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중반 어느 여름이다. 쓸쓸한 마음 달랠 길 없어 길을 헤매다 우연히 찾은 쇠락한 산사(山寺). 기어코 고사리나물에 곡차(曲茶)를 권하던 50대 초반의 스님을 아직 기억한다. 어찌나 눈이 맑던지 사슴 혹은 지금은 사라졌다는 야생동물 담비를 떠올리게 하던 그 눈빛. 처연한 눈망울. ‘한국 구도(求道)소설의 최고봉’이라 지칭되는 김성동의 <만다라>에는 세속을 떠난 스님 ‘지산(知山)’을 묘사하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말랐다. 솜씨 좋은 칼잡이가 포를 뜬대도 살점이 겨우 한 근이나 나올까.” 이 문장을 읽은 뒤부터 나는 살찐 스님을 믿지 않는다. 속세에는 없는 길을 찾아가는(求道) 험난한 여정에서 피둥피둥 살이 오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 뿐더러 보기에도 거북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슴 혹은, 담비의 눈망울을 가진 스님을 본 이후 핏발 선 눈동자의 구도자 또한 믿지 않는다. 자신이 꿈꾸는 세상에 대한 지극한 바람은 사람을 아이로 만든다. 세상 어느 아이의 눈동자가 맑지 않던가. 이 두 가지 믿음을 ‘지극히 주관적인 편견’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단언컨데 세상 어떤 믿음이 주관적이지 않던가. 눈 맑기가 사슴 혹은 담비 같고, 여윈 몸이 김성동이 묘사한 지산 스님 같은 베트남 시인 한 명을 만난 적이 있다. 본명 레지투이. 필명 반레.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66년. 열 일곱 어린 나이로 자원 입대, 침략자 미국에 맞서 베트남 민족해방전쟁을 수행했던 소년 월맹군. 자신의 부대원 300명 중 295명이 전사하는 9년에 걸친 참혹한 전투에서 끝끝내 살아남아 또 다른 소년 월맹군 친구의 ‘이 악마의 전쟁이 끝나면 너는 시를 써다오’라는 유언을 기억해 마침내 시인이 된 사람. 그와 나는 두 번 만났다. 연전에 ‘한국-베트남 작가회담’ 취재차 찾은 사이공에서 처음 만난 반레는 조국해방을 위한 싸움에 기꺼이 목숨을 건 강골의 혁명가라기보다는 조용조용한 어투로 시와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예술가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그는 누구보다 겸손했고 무엇보다 친절했다. 그의 조그만 몸 어디에서 강위력한 제국 미국의 네이팜탄과 악질의 고엽제 CS파우더에 맞설 힘이 생겨났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저 지나가는 말처럼 던진 “그것이 비록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라도 해방을 위한 전쟁은 즐거운 것”이란 한마디만이 그를 ‘호치민 샌들’과 구 소련제 ‘AK 소총’으로 상징되는 베트남 민족해방전사였음을 실감하게 했다. 내게 이런 느낌을 가지게 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눈빛이었다. 차마 병아리 한 마리조차 함부로 죽일 수 없게 생긴 해맑은 아이의 눈망울. 두 번째 만났을 때도 반레는 변하지 않았다. 그저 신장을 앓았다는 얼굴이 좀 더 핼쑥해져 있었을 뿐 그 눈빛은 물론 여윈 몸까지 그대로였다. 소설가 김남일과 평론가 고영직, 고명철 등이 참여하고 있는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이 주최한 만찬은 글쟁이들의 모임이 언제나 그랬듯 2차로 이어졌다. 어둠이 장악한 인사동 골목의 노천카페. 그것이 취기에서였는지 혹은 구면(舊面)의 반가움에서였는지 몰라도 반레의 어깨에 내 점퍼를 걸쳐줬다. 베트남 날씨에 비하면 혹한과 같을 한국의 가을날씨를 걱정해서였다. 그리고는 옆에 앉아있던 시인 김정환과 소설가 최인석에게 이렇게 물었던가. “저 사람, 저렇게 착한 눈동자를 해 가지고 미국과 전쟁을 했다는 게 믿어지세요?” 우문에 대한 현답이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 1기 회장인 최인석에게서 돌아왔다.“야 임마, 저 눈처럼 맑은 마음이니까 혁명도 하고 해방도 본 거야.” 더 이상 무슨 부연이 필요할까? 최인석의 말처럼 혁명과 해방을 불러들인 반레의 맑은 눈망울이 앞으로도 내내 그러하기를 서툴게 빌어볼 뿐. <글 / 마하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