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갈 길이 멀고 할 일도 많아 아쉬움이 크지만, 지난날의 허물을 모두 떠안고 가겠습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4월 22일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경영쇄신안’ 기자회견을 통해 이같이 선언했다. 그는 이날 “20년 전, 삼성이 초일류 기업으로 인정받는 날, 모든 영광과 결실은 여러분의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돼 정말 미안합니다”라며 아쉬움을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부 시민단체들은 여전히 경영쇄신안의 실효성에 의문을 두고 있어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일부 진보단체 회원들은 경영권 승계 등의 실질적인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는 미진한 쇄신안이라며 철저하게 이행되는지 지켜보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또, 순환출자구조의 개선안을 밝히지 않은데다 불법 승계를 포기하지 않는 한 개혁안이 되지 못한다는 주장도 나와 향후 이 회장의 복귀 가능성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일단 일선에서 물러나는 이 회장. 이에 따라 삼성 후계구도와 이 회장이 빠진 삼성이 향후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 그리고 은행업 진출 등에 대한 궁금증은 해소된 것인지 총정리한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다. 그룹 후계자인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도 고객총괄책임자(CCO) 자리를 사직하고 당분간 여건이 열악한 해외로 떠나 있게 된다. 그룹 체제의 상징으로 계열사 총괄사령탑 역할을 해왔던 ‘전략기획실’이 해체되고, 전략기획실장인 이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도 퇴진한다.
■김용철發 특검… 삼성 핵심인사 줄줄이 퇴진 특검에서 조세포탈로 문제가 됐던 이 회장의 2조 원대 차명재산은 실명전환 후 누락된 세금을 내고 사회공헌 등 공익적 목적으로 활용된다. 이에 대해 이 회장은 “그 동안 저로부터 비롯된 특검 문제로 국민 여러분께 많은 걱정을 끼쳐 드렸다”며 “진심으로 사과 드리면서 이에 따른 법적·도의적 책임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로써 1987년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의 작고로 그룹 총수자리에 올랐던 이 회장은 이제 대주주 지위만 유지한 채, 삼성전자 회장과 등기이사, 문화재단 이사장 등 삼성과 관련된 모든 자리에서 손을 떼게 됐다. 이 회장 특유의 결단력으로 ‘로컬(국내) 기업’이었던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자리했지만,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 폭로로 시작된 특검 조사와 발표를 계기로 삼성의 ‘이건희 체제’가 20여 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이 회장과 함께 부인 홍라희 씨도 리움 미술관장과 문화재단 이사직을 사임한다. 다만, 이 같은 조치가 이재용 전무의 경영권 승계구도엔 변화를 주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은 이 회장이 물러나고 전략기획실까지 폐지됨에 따라, 전문경영인에 의한 계열사별 자율·독립경영 체제로 전환할 방침이다. 계열사 간에 조율·협의가 필요한 부분은 사장단협의회에서 다루게 된다. 삼성은 이 회장을 대신해 대외적으로 그룹을 대표할 인물로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을 지명했으며, 이 회장은 사장단협의회 의장 역할도 맡는다. 삼성은 이와 함께 소유·지배구조 개편도 단행, 삼성카드가 보유한 에버랜드 주식(25.64%)을 4~5년 내에 매각함으로써 순환출자구조도 점차 해소해 나가기로 했다. 이학수 부회장은 “전략기획실 해체와 사임 등 가능한 부분들은 6월 말까지 법적 절차와 실무준비를 끝내 7월부터는 차질 없이 시행하겠다”며 “삼성의 모든 임직원들은 앞으로 초일류기업 육성과 국가경제 살리기에 더 한층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고 강조했다. ■천주교 사제단, “순환출자·불법승계 반성 없다” 주장 하지만, 삼성의 이번 경영쇄신안에도 불구하고 논란은 그치지 않고 있다. 