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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서평] 임철우 소설, <사평역(沙平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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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2호 ⁄ 2007.08.27 15:35:14

어디론가 뜬금없이 떠나고 싶을 때, 우리는 종종 귀에 익은 지명들을 기억의 책갈피에서 꺼낸다. 그러나 현실 속의 ‘먹고사니즘’은 그 여행을 ‘마음속의 것’ 이상이 되게 하지는 못한다. 그럴 때 내가 선택하는 방법은 책을 읽는 것이다. 독서는 마음 하나로도 어딘가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겨울이 내 마음과 내 망막에 비친 남루한 가로수 잎새로 올 때, 나는 그 섬에 가고 싶다. 詩人 정현종의 말처럼,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고 나는 ‘그 섬에 가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그 섬의 정체는 아마도 ‘소통’이라 불리는 무엇일지도 모른다. 최루탄과 경찰봉의 ‘shall we dance?’가 밥상 위의 김치처럼 일상에 머무르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을 어느 시인은 ‘꽃조차도 짐승으로 보이던 세월’이라 불렀다. 그 시절의 근저에는 우리의 가슴에 화인처럼 꽂혀버린 ‘5월 광주’가 있다. ‘광주’의 정신을 견고하게 떠받치고 있는 소수의 작가들 중에는 황지우처럼 대서사시로 한 시대의 종언을 선언한 사람도 있고, 김남주처럼 스스로를 ‘시인’이 아닌 ‘전사’로 불러 달라고 했던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창작행위들이 결국 가고자 했던 길은 자주니 민주니 통일이니 민중이니 하는 사념적인 관념이 아니라, 눈물과 콧물, 그리고 똥오줌이 함께 범벅이 된 채로 거리에 나뒹굴던 그해 오월 광주의 핏빛 현실을 민중들의 심장에 새기는 작업이었다. ■흰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 세월을 한 점의 흔들림도 없이 형상화한 작가가 있다. 그의 이름은 임철우다. 그가 말하는 시대의 우울과 창문에 비친 톱밥난로의 불빛과도 같은 따스한 시선은 그의 작품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 ‘결국 희망이라는 것은 절망의 끝에 놓여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그래서 더욱 소외되어 버린 진실을 알게 해 준다. 그의 작품 중에 <사평역(沙平驛)>을 읽는다. 이 작품의 배경을 잠시 설명하자면(사실 이런 일들은 지극히 불필요하고, 귀찮은 것이다),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사평리에는 역이 없다. 존재하지 않는 역을 시인 곽재구와 소설가 임철우는 왜 만들어내고 상황을 그렸을까. 마치 황석영의 소설 <삼포 가는 길>에서 ‘삼포’가 존재하지 않는 지명이듯이, 사평역 또한 그 시대의 잿빛 현실을 반증하는 하나의 장치이다. 어차피 소설이라는 게, ‘있을 법한 사실을 그려내는 것’ 아닌가. 여하튼 임철우의 작품 <사평역>은 함박눈 내리는 어느 겨울 저녁을 배경색으로 하고 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랬다. 우리 모두 ‘침묵 바이러스’에 심하게 감염된 적이 있었다. 결혼하지 못한 농촌의 사내들이 막걸리처럼 농약을 마셔도, ‘잇빠나모노데스네’를 연발하는 매춘관광국의 오명을 들으면서도, 맞벌이 부부가 잠그고 나간 단칸방에서 어린 남매가 불 타 죽어도, 우리는 그저 눈물 한 줄, 한숨 한 번 내쉬고 나면 그만이었다. 오월 광주도, 북녘의 수해도 모두 한 번씩의 이벤트성 역사였다. 그러는 동안, 대한민국 1%들의 성지는 더욱 단단해져 갔고, ‘국가보안법’은 셀 수 없으리만치 많은 사람들을 학교와 직장에서 거리로 떠돌게 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역시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런 그가 마음 편히 갈 수 있는 곳이란 결국 ‘어머니’라는 냄새로 기억되는 고향 밖에 없을 것이다. 그 고향에는 오래되고 낡은 역이 있다. 우리의 어린 시절 교실을 ‘마지못해’ 덥히던 톱밥난로가 있는 그런 곳이다. 톱밥난로의 기억을 간직하는 모든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겠지만, 매시간 톱밥을 넣고 또 타고 남은 톱밥의 시신들을 치워주어야 한다. 