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산업의 이익단체인 협회의 ‘반란’이 이어지고 있다. 반란의 주체들은 주로 대기업의 하청업체 등 약자들이다. 생존을 위해 ‘단일행동’을 무기로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최근 레미콘 업계와 건설업계, 주물업계와 자동차 업계 등에서 나타난 납품거부가 대표적인 예다. 지난달 전경련 회장단과 중소기업중앙회 회장단 간의 전격적인 회동이 있었다. 중소기업계는 납품단가의 즉각적인 인상은 없지만 대기업의 책임 있는 문제해결 의지를 확인한 만큼 더 이상 산업계가 나뉘어 대립하는 인상을 주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런 사태는 언제든지 다시 불거질 수 있어 대기업들은 긴장하고 있다. 과거 대기업의 횡포에 정부개입을 촉구하거나 각종 단체를 통해 제도개선을 요구하는 등 간접적으로 대처했던 방식에 비하면 크게 달라진 모습이다. ■대기업 “물리적 담합 문제 있다” 중기 “수요와 공급 시장원리 무시돼” 이 같은 충돌은 왜곡된 유통구조를 바로잡는 측면도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시장의 질서를 무너뜨린다는 반론도 나온다. 수요와 공급의 논리가 아닌 힘의 논리가 시장을 지배할 수 있다는 우려다. 또한 이런 상황이 심각해지면 대기업이 중소기업 분야에 진출, 수직계열화하려는 움직임도 예상된다. 대기업 관계자는 “중소 하청업체들의 반란은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면서 “그러나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물리력으로 얻어내려는 의도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시장의 변동에 자기개발 노력을 회피하고 대기업에 기댄다면 궁극적으로 제살 깎아먹기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중소기업계의 생각은 다르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관계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수직계열화돼 있어 수요와 공급의 시장원리가 작동되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집단행동에 나서겠느냐”고 말했다. 이러한 충돌은 앞으로도 더 심각해질 전망이다. 당장 국제 원자재 가격의 후유증이 건설업계와 주물업계에 나타났지만, 식품업계·유통업계에도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대형 할인매장에 납품하는 중소기업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현재 유통업계가 가격결정에서 일방적 우위에 있지만, 중소 납품업계가 특정 유통업체를 표적으로 삼고 제품 공급 중단 등의 실력행사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식품업계 역시 같은 상황을 맞고 있다. 민간 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최근 주물업체, 레미콘 업체 그리고 아스콘 업체의 단가인상 요구는 새로운 시장질서가 만들어지는 단초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며 “과거 대기업의 횡포에 아무 말 못하던 중소기업이 간접적인 제도개선 요구 대신 직접 행동에 나선 것은 그만큼 시장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이 연구원은 “집단행동이 법에 저촉되거나 시장을 왜곡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면서 “그러나 경쟁당국의 감시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정부는 개별 사안을 면밀히 검토해 대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산업 전반에 퍼지는 사회적 병폐… 사재기와 담합 전 세계적으로 원자재난이 심각해지면서 국내 산업계 전반에 ‘사재기’와 ‘담합’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담합이 뿌리 깊은 식품이나 정유업계는 물론이고, 올 들어서는 철근·레미콘·아스콘 등 건자재 업계까지 가세했다. 전문가들은 “담합과 사재기는 자재값 인상을 넘어 물가 상승에 따라 서민 경제를 주름지게 할 수 있는 사회적인 병폐”라며 “업계와 정부가 힘을 모아 반드시 근절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철강업체와 직거래하는 대형 건설사는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철근 유통업체와 거래하는 중소 건설사들은 지난해 연말부터 철근을 제때 공급받지 못해 며칠씩 공사를 중단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건설회사의 한 자재구매 담당자는 “유통상들이 제품을 다량 확보해뒀다가 고의로 건설회사에 철강업체들의 가격인상 정보를 흘리며 철근을 많이 사도록 유도하기도 한다”며 “일부 대형 건설사들이 공급차질을 막기 위해 웃돈을 주고 사들이고, 이것이 결국 시장 가격으로 굳어지는 것도 큰 문제”라고 말했다. 