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소유의 금융 공기업 기관장들이 대폭 물갈이됐다. 정부에 직ㆍ간접적으로 사의를 밝힌 기관장 16명 가운데 4명만이 재신임을 받고 10곳의 기관장이 모두 교체됐다. 나머지 두 곳은 사장자리가 공석 중이라 현재 공모절차가 진행 중이다. 재신임에 성공한 곳은 지난해 12월과 올해 1월에 취임해 재임기간이 6개월이 채 안 된 윤용로 기업은행장, 이철휘 한국자산관리공사 사장, 박대동 예금보험공사 사장 등이며, 또 지난해 6월 취임한 방영민 서울보증보험 사장 역시 이번 물갈이 인사에서 제외됐다. 반면, 박병원 우리금융지주 회장과 박해춘 우리은행장은 모두 재신임에서 탈락했다. 또 김창록 산업은행 총재와 김규복 신용보증기금 이사장, 한이헌 기술보증기금 이사장, 조성익 증권예탁결제원 사장 등도 모두 교체된다. 이에 대해 금융위원회와 재정경제부는 “재신임 여부는 임기, 정부 정책에 대한 이해도, 경영성과, 전문성 등을 고려해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재신임과 교체를 가른 명확한 ‘잣대’가 없어 ‘코드 인사’가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이와 함께 장기간의 경영공백에 따른 후유증도 점차 커지고 있는 등 벌써부터 부작용이 우려되고 있는 실정이다. 영어교육ㆍ쇠고기 파동 등 정책마다 여론의 비판을 몰고 다니는 MB 정부. 이번 공기업 CEO 인사 역시 잣대나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여론의 논란을 피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16개 금융 공기업 기관장 중 4명만 재신임하고 공석 중인 두 곳을 포함해 나머지는 모두 ‘물갈이’ 하는 선에서 가닥이 잡혔다. 금융위원회는 5월 7일 금융 공기업 CEO와 금융회사 대표 12명에 대한 재신임 심사 결과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물갈이 대상으로 김창록 산업은행 총재, 박병원 우리금융지주 회장, 박해춘 우리은행장, 양천식 수출입은행장, 홍석주 한국투자공사(KIC) 사장, 김규복 신용보증기금 이사장, 한이헌 기술신용보증기금 이사장, 정태석 광주은행장, 정경득 경남은행장, 조성익 증권예탁결제원 사장 등이 확정됐다. 반면, 윤용로 기업은행장, 이철휘 자산관리공사 사장, 박대동 예금보험공사 사장, 방영민 서울보증보험 사장 등은 재신임을 받았다. 주택금융공사와 한국조폐공사는 사장자리가 공석 중이라 현재 공모절차가 진행 중이다.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가 인사 내용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언급한 유임 기준은 △재임기간이 짧은 경우를 고려했으며 △정부정책 방향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경영성과와 전문성, 비전이 있어야 한다는 정도다. 하지만 구체적인 평가는 평가자마다 다를 수 있고 제시된 기준도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많다는 지적이다. 특히 재임기간의 길고 짧음은 뚜렷한 기준이 아니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지난해 3월 26일 취임한 박해춘 우리은행장과 지난해 4월 2일 취임한 박병원 우리금융 회장의 경우 유임된 방영민 서울보증보험 사장보다 불과 2개월여 더 근무했다. 경영성과 잣대도 향후 논란이 될 전망이다. 재임기간이 몇 달 안된 금융 공기업 CEO의 경우 사실상 경영성과를 검증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있다. 반면, 재신임을 얻지 못한 박병원 우리금융 회장과 박해춘 우리은행장의 경우 서브프라임 관련투자로 5700억 원의 손실을 봤다지만, 2년 연속 연간 순익 2조 원을 달성하는 성과도 냈다.
