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배형규·심성민 씨 2명이 살해되고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피랍사태가 장기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정부가 대통령 특사까지 파견하고 다방면으로 인질 석방을 위해 노력한다고 하지만, 피랍 사건이 발생한 지 보름이 지난 뒤에야 정부는 탈레반과 직접 협상을 시작했다. 이번 사태는 9·11 이후 테러근절이라는 명목아래 진행된 미국의 침략전쟁에 한국이 동조했기 때문이라는 진단이 중론이다. 그래서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이 복잡한 실타래를 푸는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시민사회와 정치계의 목소리가 높다. 피랍자 가족들도 2일 미 대사관을 찾아가 21명의 피랍자 석방을 위한 미국의 적극적인 노력을 호소했다. 하지만 조선일보 등 일부 언론과 단체들은 생게망게하게도 이런 목소리를 ‘반미운동의 확산’이라며 왜곡하기에 바쁘다. 이들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외치던 한미동맹을 한번 생각해보자. 그렇게도 중요한 한미동맹 관계를 놓고 봐도 왜 미국은 동맹국인 한국의 인질 석방에 대해 ‘테러단체와 협상은 없다’는 원칙만 내세우는가? 미국이 2006년 1월 7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납치됐던 미국 여성 질 캐롤 씨의 석방을 위해 이라크 여성 5명을 맞교환한 일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당시 미국 정부가 발표한대로 “이라크 여성 수감자 석방이 납치범들의 요구에 따른 게 아니라, 통상적 조사 절차를 거쳐 혐의가 없는 이라크 여성들을 풀어준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인다. ■그토록 강조하던 ‘동맹의 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고 배형규·심성민 씨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면서 피랍자 석방을 바라던 시민단체들은 미국 정부에 대한 사태 해결의 촉구 목소리를 더욱 높이고 있다. 한국진보연대(준)가 매일 저녁 광화문 미 대사관에서 피랍자석방과 미군철군을 위해 촛불문화제를 열고 있고, 이 단체의 공동준비위원장인 한상렬 목사는 2일부터 철야단식농성에 들어갔다. 피랍사태 직후 피랍자 석방과 철군 목소리를 강조한 민주노동당도 최근 미 대사관 앞에서 잇따라 기자회견을 열고 미국의 역할론을 강조하고 있다.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소장 이대훈)는 “언제나 한미동맹을 앞세워 미국의 대테러전에는 너무도 쉽게 군대를 파견하면서 그곳에서 한국인의 생명을 지키는 일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은 바로 한국 정부가 자초한 비극이자 한국 정부의 대외정책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이다”고 말했다. 참여연대는 이어 “어떻게 그토록 강조하던 ‘동맹의 정신’이 자국민 석방 문제에 있어서는 오간데 없고 미 행정부를 설득하는데 전혀 발휘되지 못하는 것인가”라고 밝혔다. 참여연대는 “정부의 아프간과 이라크에서의 즉각적인 철군 입장은 물론 미국이 직접 협상에 나설 것을 분명히 요구해야 더 이상의 무고한 죽음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1일 한국청년단체협의회(의장 이승호)를 비롯한 9개 청년단체와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상임대표 홍근수)도 광화문 미 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미국 정부가 피랍사태 해결에 적극 나설 것을 촉구했다. 청년단체 대표자들은 이날 미 행정부에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이번 아프간 피랍 사태 해결의 열쇠는 미국이 쥐고 있다”며 “아프간 하미드 카르자이 정부는 미국의 동의 없이는 인질 석방을 위한 어떠한 실효적 조치도 취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승호 한국청년단체협의회 의장은 “탈레반 세력이 테러리스트라고 해서 협상에 나설 수 없다며 (미국이) 우회적으로 사태를 방관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며, 부시 대통령이 자국민이면 그렇게 하겠느냐”며 미 정부의 즉각적인 개입을 촉구했다. 그는 “한국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한국정부는 지금이라도 파병 한국군을 철수하고 미국에게 압박을 가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치권, “미국과 유엔의 적극적이고 전향적 자세 필요하다” 김형오 한나라당, 장영달 열린우리당, 강봉균 통합민주당, 천영세 민주노동당, 정신석 국민중심당 원내대표는 1일 국회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무고한 민간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인도적 협력이 절실하다”며 “당장의 인명 살상을 막기 위한 미국 정부와 유엔의 적극적이고도 전향적인 자세와 역할을 정중히 요청한다”고 밝혔다. 범여권 예비대선주자인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도 “23명의 인질이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인이었다면 미국 정부는 과연 어떤 판단과 선택을 했을지 묻고 싶다”며 미국의 적극 개입을 촉구했다. 특히 민주노동당은 “미국은 ‘테러범과 협상하지 않겠다’며 비타협 원칙만을 반복하고 있지만 2006년 1월 이라크에서 납치된 미국 여성 질 캐롤 씨의 경우 미국이 억류 중인 이라크 여성 5명을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석방된 선례가 있다”며 “미국의 테러범과의 비타협 원칙은 이미 2006년에 깨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호진 민주노동당 대변인은 “원칙이 깨졌음에도 피랍 한국인 협상에 대해 비타협 원칙을 주장하는 것은 미국의 파렴치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다”며 미국 정부의 즉각적인 협상 참여를 촉구했다. ■미국의 역할과 책임 요구를 ‘반미선동’으로 받아치는 ‘조선일보’ 하지만 <조선일보> 등 일부 보수언론들은 피랍이라는 비극적 상황에 대한 미국의 책임과 역할을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반미선동’이라고 비난했다. <조선일보>는 8월 2일자 ‘이 비극마저 반미 선동의 소재로 써먹겠다는 건가’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탈레반의 목표는 이번 사태를 통해 미국을 책임의 전면에 세우려는 것”이라며 “국내 일부 세력의 반미 선동은 이런 탈레반을 도와 그들의 만행을 정당화시켜 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국내 일부 세력들이 주장하듯이 미국 말 한마디면 사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아무리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그들 스스로의 생사를 걸고 탈레반과 싸우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사설은 정당 대표 모두가 미국 워싱턴행에 올랐지만 열린우리당 지도부만 ‘시류에 편승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파병반대국민행동과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도 직접 언급했다. 참여연대는 곧바로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며 “21명 피랍자들의 생명이 걸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본적인 요구조차 ‘반미선동’ 운운하며 정치쟁점화하려는 시도”라고 비판했다. 참여연대는 “조선일보 등 일부 언론과 한나라당은 이 상황에서도 피랍자 생사보다는 미국에 대한 비판을 경계하는 데 더 집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사태의 원인을 진단하는 데 시각 차이가 있음을 인정해도 피랍자 21명의 안전한 석방을 바라는 데는 이견이 없지 않을까? <오재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