체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업계 스스로가 장기적인 실적악화를 예상하면서도 별다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일부 기업의 경우 TPA설비를 PET병 투명성을 높이고 접착제나 코팅제 첨가제로 사용되는 PIA(Purified Isophthalic Acid, 고순도 이소프탈산)로 전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업체들이 일부 설비 가동을 중단하는 아주 원시적인 방법으로 대응하고 있다. 단기 대응책은 물론 최악의 상황이 예상되고 있는 오는 2010년 전후를 위한 장기 대책 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란게 업계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조창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