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근 화백 개인전 ·2002 아산갤러리(서울아산병원) ·1999 갤러리 서호(인사동) ·1992 청작화랑(서울 논현동) ·1989 현대미술관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공간의 생산전(성남아트센터) ·21세기 한·불대표구상작가 총람전(서울 예술의 전당) ·06 korea art classic in China전(중국 섬서성 미술박물관) ·코리아아트페스티벌(세종문화회관) ·한국미술정예작가 초대전(미국 워싱턴 조지메이슨대학 미술관) ·현대 한국화 20인전 초대(갤러리 삼성) ·서울 화인트페스티벌(예술의 전당) ·아시아의 혼(서울시립미술관) ·분당미술제(성남아트센터) ·한국미술세계화 LA전(LA한국문화원) 약력 ·목우회 심사위원 역임 ·성남시 문화예술상 공로상 수상 ·분당미술제 운영위원 ·분당작가회 부회장
글·고충환(미술평론가) 조화(造化)의 조화(調和), 자연의 이치가 서로 잘 어우러진 형국이란 뜻이다. 서성근의 그림에는 인위적인 형상이 없다. 새, 물고기, 나무, 개구리, 꽃 등 천지 자연의 이치에 의해 생성된 물상들로서, 그 물상들이 작가의 심적 동인에 의해 화폭에서 조우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아름답다. 단대의 미적 욕구가 여하한 변천을 겪더라도 자연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은 어떤 척도로서 원초적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꽃이고, 나무이며, 허공의 새이며, 강의 물고기인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아름다움에서 아름다움을 일궈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즉, 아름답게 눈에 비쳐지는 것들을 종이 위에 번안해내는 식이다. 대지의 표피층을 수 놓은 꽃들이 허공(여백) 가득 메아리치는 듯하다. 또한 허공이, 하늘이 꽃들에 조우하는 듯 꽃들의 자장 안으로 빨려드는 듯하다. 꽃들의 기운을, 물 속의 물고기의 유유함을, 옹기종기 모여앉은 개구리들의 자태를 모사하는데 있어서 원근감이나 어떤 시점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들을 더욱 극대화시키거나 그것들답게 보이도록 하는 게 작가의 작업이다. 북송의 선화화보 화조 서론에는 ‘시인들이 새, 짐승, 초목 등의 자연을 노래하며, 회화의 오묘함은 자연에 감흥을 기탁하는 경우가 많으니, 따라서 시인의 이로가 화가의 업은 상호간 표리의 관계를 이루는 것’이라 적고 있다. 굳이 이러한 특정 화론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동양의 전통적인 회화 관념은 근본적으로 자연에 대한 이해와 해석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모든 존재가 자연으로부터 나서 재차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그럼으로써 자연에 존재의 궁극적인 근거를 드리운다는 관념이야말로 생래적으로 자연친화적일 수밖에 없는 동양인 특유의 정서를, 세계관을, 자연관을 반영하고 있다. 시인이 자연을 노래하거나 화가가 자연을 이미지로 옮길 때, 단순히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자연의 감각적 외물을 대상화하지는 않는다. 대신 감각적 외물 이면에 존재하는 자연의 궁극적인 실체를 지향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단번에 그 실체에 도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더욱이 이때의 실체란 것이 보기에 따라서는 임의적이거나 가변적일 수 있다. 자연에 대한 주체의 시각과 시점이 일정할 수 없으며, 이렇듯이 일관되지 않은 주체의 관점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결국 자연을 앞세운 주체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자연의 실체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엄밀하게 말해 이때의 다양한 실체들이란 실체가 아니다. 