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은행들이 정부의 ‘서민경제 활성화 방침’ 요구에 따라 서민금융 시장 진출을 본격화하고 있다. 특히, 국내 시중은행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부자 마케팅에만 급급 해오던 외국계 은행들이 정기예금 최저 가입금액을 낮추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대부분 은행이 아닌 자회사를 통해 진출하는 경우가 많아 실효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금융계에 따르면, 신한은행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중은행은 이미 서민금융 시장에 진출했거나 검토 중이다. 이 가운데 가장 발 빠른 곳은 하나금융그룹이다. 하나금융은 지난달 말 자회사인 하나캐피탈을 통해 ‘미니론’이란 소액신용대출 상품을 내놨다. 최고 300만 원 한도에 금리는 신용도에 따라 연 13~37%가 적용된다. 우리금융그룹도 자회사인 우리파이낸셜을 통해 이르면 5월부터 연 20%대 금리의 대출 상품을 출시할 계획이다. 기업은행 역시 중소기업들에 주력한다는 고정관념을 벗고 서민금융 시장 진출을 공식화했다. 기업은행은 오는 6월부터 자회사인 기은캐피탈을 통해 소액신용대출 상품을 내놓을 예정이다. 영세 중소기업 직원과 영세 자영업자를 대상으로 평균 연 20% 금리로 최고 500만 원까지 대출하는 상품을 개발 중이다. 아직 신중한 태도를 지키고 있는 국민은행도 서민금융 시장 진출 자체를 부인하지 않고 시기와 방법을 놓고 저울질 중이다. 무엇보다 강정원 행장의 의지를 고려하면, 늦어도 내년 초까지는 서민금융 시장에 진출할 것으로 보고 있다. 강 행장은 지난해 “저신용 고객들을 담당할 수 있는 금융기관을 만들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신한은행은 임차 주택 규모와 상관없이 전세자금 대출이 최대 2억 원까지(생활자금 최대 1억 원 포함) 가능한 상품인 ‘신한전세보증대출’을 판매 중이다. 대상은 만 20세 이상 60세 이하 세대주로, 전세 입주 시점에 전세보증금이 부족할 경우 대출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전세로 거주하고 있으면서 생활자금이 부족할 경우에도 최대 1억 원까지 대출이 가능하다. 그 동안 부자 마케팅에만 급급하다는 지적을 받아온 외국계 은행도 예금금액을 잇따라 낮추고 있다. 홍콩상하이은행(HSBC)은 정기예금의 최저 가입금액을 3000만 원에서 100만 원으로 대폭 낮췄다. SC제일은행도 현재 200만 원인 최소 가입한도를 내리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아울러 SC제일은행의 대주주인 SC그룹은 최근 예아름상호저축은행을 인수하고 서민금융 진출 활성화를 위한 준비 작업에 한창이다.
■경쟁과당 ‘제2신용불량 대란’ 지적 체계적 접근 필요 시중은행이 밝힌 소액 신용대출 상품의 금리는 평균 연 20~30% 수준이다. 제1금융권을 이용하지 못하는 서민들이 주로 애용하는 저축은행들의 대출 금리(30%대 후반)보다 10% 포인트 낮은 수준이다. 법정 최고금리가 49%로 제한받는 대부업체들의 대출 금리보다는 훨씬 낮은 수준이다. 게다가 서민금융시장 내에서 금융회사 간 경쟁이 활성화되면, 금리가 더 떨어질 수도 있다. 금융당국이 지난해부터 은행들에게 서민금융 시장 진출을 독려한 배경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서민들의 자금 갈증을 완벽히 해소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회의적인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은행들이 자체적으로 저신용자나 서민들에게 신용대출을 하지 않고 자회사를 통해 대출에 나서는 것 역시 기존 대부업체와 크게 차별화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또, 내수경기가 악화되는 상황에서 돈을 빌릴 수 있는 창구만 넓어지면, 금융채무불이행자(옛 신용불량자)만 양산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송태경 민생연대 사무처장은 “과거 신용 카드 사태에서 경험할 만큼 하지 않았느냐”며 “시중은행의 건전성에도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송훈 국민은행연구소 연구위원 역시 “1980년대 후반에 일본의 시중은행들이 잇따라 서민금융시장에 진출했다가 실패한 사례가 있다”며 “소액대출을 위한 여신심사와 다중채무자에 대한 정보관리 노하우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재 국내 시중은행은 물론 저축은행들도 대부업체를 이용하는 저신용층에 대한 신용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해 정찬우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서민금융 부진의 원인과 대응방안’ 보고서에서 서민들의 금융소외 문제를 완화하려면 은행들이 소액 신용대출 시장에 진출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즉, 정부의 체계적인 정책이 제시돼야 한다는 의미다. 아울러, 또 다른 은행 관계자는 “저신용자에 대한 리스크 관리 능력 강화가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