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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팔레스타인은 이라크의 미래다

[서평] 조 사코 만화 <팔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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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8호 ⁄ 2007.10.15 12:01:52

이스라엘의 영토는 아니지만 이스라엘이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땅, 이스라엘의 폭력과 그에 대한 저항이 일상화된 곳. 하지만, 그 ‘폭력’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이 어줍잖은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일찍이 <쥐>라는 만화를 통해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그린 바 있는, ‘최후의 제국’ 미국의 만화가 조 사코는, 그냥 중얼거리는 어투가 아닌 살아있는 그림으로 우리 모두의 팔을 비틀어 잡고 그 저주받은 땅 팔레스타인을 간다. 그 어떤 유명 논객의 글보다 더 뛰어난 리얼리즘적 상상력을 이렇듯 ‘잘’ 보여준 책은 나는 만나지 못했다. 이 만화책은 아주아주 정성들여 읽어야 한다. 보통 우리는 만화를 읽을 때, 글(말풍선 속에 들어 있는) 보다는 그림을 먼저 인식하면서 넘어가기 때문에 글씨만 있는 책보다는 빨리 읽는다. 하지만 이 책은, 글만이 아니라 그림도 읽어야 한다. 그것도 반드시. 조 사코는 거의 모든 장면들을 사진을 찍고 그것을 만화로 표현했다. 사진보다 만화가 오히려 더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 그것은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강조해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어떤 장면의 진실을 드러낼 줄 알면서도 그 장면 자체의 의미를 논하는 방식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 팔레스타인은 이라크의 미래다 < /b> 조 사코는 상황을 비극적인 상황을 지극히 ‘건조하게’ 표현한다. 그도 그럴 것이 끔찍한 상황들을 감정에 기대어 풀어놓았다가는 도저히 ‘감정’의 폭주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는? 독자들은 스스로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접하고 진실을 알기 이전에 작가의 감정 대한 유효 혹은 무효의 개인적 기준에 따라 이 책을 집어던지거나 아니면 근거 없는 ‘분노’만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조 사코는 영리하다. 마치 우리가 매일 만나고 있는 수구 세력이 나날이 정교해지는 논리로 우리들에게 도전 하듯이. 하지만 덕분(?)에 우리는 ‘진실’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고, 감정적이기보다는 이 모든 사태의 본질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서구 특히 미국 미디어의 여론조작을 욕하지만, 한편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테러(?)’가 올바른 방법은 아니라는 정도의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우리 주인공은 팔레스타인 땅을 스스로 거닐면서 ‘사태’가 미국인들이 생각하듯이 이분법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간다. 조 사코는 그 경험을 만화라는 매개체로 표현해 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상식’과 ‘원칙’을 여지없이 깨부순다. ■ 그가 ‘팔레스타인’에서 본 것은 과연 무엇일까 < /b> 어느 집에나 이스라엘군이나 친(親)이스라엘 민병대에 의해서 죽거나 구금되어 있지 않은 가족이 다 없는 집이 땅, 자신의 가족을 죽인 자를 처벌은 커녕 고발할 수도 없는 땅, 감옥에 갔다 오지 않은 경험을 지닌 20대를 찾을 수가 없는 땅, 일상적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의 재산을 이스라엘 정착촌민들과 그 군대가 그야말로 ‘일상적으로’ 도둑질 하는 땅, 제대로 된 기본생활 즉 의식주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고 노동력의 반이 실업상태에 있는 땅.

