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들은 고소득 단계에서도 성장률이 떨어지지 않았다. 반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의 하락 속도는 선진국들은 물론 비슷한 발전단계에 있는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빠르다. 성장활력을 시급히 되살리지 않고서는 선진국 도약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선진국은 경제성숙화 과정에서 총투자나 설비투자의 GDP 대비 비중이 일정 범위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었다. 최근 우리 경제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투자주도형 성장패턴으로 경제 재도약을 이루기는 어렵다는 점을 시사한다. 대안은 저출산·고령화라는 요소투입 측면의 강력한 성장제약을 극복함과 동시에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최근 10년간 좋은 경제성과를 보인 선진 9개국의 유형을 요소투입 주도형, 생산성 주도형, 유기적 성장형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요소투입 증대는 그것이 영속적으로 이루어지거나 생산성 레벨 업을 견인하는 수준까지 이루어지는 경우에만 성장잠재력을 높일 수 있다. 성장활력 재점화를 위한 정책의 핵심은 혁신과 개방이다. 또한 혁신이나 개방 정책이 요소투입 증대와 생산성 향상을 통해 잠재성장률을 높이는 데는 구조개혁이 수반되거나 전제되어야 한다. 단기적으로 성장률 수치를 끌어올리는 노력은 후유증만 낳을 뿐이다. 경쟁을 촉진하고 자원배분의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구조개혁과 아울러 실효성 있는 혁신정책과 능동적인 개방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만 성장잠재력을 높일 수 있다. ■ 왜 지금 성장이 문제인가? 한국 경제의 성장률 하락세가 뚜렷하다.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은 1970년대 8.3%에서 80년대 7.6%로 떨어졌다. 하락세는 1990년대 6.1%, 2000~2006년 5.2%로 이어졌다. 이 같은 성장률 하락은 일시적 현상이라기보다 성장잠재력의 위축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일쇼크나 외환위기, 카드사태 같은 단기적인 대내외 충격 탓으로 돌릴 수 없는 중장기 흐름이기 때문이다.
최근 BRICs의 고도성장에는 ‘후발자의 이득’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BRICs의 성장 원천은 과거 우리 경제가 그러했듯이 ‘영감(inspiration)’보다는 ‘땀(perspiration)’이었다. 국제분업구조 상 지위나 경쟁환경을 감안할 때 우리 경제의 진로설정에 벤치마크로 활용하기가 곤란한 것이다. 둘째, 향후 성장여건 측면에서도 BRICs에 비해 선진국들이 우리와 공유하는 부분이 더 많다. 한국 경제의 잠재성장률 하락의 원인들로 지목되는 고령화, 저출산, 경제주체들의 리스크 회피 성향 등의 메가트렌드는 선진국들에서 먼저 출현했다. 이 같은 리스크 요인들에 한발 앞서 대응해온 그들의 경험은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우리 경제의 성장률 하락 속도가 과연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성장 둔화를 경제성숙화에 수반되는 내재적 경향으로 치부할 경우 미온적인 대응에 그치게 될 우려가 있다. 반대로 실제 이상으로 비관적인 진단을 내리고 단기대응에 급급할 경우 인플레이션, 재정불안 등의 부작용을 초래할 공산이 크다. 사실 우리 경제의 2000년 이후 성장률 5.2%는 선진국 기준으로 보면 꽤 높은 수치이다. ‘선진국 클럽’이라고 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들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990년대 2.6%, 2000년대 전반 2.4%였다. OECD 회원국들과 BRICs 중에서 성장률 순위를 매겨보면 한국은 2005년 현재 5위로 여전히 상위권에 위치해 있다. 첫째, 성장률에서 중요한 것은 수준이 아니라 변화 방향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장률이 2%에서 4%로 오르는 경우가 8%에서 5%로 떨어지는 경우보다 경제에 더 큰 활력을 줄 수 있다. 성장 속도의 하락은 소비심리 위축, 투자 감소, 실업률 상승 등의 부담을 초래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유례가 없는 성장률 하락세를 경험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최근 10년간(1995~2005년) 경제성장률은 4.4%로서 직전 10년간 8.7%에서 무려 4.3%p 하락했다. 중진국과 선진국을 통틀어 하락 폭이 가장 크다. 둘째, 성장 둔화가 계속된다면 ‘선진국 따라잡기’가 불가능해진다. 경제성장의 목적은 국민 생활수준의 향상이며, 목표는 선진국의 생활수준이다. 국민 생활수준의 차이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상대적 및 절대적 격차를 통해 가늠해볼 수 있다. 먼저, 선진국 또는 선진국가군의 1인당 GDP 수준을 100으로 놓고 우리나라의 1인당 GDP 수준의 시기별 변화를 살펴보면, 선진국 따라잡기가 차질 없이 진행중인 것으로 나타난다. OECD 주요 회원국 23개국이나 일본과의 상대적 격차는 외환위기 직후를 제외하고는 계속 축소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와 BRICs의 상대적 격차는 꾸준히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절대적 격차를 보면 낙관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최근 4~5년간 선진국 추격의 모멘텀이 약해진 모습이 완연하다. 