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 단상에 올라온 고정원 씨의 눈가엔 눈물이 고였고 입술도 가늘게 떨렸다. “사형제도는 범죄를 막지 못하고 공동의 책임을 가족들에게만 지우는 무자비한 제도입니다. 하루 빨리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모순에서 벗어나길 바랍니다” 고 씨는 2003년 21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 유영철의 잔혹한 범죄로 노모와 아내, 4대 독자를 한꺼번에 잃었다. 하루 전 9일은 공교롭게도 고 씨가 가족을 잃은 고통을 겪은 지 정확히 4년째 되는 날이었다. 그는 “범죄자들에게 더 관심을 갖는다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며 “모두가 생명이 주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며 사형제 폐지를 촉구했다. 고 씨는 가족을 잃은 뒤에 오히려 유영철의 사형집행을 반대하는 탄원서를 쓰기도 했고, 최근 유영철 씨를 양아들로 삼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 씨가 사형수 유영철을 용서하고 사형제 폐지를 주장한 같은 시각 청와대 앞에서는 가수 이광필 씨(41)가 유영철의 사형집행을 재촉했다. 그는 “사형제 존치는 생명의 가치를 인정하고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최후수단이다”고 주장했다. ■ 한국, 12월 29일 ‘사실상 사형폐지국’에 포함< /b> 사형제도 존폐논란은 아직 뜨겁다. 하지만 한국은 사형제도를 갖고 있지만 사형을 10년동안 집행하지 않은 나라이다.
올해 12월 29일이 되면, 한국은 10년동안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 국제엠네스티 분류에 따라 ‘사실상 사형폐지국가’가 된다. 김영삼 정권 말기 1997년 12월 30일 사형수 23명을 한꺼번에 사형집행한 지 10년이 지난 것. 국제엠네스티에 따르면 세계 197개국 가운데 사형제를 폐지한 국가는 102개에 달한다. 또 10년간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 ‘사실상 사형제폐지국가’가 된 나라도 29개국이다. 131개 나라에서 사실상 사형제는 없어진 것. 반면 사형제가 남아있는 국가는 66개국이며 지난 해 사형을 집행국가는 25개에 나라에 그치고 있다. ■ DJ, “사형확정자 52명 모두 무기징역 감형하려 했지만…”< /b> 10월 10일은 ‘세계 사형폐지의 날’이다. 한국은 또 올해 ‘사실상 사형제 폐지국가’ 분류를 앞두고 있다.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인권단체연석회, 천주교인권위원회 등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사형폐지국가 선포식 준비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10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사형제폐지국가 선포식을 가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 안경환 국가인권위원장, 유인태 국회 행정자치위원장, 국제앰네스티 마틴 맥퍼슨 국장이 함께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무렵 사형 확정자 52명을 전원 무기징역으로 감형하려 했지만 관계당국의 완강한 반대로 재임 중에 3명만 감형하는데 그쳤다”고 말을 꺼냈다. 김 전 대통령은 “아무튼 재임 중 단 한 건의 사형집행도 하지 않아 오늘 영예로운 선포식을 갖게 된 데 기여해서 매우 기쁘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미 세계 131개 국가가 법적으로 사형제도를 폐지하거나, 10년 이상 사형을 집행하지 않음으로써 사형폐지 국가가 됐다. EU는 그 가입조건으로 사형폐지국가라는 자격을 요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 권영길, “법적 사형집행은 없어졌지만”< /b> 선포식에 참석한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선후보는 “이 나라에서 정치적 사형은 사라진 지 오래됐고 법적 사형집행도 사실상 없어졌다”며 “그러나 이 나라에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사형제도가 있다. 경제적 살인, 사회적 살인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했다. 사회양극화와 비정규직 확산, 고금리와 빈곤이 경제사회적 사형 집행인이 됐다는 것이 권 후보의 지적이다. 그는 “이제는 경제사회적 사형을 없애는 길에 이 자리에 모인 분들이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마틴 맥퍼슨 국장(국제엠네스티 국제법 및 국제기구 담당)은 “지난 10년 동안 한국이 사형 집행이 없었던 국가임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유예국이라고 평가한다”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최근 사형제 폐지 지지를 표명한 만큼 한국이 유엔의 사형제 폐지 결의안 투표에서 찬성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는 “OECD 국가 중 사형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과 미국·일본뿐”이라며 “한국이 사형폐지국가에 속히 들어서기를 바란다” 고 덧붙였다. 이날 선포식 준비위원회는 선포문에서 “사형제도는 인간의 생명권을 국가가 직접 침해하는 반인권적 형벌이고 현대 형벌이 지닌 ‘교화’의 기능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며 범죄발생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회의 불완전 요소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범죄자에게 전가하는 비겁한 행위”라고 밝혔다. 이들은 최근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인혁당 사건’을 예로 들며 사법살인과 오판을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사형폐지국가 선포식 준비위원회는 11월 21일 ‘언론보도가 사형제도 여론에 미친 영향’에 대한 세미나를 열고, 오는 12월 30일 오전 10시 1분 서울광장에서 ‘대한민국, 사형폐지국가 선포 축하행사’를 열 계획이다. <오재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