레미콘은 이번 공급중단 사태를 계기로 가격결정 구조에 적잖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개별 회사별로 납품가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건설사와 단체 협상으로 가격을 정하다 보니 애초에 경쟁에 따른 납품가 인하는 생각하기 힘들다. 사실상 ‘가격담합’인 셈이다. 이번처럼 업체들이 일방적으로 집단 파업에 들어갈 경우 뾰족한 대책 없이 전국의 공사현장이 마비되는 부작용도 초래했다. 이에 대해 레미콘 업계는 “영세한 레미콘사가 대기업 건설회사와 1대1로 가격 협상을 벌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단체 협상이 담합으로 비춰질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한다. 한국주물공업협동조합을 비롯한 중소 주물업계 또한 지난달 7~9일 1차 납품중단에 이어 같은 달 17일부터 3일간 다시 납품중단에 돌입했다. 부품 재고분이 넉넉하지 못한 거래 대기업은 또 다시 시작된 납품중단에 공장 가동마저 어려운 위기를 겪었다. 주물업계는 이미 지난 2월 29일 정기총회를 열고 이번 납품중단 사태를 엄중 경고했다. 그러면서 그간의 자신들 잘못도 적잖이 지적했다. 그들은 무리하게 거래처를 확보하기 위해 기존 거래업체 납품단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덤핑 행위를 하거나 개발비를 무상 제공하는 행위를 앞으로 절대 하지 않겠다고 이날 대책 결의문에 명기했다. 물론, 결정적인 요인은 어찌 보면 이들을 홀대한 대기업에게 있다. 최근 수입 고철 값이 그토록 가파른 상승세를 탔음에도 불구하고 중소 주물업계의 대기업 납품단가는 심각한 상방경직성을 띠었다. 실제로, 주물조합이 지난 10년 간의 주물제품 제조원가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원자재인 고철과 선철 가격은 각각 190%, 121%씩 급등했지만, 주물제품 가격은 불과 20~30% 오르는데 그쳤다. 또한, 중소기업중앙회가 최근 원자재 가격과 관련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2006년 대비 2007년 생산원가는 평균 13.2% 증가했으나, 납품단가는 오히려 평균 2%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소기업들의 82%가 납품단가 연동제 도입을 희망했다. 이번 납품중단 사태를 둘러싸고 전반적인 여론이 주물업계에 우호적인 이유도 바로 이런 점에 있다. 여기에 납품가격 협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일부 주물업체들의 납품 중단이 장기화될 전망이다. 한국주물공업협동조합은 지난달 25일 대구 그랜드호텔에서 비상대책회의를 열고 협상이 이뤄지지 않은 업체들은 납품 중단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회의에는 대구를 비롯한 전국 주물업체 대표 15명이 참가했으며, 완전한 납품단가 현실화가 이뤄질 때까지 비상대책회의를 계속 열 방침이다. ■계속되는 충돌…정부 사재기 근절 나서 가장 최근엔 한국아스콘공업협동조합이 정부 대전청사 앞에서 집회를 열고 납품단가 인상과 입찰 수량 제한제 부활 등을 요구했다. 조합은 아스콘 원료인 아스팔트 가격 인상분을 반영해 조달가를 1t에 1만6,000원 인상하고 예정가 산정방법을 원가계산 방식으로 전환하라고 주장했다. 또, 입찰 수량 제한제를 다시 도입해 영세업체가 입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아스콘조합 측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조달청과 계약을 해지하고 이달부터 아스콘 생산을 중단하겠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서로 한 발짝 물러서는 대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대기업은 납품가가 원가보다 낮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단가를 올려줘야 한다. 정부가 가격을 올려 민수 가격이 따라오도록 유도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각 업계는 이번 납품중단을 장기화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음을 상기하고 사태 악화를 막아야 한다. 한편, 지식경제부가 고철 및 철근 사재기 행위에 대해 2차 합동단속을 감행했다. 지난달 26일부터 28일까지 3일간 전국적으로 고철 및 철근 매점매석 행위에 대해 지경부와 국토해양부, 국세청이 2차 정부합동 단속을 실시했다. 지경부에 따르면, 이번 단속은 지난 1차 정부합동단속 실시 후에도 국제 고철 및 철근 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는데다, 본격적인 건설 성수기에 들어서면서 수급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우려되는 이유에서다. 지경부는 수입고철 가격이 1차 전국 합동단속이 이뤄진 지난달 12일 이후에도 520달러에서 579달러로 11.3% 가량 올랐다고 전했다. 정부는 이러한 단속을 앞으로도 고철 및 철근 매점매석으로 인한 유통왜곡 현상이 근절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실시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