이와 함께 민간 출신이냐 관 출신이냐도 명확한 기준은 아니었다는 평가다. 재신임된 박대동 예보 사장이나 윤용로 기업은행장의 경우 모두 관료 출신이기 때문이다. 또 박해춘 우리은행장은 삼성화재 출신으로 서울보증보험과 옛 LG카드 CEO를 두루 지낸 민간 인사지만 재신임을 받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유임과 교체의 기준은 재임기간이나 경영성과보다는 ‘과거 정권 코드 인사’ 여부가 실질적 인사기준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많다. 노조 측도 성명서를 통해 이번 인사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기업은행 노동조합 역시 5월 8일 윤종훈 감사가 정부로부터 재신임을 받지 못한 것과 관련, “정부가 어떤 기준과 원칙에 따라 이런 결정을 했는지 명백히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조 측은 “임기가 보장된 상태에서 경영에 특별한 문제가 없는데도 단지 전 정권이 임명했다는 이유로 기관장과 더불어 일괄사표를 강제하고 교체를 결정한 것은 법치주의의 부정이며 또 다른 관치의 시작”이라고 항의했다. 노조는 또 “금융 공기업으로서 투명하고 건전한 경영이 이뤄지도록 감시하고 견제하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인사가 선임돼야 한다”며 “현 정권의 보은 인사나 낙하산 인사로 귀결시키려 한다면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영화 차질…수장 없는 공백 너무 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시급한 현안은 산업은행과 우리금융지주의 업무 공백이다. 금융위가 최대한 빨리 후임 CEO 인선작업을 하겠다지만, 우리금융 수장의 경우 후보추천위원회와 이사회, 주총 등을 거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민영화 작업이 진행 중인 산업은행은 더 심각한 상태다. 지난해 말부터 총재 교체설이 제기되면서 조직 내부적으로 업무 진행 속도가 느려졌고, 최근에는 4명의 임원급이 임기를 맞아 퇴임하면서 업무 공백이 현실화되고 있다. 김창록 산업은행 총재의 교체설은 사실상 지난해 정부의 산업은행 민영화 계획이 발표된 후 꾸준히 제기됐다. 인사권자인 대통령이 산은 총재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 총재가 바뀔 것이라는 소문은 현실화됐다. 그렇지만 금융 공기업 기관장의 재신임 여부에 대한 최종 결정이 계속 지연되면서, 산은은 내부 인사까지 마비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총재 교체가 기정사실로 굳어지면서 공석이 된 기획관리본부 이사, 공공투자본부 이사, 신탁본부장, IT본부장 등 4개 본부장 후임 인사를 할 수 없게 됐다. 지난달 산은은 민영화에 대비해 조직을 비상경영 체제로 전환했다. 하지만 최고경영자(CEO)인 총재가 교체되고 4개 본부의 임원이 공석인 상황에서 은행 경영이 제대로 될 리가 만무하다. 총재 인선 지연과 민영화 계획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산은의 외화자금 조달도 순탄치 않다. 올해 초 10억 달러의 글로벌 본드와 최근 3억 스위스프랑 채권을 발행했지만, 국내 대표차입기관이라는 위상에는 미치지 못하는 규모다. 투자자 설명회에서도 주로 민영화 계획에 대한 투자자들의 질의가 많았다. 총재 인선 작업이 늦어지고 인사 공백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산은 내부적으로는 업무 공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자칫 민영화 일정에도 차질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회장과 우리은행장, 경남·광주은행장 등이 모두 바뀌게 된 우리금융의 경우 산업은행에 비해 더 많은 절차와 시간이 필요하다. 우선 행장·회장 분리체제를 유지할 것인지, 황영기 전 회장 겸 행장 때처럼 합칠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 예보는 이에 대해 ‘민감한 사안’이므로 추후 검토를 통해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다시 겸임체제로 돌아갈 가능성도 있음을 시사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업계는 박병원 회장과 박해춘 행장간에 다소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만큼, 예보가 회장·행장 겸임체제를 부활시킬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친정 복귀를 희망하고 있는 이팔성 서울시향 대표도 사석에선 회장과 행장의 분리에 따른 비효율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예보의 계획이 선다 해도 7인의 후보추천위원회를 꾸리고 공모절차를 진행해야 한다. 서류접수와 면접, 내정까지 몇 주일이 걸릴 수밖에 없다. 이전 박 회장과 박 행장 공모 때도 한달여의 시간이 소요된 바 있다. 이후 CEO가 내정된다 해도 회장의 경우 이사회를 거쳐 주총도 통과해야 한다. 만약 회장과 행장을 겸임시킬 경우, 이때까지 우리금융과 우리은행은 공식적으로 선장 없는 배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또 경남·광주은행장 공모와 우리은행 부행장 인사도 이어져야 한다. 우리은행 부행장은 총 11명으로, 새 CEO가 일하려면 상당수 교체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부행장보다는 낮지만 역시 임원급인 단장의 경우에도 7곳의 자리가 정해져야 한다. 박해춘 행장의 경우 지난해 취임 후 열흘 만에 구조조정과 임원인사를 단행, 8명의 부행장을 교체 선임하고 5명의 단장을 새로 임명했었다. 한국주택금융 공사의 경우 공모 작업을 다시 진행해야 하면서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지난 3월 유재한 전 사장이 사퇴한 이후 박재환 부사장 대행체제로 2개월 가량 끌어왔지만, 재공모 결정으로 추가로 최소 3주 이상 더 공백이 생길 것으로 예상된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새로 추천위원회 위원을 구성하고 재공모를 진행한다면 아무리 일정을 앞당기더라도 최소 3주는 걸린다”며 “사장 선임이 상반기를 넘긴다면 업무 공백이 상당할 것”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후임 금융 공기업 CEO 인물 누가 될까 . 한편, 금융 공기업 CEO 후임 인선을 놓고 가장 관심을 끄는 자리는 산업은행 총재, 우리금융지주 회장, 우리은행장 등 세 곳이다. 현재 산업은행 총재로는 민유성 리먼브러더스 서울지점 대표, 윤진식 전 산업자원부 장관, 황영기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 등이 후보자로 거론되고 있다. 또 우리금융지주 회장 후보로는 이팔성 전 우리투자증권 사장, 이종휘 전 우리은행 수석부행장 등이 하마평에 오르고 있다. 금융가 일각에선 우리금융지주 회장과 우리은행장의 겸직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이들 자리 외에 CEO가 교체되는 기관의 경우 현재 시중에서 거론되고 있는 민간 인사들 가운데 선임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