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일 비정규직법이 시행된 뒤 ‘이랜드사태’, ‘코스콤사태’ 등 외주화로 비정규직법을 회피하려는 사용자들의 극단적 선택을 막지 못하는 비정규직법의 허점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비정규직법의 ‘지렛대’ 역할을 하면서 비정규직법 성패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차별시정제도’마저 실효성에 강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 차별시정 요구했더니 회사 ‘해고’< /b> 2일 중앙노동위원회와 경북지방노동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7월 24일 전국에서 처음으로 비정규직 차별시정을 신청한 경북 농협 고령축산물공판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19명 가운데 1명인 이 아무개씨(39)가 ‘계약해지’됐다. 1년 또는 일정기간 동안만 고용이 보장되는 비정규직노동자에게 ‘계약해지’란 곧 정규직의 ‘해고’와 같다. 이 씨는 2001년부터 돼지 도축 일을 해왔고 농협 측이 1년 단위로 계약을 갱신해왔다. 그러다 고령축산물공판장 사 측은 비정규직법이 시행되자 농협중앙회 지침을 이유로 돼지도축 업무를 외주화했다. 이 씨는 외주업체에서 환경미화 등 보조업무를 맡게 됐다. 이에 따라 이 씨를 포함한 19명은 지난 7월 24일 “공판장이 정규직에 견줘 차별대우를 하고 법에 따른 차별시정 의무를 피하느라 자신들을 다른 업무로 일방적으로 배치했다”며 경북 지노위에 차별구제를 신청했다.
하지만 사 측은 이 씨에게 보복성 짙은 해고를 결정했다. 게다가 사 측은 이 씨 말고도 차별시정 신청을 한 9명(10명은 중도포기)의 비정규직을 계약만기가 다가오는 순서대로 내년 초까지 모두 계약해지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 이젠 부당해고까지 밝혀내야…‘엎친 데 덮친 격’< /b> 해고된 이 씨는 경북지방노동위원회 심사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경북 지노위가 차별임을 인정해 시정명령을 하더라도 이 씨의 복직은 현재로선 불가능하다. 차별시정과 별도로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내야하는 상황에 내몰린 것이다. 그동안 차별시정제도는 제도가 시행되기 전부터 그 실효성에 강한 의문이 제기됐다. 이 씨처럼 차별시정을 신청한 비정규직 노동자 대한 사용자의 해고나 외주화를 막을 보호장치가 없는 셈이다. 올해 6월 20일 민주노총이 전국 19세 성인남녀 1000명을 선정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상당수 응답자들이 비정규직 차별시정제도의 실효성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보였다. 전체 응답자 가운데 64%가 차별시정제도에 대해 “해고가 두려워 차별시정신청을 제대로 못해 실효성이 없다는 노동계 주장에 동의한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비정규노동자의 차별을 단계적으로 해소할 수 있다는 정부 주장에 동의한다”라고 대답한 응답자는 29%에 불과했다. 또 제도가 시행된 지 한 달이 넘은 지난 8월 5일 노동부 집계에 따르면 차별시정 신청이 접수된 사업장은 올해 7월부터 적용 대상이 되는 300인 이상 사업장 1982곳 중 단 3곳에 머물렀다. 민주노총이 9월 11일까지 집계한 결과에도 차별시정을 신청한 사업장은 10곳(130명)에 불과했다. 민주노총은 이같은 차별시정제도의 미미한 활용에 대해,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비명문화, 노조 신청권 배제 등 법 자체의 결함과 비정규직노동자의 계약해지 협박, 비정규직법에 대한 불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3~5년 가는 소송, 정규노동자가 감수할 수 있을까< /b> 노동부는 비정규직 차별의 구분이 복잡할 것이라는 판단아래 지난 6월 3일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처우 금지영역, 합리적 차별 내용, 차별시정 절차’ 등을 담은 ‘차별시정 안내서’를 내놓았다. 일종의 ‘가이드라인’이라는 것이 노동부의 설명이었지만, 노사 양 측은 노동부가 판단의 여지가 많은 차별시정제도를 획일적인 틀에 묶어놓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 안내서 22~23쪽을 보면, 차별시정을 신청할 수 있는 대상을 ‘기간제·단시간 노동자’나 ‘파견노동자’로 정하고 있다. 즉 노조 등 차별시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전문가나 단체의 개입을 원천적으로 막은 것이다. 이를 두고 ‘3~5년이 걸리는 차별시정 절차와 소송비용 등을 어느 비정규직 노동자가 이를 감수할 것인가’라며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조처라는 비판이 일었다. 특히 차별시정 절차도 지방노동위원회(최소 3개월 이상 소요)⇒ 중앙노동위원회(최소 3개월 이상 소요)⇒ 행정법원(1년 가량 소요)⇒ 고등법원(1년 가량 소요)⇒ 대법원(1년 내지 최장 3년도 걸림)으로 짧게는 3년에서 길게는 5년까지 걸리는 것으로 추산된다. 민주노총 법률원은 “차별시정 절차는 부당해고, 부당노동행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주장과 입증 등이 어렵고 복잡해 당사자가 홀로 재판진행을 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며 “결국 노무사나 변호사를 선임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그 비용은 상당할 것”이라고 밝혔다. 열악한 노동조건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 가운데 누가 3~5년 걸리는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며 시정제도를 이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 차별적 노동조건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별도의 직군으로 근로계약기간만 무기계약으로 하는 최근의 ‘중규직 전환’ 흐름도 현행 차별시정제도로는 속수무책인 상황이다. 민주노총 법률원은 “국가인권위원회나 노동조합 등 차별행위를 아는 제 3자도 피해자를 대신해 차별시정 신청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용자들이 앞 다투어 비정규직법을 피해가고, 차별시정제도 신청을 이유로 비정규직 노동자를 해고하는 사례까지 발생했다. 비정규직법의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오재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