순환출자구조의 개선안을 밝히지 않은데다 불법 승계를 포기하지 않는 한 개혁안이 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사제단)과 김용철 변호사는 이 회장이 쇄신안을 발표한 다음날인 4월 23일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성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삼성특검이 삼성그룹과 우리 사회가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날려 버렸으며, 반성 없는 삼성그룹의 경영쇄신안 역시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사제단은 “특검이 삼성의 위법 사항을 경영권 방어를 이유로 모두 불구속 기소함으로써 삼성이 책임져야 할 갖가지 범죄사실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며 특검수사 결과를 비판했다. 사제단은 또 “불법행위의 근본 이유였던 경영권의 부자세습도 법적 정당성을 얻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삼성이 내놓은 쇄신안에 대해서는 “진정성이 의심된다”고 일축하며, “삼성 최고경영진은 자신들의 과오가 어떤 것이었는지 밝히지 않고 막연히 용서를 청했다”고 질타했다. 사제단은 “자신들의 불법·편법·탈법한 실상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지 않는다면 어떤 쇄신안도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순환출자구조 개선안을 밝히지 않고, 불법승계를 통해 얻은 경영권을 포기하지 않았다”고도 꼬집었다. 김용철 변호사는 특히 이건희 회장의 퇴진에 대한 물음에 “법적 구속을 피하기 위한 것일뿐 언제든지 복귀할 수 있다고 본다”고 단언했다. 특검의 무혐의 처분과 삼성그룹의 경영쇄신안 발표가 모순된다는 지적도 있었다. 사제단은 “삼성의 여러 혐의가 기업의 경영 및 지배구조를 유지·관리하기 위한 불가피한 행위였다면, 삼성은 쇄신안을 마련할 것이 아니라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편이 옳을 것”이라며 특검의 해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사제단은 “김 변호사의 증언은 새로운 질서를 목말라하는 외침이었다”며 “그 동안의 증언을 토대로 권력과 자본의 결탁사례를 세상에 알리고 호소하는 일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사제단은 또 삼성 비자금 의혹이 불거진 2007년을 경제민주화 투쟁 원년으로 선포하고 “물신 풍조에 적극 대항하지 못하고 경제적 약자들의 희생을 돌보지 못한 게으름을 참회한다”며, 24일부터 26일까지 단식 기도에 들어갈 계획이다. ■이건희 회장, 브랜드 가치 170억의 ‘월드 삼성’ 구축 일부 진보단체를 제외하면, 현직에서 물러나는 이건희 회장 퇴진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속속 제기되고 있다. 지금의 ‘월드 삼성’을 구축할 수 있는 핵심 인물은 이 회장이라는 분석이다. 사실상 이 회장 취임 당시 14조 원이었던 매출액은 2006년 말에 152조 원으로 약 11배 가까이 늘었다. 이익은 1900억 원에서 14조 2000억 원으로 75배, 주식의 시가총액은 1조 원에서 140조 원으로 무려 140배나 증가했다. 이러한 외형적인 성장 외에, 선진 경영 시스템을 도입하고 도전과 활력이 넘치는 기업문화를 정착시켜 삼성그룹의 경영체질을 강화, 내실 면에서도 세계 일류기업의 면모를 갖출 수 있도록 했다는 평가다. 1993년 이건희 회장은 삼성의 경영 전 부문에 걸쳐 대대적인 혁신을 추진하면서 혁신의 출발점을 인간으로 보고 “나부터 변하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인간미와 도덕성, 예의범절과 에티켓을 삼성의 전 임직원이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가치로 보고, 양을 중시하던 기존의 경영관행에서 벗어나 질을 중시하는 쪽으로 경영의 방향을 선회시켰다. 이 같은 노력을 통해 삼성은 1997년 한국경제가 맞은 사상 초유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에서도 줄기차게 성장했다. 2007년 현재 브랜드 가치는 169억 달러로 세계 21위, <포천>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존경받는 기업’ 순위는 34위를 차지해 명실 공히 세계 일류기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현대그룹이 가족 그룹이라면, 이건희 회장의 경영철학은 인간중시와 기술중시로 요약될 수 있다. 이는 삼성의 경영이념인 “인재와 기술을 바탕으로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를 창출해 인류사회의 발전에 공헌한다”에도 잘 나타나 있다. 