최근 들어 미국 등 일부 선진국들과의 격차는 줄어들기는 커녕 확대되기 시작했다. 일본과의 격차는 거의 그대로이며, 중국의 추격은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전반적으로 선진국들과의 소득격차는 여전히 크고, 추격의 속도가 떨어지고 있는 양상이다. ■ 최근 선진국 경제성장의 특징 첫째, ‘경제가 발전하면 경제성장률은 점점 떨어지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적어도 지금의 선진국들은 그렇지 않았다. 2005년 말 현재 1인당 GDP 3만 달러(경상환율 기준)를 돌파한 19개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5,000~1만 달러 시기 2.8% ▲1만~2만 달러 시기 2.9% ▲2만~3만 달러 시기 3.0%로 탄탄한 흐름을 보였다. 4만 달러를 달성한 7개국도 ▲5,000~1만 달러 시기 2.8% ▲1만~2만 달러 시기 3.3% ▲2만~3만 달러 시기 4.1% ▲3만~4만 달러 시기 3.0% 등으로 대체로 안정적인 성장을 이어갔다. 그런데 한국의 성장률은 ▲5,000~1만 달러 시기(1989~1995년) 8.0%에서 ▲1만 달러 이후 시기(1996~2005년) 4.4%로 크게 떨어졌다. 고속성장 이후의 성장 둔화는 후발 고도성장 국가들에게 공통된 현상이다. BRICs 이전의 대표적인 후발 고도성장 사례였던 신흥공업지역(NIEs)이 전형적으로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문제는 그 중에서도 한국의 성장 둔화 폭이 단연 최대라는 점이다. 둘째, 선진국들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총투자율이나 설비투자의 GDP 대비 비중은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 OECD국가들의 총투자율은 불변가격 기준으로 25% 안팎에서 움직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경제개발 착수 이래 가파르게 상승해 80년대 말~90년대 말 30%를 웃돈 적도 있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계기로 급락한 뒤 30%선에서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BRICs의 경우 80년대 이후 줄곧 총투자율이 한국보다 낮았으나, 최근 1~2년 사이 30%선을 넘보면서 추월 기미를 보이고 있다. 이상의 사실들을 감안할 때 대체로 30% 선을 총투자율의 장기 상승 한계로 간주할 수 있다. 한편 GDP 대비 설비투자의 비중은 총투자율에 비해 국가 간 편차가 크다. 선진국들의 경우 70년대에 10%선에서 6%대로 내려앉는 큰 폭의 조정을 겪은 뒤 6~8% 선에서 소폭의 등락을 거듭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70년대 초 4%선에서 상승하기 시작해 외환위기 직전 15%를 넘어서기도 했으나 외환위기 이후 10%선으로 하향안정화되어 가고 있다. 총투자율과 설비투자율이 일정 수치를 중심으로 등락하는 것은 ‘산출 대비 자본투입 비중이 일정 수준을 유지한다’는 칼도어의 경험칙(Kaldor’s facts)의 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연평균 설비투자 증가율은 ▲1971~1980년 19.6%, ▲1981~1990년 12.1%▲91~2000년 6%, ▲2001~2006년 2.2% 등으로 급감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투자부진은 성장활력 둔화의 주 요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 경제에도 칼도어의 관찰이 들어맞는다면 다른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즉 이 같은 투자부진의 상당 부분은 우리 경제의 성숙 과정에서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할 경향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볼 때 한국 경제의 진정한 문제점은 투자가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 투자부진을 극복하고 우리 경제를 재도약시킬 수 있는 새로운 성장 메커니즘이 아직 정립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약 10년간의 과잉투자 시기에 뒤이어 터진 외환위기는 우리 경제가 투자주도형 성장방식이 더 이상 맞지 않는 단계로 성장했다는 점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혁신주도형 경제’이든, ‘지식기반경제’이든 새로운 성장 메커니즘으로의 전환을 요구 받고 있는 것이다. 셋째, 최근 선진국들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노동투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자본투입은 상대적으로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저출산 및 고령화 추세가 강력한 성장 제약 요인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특히 선진국 가운데서도 그간 성장이 부진했던 나라들이 노동투입을 늘리는 효과적인 정책 대응으로 성장활력을 재점화시킨 사례가 적지 않다. 넷째, 2005년 현재 1인당 GDP가 3만 달러 이상인 선진국들에서는 노동생산성이 소득수준 향상에 따라 꾸준히 증가해왔다. 하지만 그 증가 속도는 점차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성장률(=노동투입 기여도+노동생산성 기여도)에서 차지하는 노동생산성의 비중도 점차 하락하는 추세다. 이는 노동생산성 향상이 힘겹게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 90년대 이후 일부 국가들에서 노동투입 증가율이 크게 높아진 사실을 반영한다. <박천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