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 중 제대로 대선에서 중립을 지킨 대통령은 거의 없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승만 정권은 4대 대선에서 노골적으로 부정선거를 자행해 4·19혁명을 촉발시켜 끝내 하야하는 대통령이 되었다. 그 후의 대선에서도 부정선거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우선, 10월 유신으로 가는 마지막 대통령 직선제 선거였던 지난 1971년의 7대 대선은 박정희 후보와 김대중 후보간의 대결로 진행됐다. 이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이후락이었는데, 미 국무부 정보조사국이 1970년 12월 28일 작성한 비밀보고서 ‘정보 노트’에는 이후락의 정치적 역할을 “박 대통령이 내년 선거를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적임자로 이후락을 지목해 중정 부장에 임명한 것”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1971년 7대 대선 - 중앙정보부의 ‘풍년사업’ 이후락의 대선 임무 중 하나를 소개하면, 중정은 김대중 연설 청중 숫자에 대한 보도통제를 실시했는데, 중정 차장보 등이 직접 동아일보를 드나들며 김대중의 선거 유세에 인파가 몰리는 사실이 보도에 부각되지 않도록 노력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4.27 선거를 열흘 앞두고 기자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정보요원의 신문사 출입금지’, ‘정보부의 언론간섭 중지’를 결의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풍년사업’이라는 중정 문건에 따르면, 중정 요원이 도쿄에 거주하는 조00이라는 인물을 접촉해 당시 김대중 후보의 주요 선거공약이었던 ‘남북교류, 4대 강국에 의한 불침 언약, 예비군 폐지, 학원교련 중지 선동’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눈 후 “71년 4월 21일 야간을 이용해 전화로 자기 가문에는 김대중을 지원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고 확약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문건은 ‘풍년사업’이 ‘이후락 중정 부장이 평양에 다녀온 직후인 72년 5월 경부터 준비한 유신공작’이라는 기존의 인식을 바꾸는 중요한 자료다. 이 문건에 근거한다면, 풍년사업은 72년 5월이 아니라 이미 71년 대선 이전부터 상당히 오랫동안 준비된 중정의 공작이다. 결국 박정희 정권하 중정의 유신공작 구상은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것보다 앞당겨져야 할 것이며, 71년 대선 개입은 보다 넓은 시지평을 가진 ‘풍년사업’의 다양한 공작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87년 13대 대선 - 안기부 ‘상록사업’공작 지난 71년 대선이 10월 유신으로 명맥이 끊긴 마지막 대통령 직선제 선거였다면, 87년 대선은 10월 유신에 의해 도입된 반민주적 대통령 간선제가 아래로부터 민주적 압력에 의해 폐지된 후 실시된 첫 번째 선거였다. 동시에 민주화 이후 첫 번째 대선은 중앙정보부에서 국가안전기획부로 명칭을 변경한 정보기관이 다시 대통령 선거를 총괄적으로 주도하고 관리한 첫 번째 선거로 기록됐다. 13대 대선에서 패배한 직후 평화민주당은 ‘조작된 승리를 고발한다’라는 제목의 백서를 발간한 바 있다. 이 백서는 13대 대선을 선거라기보다는 내무부·지자체 등 행정조직과 정보기관·군·선관위·농협 등 정부 산하기관까지 동원된 공작이요 위조된 작품이었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개 자료 중에서 주목할 것은 한 전직 안기부 직원이 87년 대선 당시 안기부가 선거대책반을 운영했으며 야권 후보를 비방하는 유인물을 뿌린 적이 있다고 증언하고 있는 내용이다. 안기부는 공식적인 선거대책반 이외에도 안기부 특보팀에 있었던 박철언을 통해 대선에 개입했다. 박철언은 ‘월계수회’라는 비공식 사조직을 조직해 노태우 후보의 당선을 위하여 선거에 개입했다. 그가 ‘노태우를 위한 특공대’라고 명명한 ‘월계수회’는 87년 8월 20일부터 사무실을 열고, 선거운동에 투입될 사조직 요원 양성과 노태우 후보 유세 청중 동원 등의 활동을 했다. 13대 대선과 관련된 안기부 문건들은 대부분 ‘상록사업’이라는 제목으로 작성되어 있다. 즉 안기부는 ‘상록사업’이라는 공작명으로 13대 대선을 조직적으로 주도하고 관리한 것이다. 상록사업과 관련된 일부 문건들의 제목이 ‘일일보고’와 ‘주간 추진동향’등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안기부가 일자별·주간별로 13대 대선공작 상황을 정리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했음을 보여준다. ■1995년 15대 대선 - 색깔론 음모 ‘북풍사건’ 역대 선거마다 등장했던 색깔론은 특정한 정치인이나 정치세력이 선거에 당선되는 것을 막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정보기관이 이를 이용해 선거에 영향을 준 것으로 밝혀진 사건이 97년 15대 대선시기 발생한 일련의 북풍사건이다. 북풍사건은 국민회의 고뮨이었던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이 96년 8월 월북한 것을 빌미로 선거일 직전까지 김대중 후보에 대한 타격을 겨냥했던 오익제 편지·김병식 편지·김장수 편지등 3건의 서신과 안병수 회동사건·북한지원설 폭로사건 등 이른바 ‘3신 2사’를 통칭한다. 오익제 편지는 97년 11월 20일 오익제의 평양발 서신으로 “이북의 여러 인사들도 김대중 선생의 대승을 기원하고 있다. 선생께서도 이북의 영도자와 합의해 통일을 성취하겠다는 것으로 안다”고 적혀 있었다. 당시 새청치국민회의는 북한의 낙선공작이라는 이유로 편지도착 사실을 비밀로 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안기부는 이를 공개하고 필적 확인을 거쳐 오익제의 친필이라고 발표했다. 국민회의 김원길 정책위 의장 앞으로 온 중국 베이징 거주 김장수 명의 편지에는 “김대중 후보를 북한이 적극 지지하며 집권하면, 같이 손잡고 연방제 통일을 실현하길 바란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으며, 97년 12월 7일에는 북한 사회민주당 김병식 위원장 명의의 편지가 각 언론사에 팩시밀리로 송달되었다. 이 외에도 한나라당 정재문 의원은 지난 97년 11월 두 차례 베이징을 방문해 북한의 대남 공작책임자인 안병수 조평통 위원장과 비밀회동을 가졌으며, 재미 사업가 윤홍준은 대선 1주일 전 중국 베이징과 일본 도쿄 및 서울에서 차례로 기자회견을 갖고 “김대중 후보가 북한 김정일의 자금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선 후의 수사에 따르면, 윤홍준이 안기부로부터 금품을 수수하고 기자회견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새정치국민회의는 대선에서 정권교체에 성공한 후 발간한 ‘제15대 대통령선거 백서’에서 북풍사건에 대해 ‘한나라당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판세를 뒤집기 어려워지자 북한과 안기부를 이용하여 국민을 현혹시키기 위해 정략적으로 색깔론 음모를 기도한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검찰도 북풍사건에 대한 수사결과 발표를 통해 “이번 북풍사건의 본질은 지난해 대선기간 중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한 북한의 대남 정치공작과 이를 역이용한 안기부의 정치공작이 결합된 사건으로 밝혀졌다”고 결론지었다. 이 사건은 99년 4월 대법원이 권영해 전 안기부장에 대한 상고심에서 징역 5년과 자격정지 3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김원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