무엇보다 이건희 회장은 인재의 확보와 양성을 기업경영의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 인식하고 있다. 삼성의 임직원들이 세계 각국의 다양한 문물을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지역 전문가, 글로벌 경영학 석사(MBA) 제도를 도입해 지금까지 4000여 명의 글로벌 인재를 양성했다. 그 결과, 삼성은 한국에서 젊은이들이 가장 일하고 싶은 직장으로 꼽히고 있다. 세계 유수 대학 출신의 다국적 인재들이 이곳에서 자신과 삼성의 미래를 준비해 가고 있다. 더불어, 인재 육성과 함께 이건희 회장은 기술을 경쟁력의 핵심으로 여겨 기술 인력을 중용함으로써 기업과 사회의 기술적 저변을 확대해 왔다. 사업에서는 반도체 산업이 한국인의 문화적 특성에 부합하며 한국과 세계 경제의 미래에 필수적인 산업이라고 판단, 1974년 불모지나 다름없는 환경에서 반도체 사업에 착수했다. 이후 끊임없는 기술개발과 과감한 투자로 1984년에 64메가 D램을 개발했다. 1992년에는 D램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달성하였고, 특히 2001년에는 세계 최초로 4기가 D램 개발에 성공한 바 있다. ■현대車ㆍ롯데ㆍ한화, 불똥 튀나 ‘전전긍긍’ 삼성 지진의 여파로, 삼성과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는 다른 재벌들 역시 쇄신안의 불똥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삼성의 쇄신안 발표가 총수 1인의 절대 권력과 그를 뒷받침하는 무소불위의 총괄조직 체제 종식의 신호탄이 될지가 관심거리다. 현재 주요 재벌 가운데 SK와 LG, GS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재벌들은 여전히 법적 근거가 없는 비서실(또는 기획실) 조직이 그룹 총수의 뜻을 받들어 그룹 경영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현대·기아자동차 그룹의 컨트롤 타워 역할은 1실 3담당 7팀으로 이뤄진 기획조정실이 맡고 있다. 롯데그룹의 경우, 명목상으로는 롯데쇼핑에 속한 정책본부가 비서실·홍보실·인사담당 등을 두고 사실상 그룹 경영 전반을 총괄하는 상태다. 한화그룹은 2006년 구조조정본부를 폐지하고 경영기획실을 운영하고 있다. 이에 반해, SK와 LG그룹은 지주회사를 만드는 방식으로 그룹 총괄기능을 떠넘긴 경우에 속한다. LG그룹의 경우, 한때 총수를 보좌하는 기획조정실 인력이 300명을 넘기도 했으나, 2003년 3월 지주회사인 (주)LG를 출범시켰다. (주)LG는 산하에 인사·재정·경영관리·브랜드관리·법무 등 5개 팀이 자회사의 성과관리와 브랜드 관리 등을 나눠 맡고 있다. SK그룹도 한때 경영기획실과 구조조정추진본부가 전면에 나서 그룹 경영을 총괄해 왔으나, 지난해 7월 지주회사인 SK(주)를 공식 출범시켜 사업자회사에 대한 투자를 전담토록 하고 각 사업자회사들은 독립경영체제로 운영하고 있다. 여전히 총수를 보좌하는 총괄조직을 유지하고 있는 그룹들은 삼성의 쇄신안 발표가 가져올 파장을 애써 차단하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현대차의 한 임원은 “요즘과 같은 글로벌 경쟁 환경에서 빠르고 효과적인 의사결정을 위해선 그룹 전체의 경영을 총괄하는 기능이 더욱 필요한 것 아니냐”며, “비자금 사태의 후폭풍 와중에 터져나온 삼성의 변화를 다른 그룹에도 곧바로 끌어들이는 건 좀 무리”라고 말했다. 한화의 한 관계자는 “지주회사 전환은 전혀 검토하고 있지 않으며, 삼성과 관련한 파장은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경련의 한 임원도 “오늘날의 삼성을 낳은 비밀은 강력한 리더십인데, 이 회장의 급작스런 사퇴가 투자결정 등 경영활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지 우려된다”며 “오너의 퇴진과 전략기획실 해체를 곧장 다른 대기업으로 연결 짓는 시각은 곤란하다”는 유보적인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법적 지위가 모호한 비공식 창구로 그룹 경영이 좌지우지되는데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 재벌 그룹들에 몰아치는 변화의 압력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지주회사로 전환한다 하더라도, 그룹 총수의 실제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김기원 방송대 교수(경제학)는 “지주회사는 재벌개혁과 무관하다. 지주회사를 만든다고 해도 비자금이나 총수-가신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형식적인 변화보다는 실제적으로 총수 1인 지배의 고리를 끊을 묘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