법이라는 것이 오로지 유태인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며 그들의 하느님과 팔레스타인인들의 하느님은 다른 것이라 강요되는 땅, 자신의 역사를 교육할 수 없는 땅, 목숨을 걸고 시위를 하고 한 줄 뉴스로도 보도되지 않는 죽음이 성행하는 땅, 그만 하자. 도대체 이런 곳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일제시대라 해도 이보다는 인간적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라는 뇌가 없는 나라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더 나아가서는 아랍의 민중 전체를 아우슈비츠에 몰아넣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나치의 아우슈비츠의 살인시계는 속도가 매우 빨랐던 것에 비해 이스라엘의 그것은 조금 천천히 가고 있을 뿐이다. 이런 현실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봉기(인디파타)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들이 처한 상황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억압의 총집결체이며,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알기 위해서 행(行)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이다. ■ 일상화된 폭력 혹은 폭력화된 일상 < /b> 조 사코가 말해주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평범한 인민들에게 폭력은 단지 ‘군인들의 문제’일 뿐이다. 물론 시민이면서 군인들인 사람이 많기도 하고, 예루살렘 시가지의 자살폭탄과 같은 폭력(은 무슨 얼어 죽을)에 노출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예외적이며, 일상과 분리되어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폭력은 많은 관심사 중에 하나일 뿐이며, 절박한 관련이 없는 하나이다. 그래서 그들은 ‘평화’라는 것을 간절히 원하면서도 동시에 안정적인 ‘점령’을 원한다. 이 불구대천의 두 가치는 이스라엘 노동당이라는 정치세력의 엽기 발랄한 행보를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그 일상이 과연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도 일상일 수 있을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평화를 촉구하는 ‘평화시위’를 벌이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평화’를 위해 온 몸을 던져야 한다. 팔레스타인의 ‘보통’사람 모두는 ‘일상적인’ 폭력과 살해, 파괴에 직면하고 있다. 이것은 팔레스타인 인민의 자발적인 봉기, 따라서 ‘피 흘림’이라는 것이 바로 삶의 현실이 되는 ‘봉기’의 정치다. 하지만 단지 결과가 인디파타 뿐인 것일까? 이스라엘의 폭력만이 아니라 ‘인디파타’의 대응폭력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을 파괴한다. 더 우울한 것은 어린이·청소년들의 경우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조직화된 야만에 대항해서 봉기하는 것밖에 배울 수가 없고 다른 훈련의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부터 폭력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진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스파이로 고용한 동족들을 고문하고 살해하며, 민족해방운동의 정파들끼리도 서로 폭력을 주고받는다. 여성에 대한 억압은 보편적 정서에 가깝고, 민족해방운동은 여성억압적인 이슬람 원리주의와 교접한다. 그리고 평화를 촉구하는 수준의 시위조차 실탄이 날아다니는 이스라엘의 폭력과 맞닥뜨릴 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무엇이 있을까. 다시 말해 폭력과 대응력이 폭력의 순환고리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진실’이지만, 폭력 자체에 대한 반대가 또 다른 폭력에 직면하고 불가능해질 때, 대응력의 위치는 소실된다. 영국은 인도인을 모두 학살할 수 없었지만, 이스라엘과 미국은 팔레스타인인을 절멸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코소보·팔레스타인에서 우리는 이미 그것을 목격하였거나 구경하고 있는 중이다. ■ 팔레스타인의 거울에 비춘 이라크< /b> 팔레스타인은 인류적 양심의 경계선 상에 놓여 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는 민족개념의 소실이라는 문제와 어우러져 있다. 현재의 신자유주의 세계체제 아래에서 상대에 대한 극단적 배제라는 폭력이 일상화된 폭력을 장려하고 심지어 이스라엘과 같이 국가적 차원에서 행하여진다. 폭력의 순환고리 만이 존재하는 곳에서 가능한 것은 단지 ‘폭력들’뿐이다. 물론 오히려 이 때문에 ‘반(反)폭력’이 더 절실하다. 팔레스타인 일부 정파의 대항폭력(흔히 ‘테러’라고 손쉽게 규정되어지는 것)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폭력’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해서, 이스라엘의 극우강경파들이 벌이는 학살의 축제를 정당화 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립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스라엘 노동당 같은 소위 중도파들도 그들의 국가가 보유한 극우파보다 나을 것이 없다. 그러므로 유럽·미국 등지에서 벌어지는 반전시위는 분명, 어떤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이런 ‘투쟁(이라기보다는 투정에 가까운)’은 폭력의 위협을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극히 피동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국가테러리즘 피해자들에게는 어떤 희망이 있는가. 반전시위의 명분을 실어주기 위한 ‘평화적인 자제’를 말하는 이들이 많다. 삶과 죽음의 문제조차 자신의 선택이 되지 못하고 외부에서 강제적으로 주어질 때, 폭력 이전에 ‘인간’은 이미 소멸한다. 그렇다면 반폭력 혹은 평화를 강제하는 힘은 이 세계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팔레스타인>은 폭력이 만연한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가장 우울한 질문을 던진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억압이 존재하는 곳에도 봉기하는 인민대중이 있고, 조 사코와 같은 ‘거룩한 관찰자’들이 그래도 존재하니까 말이다. 우리는 과연 이 폭격과 광기의 신세기를 알고나 있는가. 제국의 지배 하에서 일상화된 ‘폭력’을 소멸시키기 위한 답은 이제 우리에게도 다가왔다. 팔레스타인의 구원 없이는 우리도 구원받을 수 없다. “나의 종교는 목숨이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 콜도프스키 <유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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