혹은 최소한 실체와는 다른 어떤 것이다. 실체란 궁극적인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궁극적인 실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신 그것은 인간의 관념이 만들어낸 순전한 환상일 수도 있다. 결국 실체란 논리적인 귀결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기보다는, 차라리 감각적인 접근 특유의 순간순간 가변적일 수밖에 없는, 자연에 대한 작가의 개별적인 반응과 감흥을 포착하고 기록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사실상 관념과 감각의 이분법적인 구분이 알려진 바와는 달리 그렇게 뚜렷하게 구별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더욱이 특정의 관념을 드러나게 하는 형식이 감각이란 점을 이해한다면, 관념과 감각이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는 관념적인 그림과 감각적인 그림이 그 근본에서 서로 다른 것이라는 편견이 존재해 왔음이 사실이다. 관념적인 그림과 감각적인 그림을 나누는 근거는 비중과 경중의 문제이지 본질적인 곧 존재론적인 문제는 아닌 것이다. 자연의 감각적 외관이 그것의 관념적 실체와 같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것도 아니다. 결국 작가는 감각적인 형식을 빌어 자연친화적인 삶의 관념을 노래하고 형상화하는 시인이자 화가인 셈이다. 이러한 사실의 인식으로부터 시인으로서의 작가가 자연을 노래하는 또 다른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다름아닌 삶의 관념을 노래하고 형상화하며, 그 근거를 자연으로부터 견인해 온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특히 낭만주의와 상징주의 예술가들에게서 확인된다. 낭만주의 예술가에 있어서 자연이란 인간적인 것이 유비이며, 따라서 인간에 기원하는 정신적인 가치와 성질을 갖는 어떤 존재이다. 인간적인 것을 자연 고유의 생명(성)에 환원시켜 설명하는 것이다. 더욱이 자연이 스스로의 상징적 의미를 드러내는 데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인격을 자연에 일치시키는 낭만주의자의 태도에서는 동양인 고유의 관념적 색채마저 느껴진다. 그리고 상징주의 예술가에 있어서 자연이 인간이 처한 보편 상황을 은유한 상징이 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낱 풍경이나 정물조차도 풍경이나 정물 이상의, 인관과 관련한 의미작용으로서의 기능을 갖지 않음이 없다. 서성근의 작업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이를테면 군집을 이룬 새떼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멀찌감치 홀로 떨어져 있는 새 한 마리가 인간의 실존적 고독과 존재론적 자아라는 보편 의식을, 그리고 하늘의 정중앙을 향해 서 있는 맨드라미가 마치 민들레가 그런 것처럼 민중의 강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식이다. 민중의 생명력은 맨드라미꽃의 선혈처럼 붉은 색채와 꼿꼿하게 서 있는 직립성에 의해 강화된다. 수탉의 볏을 상기시키는 공격성의 암시 역시 민중의 생명력과 무관하지 않다. 맨드라미 그림은 이렇듯이 민중의 상징이라는 의미론적 기능 이외에, 보기에 따라서는 그 자체 초현실주의적인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를테면 지평선 아래 부분을 가능한 생략하는 대신 대부분의 배경 화면을 빈 하늘로 채운다든지, 구름이 원을 그리며 흩어지고 모이는 중심 부위에 맨드라미꽃이 위치한다든지, 채도가 낮은 배경화면과 강렬한 원색으로 처리된 모티프의 대비 효과가 두드러져 보인다든지, 마치 클로즈업된 사진에서처럼 맥락 없이 잘려져 나간 배경 화면과 주요 모티프의 강조가 그렇다.
