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현 권력 분포에서 실질적인 ‘2인자’인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이 한 달여 칩거 끝에 15일 18대 총선 낙선 후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나타났다. 이날 국회 법사위 전체회의에 참석한 이 의원은 “아직 17대 국회 임기가 남았으니까 5월까지는 의정활동을 열심히 하고, 6월부터는 낙선한 (당협) 위원장으로서 지역구 활동을 열심히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 의원은 “최근 당 안팎에서 ‘이재오 역할론’이 대두되고 있는데 알고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내가 무슨 역할을 하겠느냐”고 즉답을 피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그러나 이 의원의 이같은 답변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우선 이 의원은 지난 10일 낙선 후 칩거해오던 지리산을 하산한 뒤 자신의 블로거에 올린 글을 통해 “패장을 군말을 하지 않듯이 장수는 전장을 떠나지 않는다”면서 “산은 내게 흔들리지 말라고 했다. 그냥 이재오로 살라고 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 의원은 “남을 욕하지도 말고 폄하하지도 말고, 남의 욕설에 속상해하지도 말고, 비겁하지도 오만하지도 말고, 함박웃음 웃는 좋은 세상 만들 때까지 어려운 이웃과 어깨동무하면서 살겠다”고 강조했다. ■이 의원 귀경 소식에 문전성시 이뤄 이 의원의 이같은 주장은 18대 총선 낙선 이후 줄기차게 떠돌던 미국 연수를 포기하거나 다소 연기하고 오는 7월 전당대회에서 당권에 도전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관측도 나오고 있어, 이같은 사실이 가시화된다면 정치적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을 전망되고 있다. 이 의원의 이같은 언급은 그동안 검토하던 해외연수 대신, 국내에 남아 나름대로 정치적 역할을 하려는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이 의원이 당권 도전은 안 하더라도 주류 측 좌장으로서 전당대회에서 ‘자기 사람’을 밀 가능성이 심심찮게 제기된다. 이 의원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차기 당 지도부나 당직, 시도당 위원장 등에 관심이 있는 주류계 인사들이 그를 찾아가는 등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는 애기도 들리고 있다. 이와 관련, 이 의원의 핵심 측근은 “낙선 후 주변사람들이 외국연수를 많이 권해 이 의원이 상당히 고민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의 거취문제는 결국 자신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 아니냐”며 이같은 관측에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이 의원은 당초 미국 연수를 기정사실화하고 비행기표까지 예약해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갑자기 생각이 바뀐 이유는, 비록 자신이 낙선의 아픔을 겪었으나 인수위 당시부터 3명의 장관 내정자가 낙하는 등 인사 파동을 시작으로 ‘강부자(강남땅부자) 정부’ 논란, 미국산 쇠고기 협상파동 등으로 임기 초반부터 위기를 맞는 등 지지율이 반 토막 난 이 대통령의 어려운 처지를 한때 ‘정치적 동지’로까지 불렸던 이 의원으로서 마냥 모른 체 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시각이 깔려 있다. 따라서 ‘위기가 곧 기회다’라는 말이 있듯이, 이 대통령이 처한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위기를 극복함으로써 동시에 나름의 정치적 역할을 모색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우연일 수는 있지만, 이 의원이 이런 내용의 글을 공개한 시점이 묘하게도 이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지난 10일 청와대 회동을 통해 ‘껄끄러운 관계’임을 재확인한 직후라는 점도 심상치 않아 보인다는 게 정치권의 분석이다. ■부인에도 불구 ‘MB 독대설’ 불거져 특히 한 인터넷 언론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이 대통령이 박 전 대표를 만난 다음날 이 의원을 청와대 인근 안가로 불러 독대했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의원의 요청으로 이뤄진 이 자리에서 이 의원은 이 대통령에게 향후 정국 운영 방안에 대해 건의하면서 자신의 거취문제를 심각하게 얘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박 전 대표가 호주와 뉴질랜드 방문을 위해 가진 기자회견에서 친박 당선자들의 복당문제를 5월 말까지 해결해 달라는 시한을 못박은 문제를 심도있게 논의했으며, 또한 전당대회를 앞둔 당 지도부 구성과 관련해 ‘안상수 대표-정의화 원내대표’ 라인을 적극 천거한 것으로 알려져 당초 주류 쪽에서 거론하고 있는 ‘박희태 대표-홍준표 원내대표’라는 구상과는 많은 차이가 있어 당내에 논란거리를 만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청와대 내의 인적쇄신을 주장하며 대통령 정치특보 신설을 건의하는 등 친이(親李) 진영의 역할 분담 등을 집중적으로 거론해 눈길을 끌었다. 이에 대해 이 의원은 ‘대통령 정치특보’자리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특히 이 의원은 지난 17일 대전 유성에서 측근들과 함께 워크숍을 가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이를 계기로 앞으로 당내 문제에 적극 개입하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을 낳고 있다. 그러나 이 의원 측은 이같은 여권의 구심을 맡아 정치적 재기를 노리지 않겠느냐는 일각의 관측은 물론 이 대통령과의 독대 자체를 부인했다. 이 의원 측은 15일 공식 보도자료를 통해 “지난 10일 오후 20일 간의 지리산 칩거를 마치고 상경했으며, 그 다음날인 11일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지역구인 은평구에 있는 수국사·진관사·삼천사·삼보사·백화사 등 관내 사찰을 순방하느라 관내를 떠날 시간이 없었다”며 이 대통령과의 만남 자체를 전적으로 부인했다. 이 의원 역시 미국 연수 여부와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에 “미국은 간다”고 분명하게 얘기하면서도 날짜를 집어서 얘기 하지 않는 등 극도로 말을 아꼈다. 특히 친박 당선자 복당 문제 등 정치 현안과 관련해서도 “내가 끼어들 사안이 아니다”라며 “논어에 ‘부재기위 불모기정(不在其位不侮其政)’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어떤 일에 대해 책임될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에 대해서 언급하지 말라는 말’”이라며 말을 삼갔다. 그러나 이 의원 주변의 핵심 측근들은 이 의원이 당분간 정치 현장에서 멀찌감치 떠나 재충전할 것을 강력히 권유하고 있으며, 여권 내부에서도 ‘전대 역할론’을 포함한 이 의원의 일선 복귀에 반대하는 의견이 대다수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의원은 일단 측근들의 권유대로 오는 29일께 미국 워싱턴에 위치한 존스홉킨스대 국제문제대학원으로 연수를 떠나기 위해 입학허가서와 현지 숙소 등 준비를 마쳤으며, 19일 미 대사관에서 비자 인터뷰를 하기로 스케줄을 잡은 것으로 전해져 이제 본인의 결단만 남은 셈이라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