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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波칼럼)48년 동안 피울음 울어온 「竹山鳥」

이제 此岸을 떠나 彼岸으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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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7호 ⁄ 2007.10.08 11:32:10

1959년 7월 30일 서대문 형무소 사형집행장에서 간첩죄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선생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원혼(寃魂)은 진세(塵世)에의 미련을 끊을 수 없어 구천(九泉)나루를 건너지 못하고 차안(此岸)의 연고지를 배회한다고 하였던가, 서대문 형무소에 비가 내리는 밤이면 죽산조(竹山鳥 : 가명)의 피울음이 형장에서 가까운 감방으로 구슬피 들려온다고 했다. 『죽산, 죽산, 죽산, …』 밤새도록 구슬피 울어 예는 죽산조의 목에 겨운 울음에 교도관과 수용 죄수들은 억울한 죽임을 당한 죽산 조봉암 선생을 회상하며 추념(追念)의 대화로 밤을 지새웠다고 하였다. 조봉암 선생은 일찍이 일본 중앙대학을 중퇴하여 소련 모스크바 동방노동자공산대학을 2년간 수료하고 3·1운동에 참가하여 1년간 복역한 뒤 1924년 조선청년동맹 중앙간부, 1925년 조선공산당 중앙간부 등을 역임하다가 1930년 중국 상해(上海)에서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 받았었다. 1945년 1월 서울에서 다시 체포되어 해방으로 석방되고 1946년 6월 심기각성(心氣覺省)하여 공산당을 깨끗이 청산하고 탈당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 동년 8월에 초대 농림부 장관, 1950년 제2대 민의원, 6월에 민의원 부의장, 이어서 제2,3대 대통령에 출마했으나 자유당의 관권선거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자유당의 관권에 굴하지 않고 1956년 진보당(進步黨)을 조직하여 1958년 5 ·2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선거 대책을 수렴하던 중 이 해 1월 11일 밤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당 간부 10여 명과 함께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검거되고 2월25일 공보실(公報室)로부터 정당등록취소 조치를 받아 당이 해체되고 말았다. 1959년 2월 27일 당 간부 박기춘·김달호·윤길중 등은 대법원에서 무죄로 판정되어 석방되었으나 조봉암 선생은 간첩행위를 하였다고 판시하여 사형을 언도받자 『이것은 고문에 의하여 꾸민 허위조서에 의한 판결』이라고 재심을 청구했지만 『이유 없다』고 기각 당하고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사건을 『이유 없다』는 이유로 재심청구를 한마디로 기각한 것 자체가 모순이지만 당시 정치풍토가 얼마나 비인간적이며 탈 도덕적이었나를 넘볼 수 있는 상황이지만, 이런 와중에서 목숨을 건 애국정의의 정신을 우리는 다시 한번 되돌아 봐야 한다. 조봉암 선생이 불의에 희생된 지 꼭 48년만인 9월 27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 신부)는 『진보당 사건은 정적(政敵)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한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 유린이자 정치 탄압』이라고 결정을 내린 후 『유가족에게 국가가 사과하고 피해구제와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국가에 권고했다. 국가기관인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조봉암 선생이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다가 복역한 사실을 근거로 독립유공자로 인정할 것도 함께 권고했다. 위원회는 조봉암 선생 처형의 직접적인 동기를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이 1956년 대선에서 200만 표 이상을 얻어 이승만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조봉암을 제거하려는 정권의 의도가 작용해 처형에 이르게 한 것으로 인정된다』고 못 박고 있다. 『인간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지을 수도 있고 프러시아 군대를 육성할 수도 있지만 인간영혼의 무한한 정신력은 말살할 수 없다』고 솔제니친은 말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울던 죽산조의 울음이 지금껏 온갖 잡새들의 울음에 섞여 48년 동안 『죽산, 죽산,…』 울었을지라도 이제는 훨훨 날아 피안(彼岸)으로 건너갈 것이다. <박충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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