특히 맨드라미 이외의 다른 그림들에서도 더러 발견되는 특유의 구도법, 이를테면 낮은 지평선과 상대적으로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높거나 광활한 하늘의 설정은 전통적으로 여백(그 자체 사물의 실체에 대한 암시로 가득한 공간이랄 수 있는)에 해당하는 기능과 일치하고 있다. 이를테면 감각적인 방법으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어떤 내재적인 형식적 국면을, 예컨대 무한한 존재나 어떤 인간적인 공허함 따위를 전달하고 있다. 동시에 그 구도법은 어떤 심리적인 과장을 중폭시키거나 강화하는 특징적인 면면을 내재하기도 한다. 여하튼 이러한 모든 세부 사항들이 어떤 극적인 효과를 강화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러한 초현실주의적인 인상은 여타의 그림들에서도 일부 발견된다. 이러한 초현실주의적인 인상이 차후 작가의 작업에서 어떠한 형식으로든 더 강화되거나 어떤 의미있는 돌파구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동시에 그 자체 초현실이기도 하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그 실현은 현재 작가의 작업이 서 있는 경계 곧 사실과 재현의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주요 모티프를 여타의 가능한 상황들 속에 놓아보는 구도법을 조율함으로써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초현실주의와는 그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어떤 유아적인 나머지 차라리 동화에 가까운 모티프가 있다. 다름아닌 햇무리와 무지개의 표현이 그것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그림을 유아적이거나 치졸한 것으로 전락시킬 수도 있음으로 인해 대개 피하기 마련인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이를 무리없이 화면에 도입하고 있다. 햇무리든 무지개든 그것들이 갖는 소재적 특징이 있다면, 하나같이 현실에 토대를 둔 것이면서 동시에 특정의 추상적 관념이나 가치관에 대한 상징적 기능을 내재하고 있는 점일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 상징되고 있는 관념이란 유년 시절의 기억이나 추억, 그리고 희망이나 어떤 비전이 될 것이다. 동시에 그 자체 모든 동화가 함축하고 있는, 보기에 따라서는 반쯤은 비상식적이고 반쯤은 꿈에 가까운 어떤 전설에 일치하기도 한다. 이렇듯이 실제와 비실제의 경계 위에 애매하게 걸려 있는 것이야말로 다름아닌 초현실주의적 세계 표현의 비밀이요 관건일 것이다. 아직은 의식적이라고는 하기 어렵지만, 작가는 이러한 초현실주의적 세계 표현의 경계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대개는 인간 삶의 주요한 덕목이랄 수 있는 사랑과 우애의 메시지를, 짝을 이루거나 군집을 이룬 생명체에 의탁해 표현해내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매화나무 가지들이 마치 새둥지처럼 화면의 가장자리를 빙 둘러치고 있는 가운데 가족인 듯한 새 몇 마리가 그려져 있는 식이다. 이 그림에서는 이렇듯이 의미론적인 메시지 이외에 형식적인 면에서 주목해볼 부분이 있다. 작가의 그림이 대개 사물의 실제에 대한 사실적인 재현에 기초하면서도, 또한 그림에서처럼 관념적인 접근을 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마치 새둥지처럼 보이는 매화나무 가지 부위는 사실은 새둥지가 아닌 것이다. 결국 새가족의 어떤 성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는 작가의 관념적 욕구가 이렇듯이 특이한 구도의 설정을 가능케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작가의 그림은 대개 선염법에 의한 수묵 특유의 번짐효과로 배경 화면을 마무리한 뒤, 그 위에 몰골법에 의해 사실적으로 재현한 모티프를 놓는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일견 모티프 부위에 비해 배경 화면은 마치 담채화가 그렇듯이 상대적으로 쉽게 여겨질 수도 있는 일이지만, 사실은 수십 번에 달하는 덧칠의 과정을 거쳤다. 거의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만큼이나 자연스러운, 미세한 얼룩효과가 이를 말해준다. 작가는 일부 그림의 배경 화면에서 마치 탁본을 상기시키는 마티에르 효과를 꾀하기도 한다. 미세하게 찍혀진 전망이 그것이다. 최종 화면은 대개 추상적으로 처리된 배경과 사실적인 모티프 간의 대비가, 무채색과 원색 간의 대비가, 부드러운 화면과 강렬한 이미지와의 대비가 두드러져 보인다. 그림에 대한 이해 방식이 상대적이긴 하지만, 그림이 장식적인 어떤 것으로 흐를 수도 있는 가능성과 우회를 모르는 직접적인 메시지 전달 방식에 대해서는 차후에 숙고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