우리네 삶이 그러하듯이, 빈 잔해를 사랑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잔해에서 또 다른 열기가 솟아나고, 별들의 잔해에서 새로운 별이 탄생한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주인공의 곁에는 여러 군상의 사람들이 앉아 있다.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신’ 채, 그들은 모두 침묵하고 있다. 그리고 그 침묵의 이유는 서로 다르다. 어떤 사람은 오래 묵은 해소기침을 쿨럭이며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추억하고 있고, 어떤 이는 불편하기 그지없는 나무의자를 낮은 목소리로 불평하며, 도망간 채무자를 잡으러 왔다가 그냥 돌아서는 자신을 책망한다. 사실, 산다는 게 다 그런 것 아닌가. 흔히 말하는 기쁨과 노여움과 애증과 즐거움, 이런 것들이 비빔밥 속의 밥알갱이와 다른 속들이 비벼지듯이 혼재해 있는 것. 그게 바로 ‘살아간다는 것’ 아니겠는가. 주인공은 수배중이다. 학교로는 돌아갈 수도 없고, 어머니에게는 말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세월, 궁벽한 시골에서 ‘대학생’이란 존재는 온 집안의 ‘희망의 근거’였다. 그래서 나온 말 하나, ‘우골탑(牛骨塔).’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연기 속에서 눈은 계속 쌓이고 기차는 연착된다. 무엇인가를 속절없이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그것이 얼마나 가슴 조이는 일인가를. ‘겨울 경춘선’이라는 시가 있다. ‘전대협 시인’ 신동호의 작품인 이 작품에는 떠나는 자의 그것이 아닌 돌아가는 사람의 우울한 감성이 스며 있다. 먼 ‘촌구석’의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그곳을 떠나는 모든 행위는 다 일정하게 우울하다. 그 ‘우울’을 어떤 형용사나 명사로 불러도 좋다. 발효김치를 먹고 사는 모든 ‘조선놈들’의 영혼 한 구석에는 다소의 비장미가 있기 때문이다. <사평역>의 주인공을 침묵하게 만드는 것의 정체는 바로 시대(時代)다. 비껴갈래야 비껴갈 수 없는, 그럼에도 침묵을 강요당하고 강요하며 사는 것이 ‘편하게’ 사는 시대, 그 시대의 보이지 않는 정체가 주인공으로 하여금 톱밥난로를 뚫어져라 응시하게 하는 것이다. 막차가 오지 않고 폭설마저 내리는 작은 시골 역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란 톱밥난로가 꺼지지 않게 톱밥을 넣어주는 일이므로.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자정이 가까워오는 동안에도, 막차는 좀처럼(‘여전히’가 아니라) 오지 않는다. 기다리던 시간 아니, 자신이 영혼을 태워 앞당기려고 했던 그 시간이 가까워오고 있음에도 기다리는 것의 실체와 마주하지 못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때로는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특히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월의 빛깔이 회색빛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고 떠나버리기도 한다. 지난날의 그 잘난 ‘좌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사평역>의 주인공 역시 그러했던 모양이다. 그는 끊임없이 주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물론 자신은 침묵한 채. 그러는 동안 그의 영혼은 역 대합실의 ‘민중’들과 ‘교감’하고 ‘소통’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가 내린 결론은, 대합실 유리창 밖으로 몰아치는 눈보라를 몰아내는 최선의 방법은 오지 않는 막차를 일말의 불평과 함께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가물가물해져 가는 톱밥난로에 톱밥을 넣는 행위다. 다소 먹물을 먹은 자들은 ‘논리’와 ‘시대정신의 정체’를 논(論)한다. 그러니 오나가나 ‘먹물’일 수밖에. 소통하고 변혁하려는 자, 브나로드(v narod)하라. 그러면 길이 보이고, 진정한 ‘민중’이 보일 것이다. 민중이라는 ‘개념’을 사랑한다고 거짓말하지 말고, ‘개별’로서의 민중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우리 마음속의 ‘삼포’와 ‘사평역’을 찾아갈 수 있다. <유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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