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0일 18대 국회의 임기가 시작됐다. 지난 17대 국회는 정치권 물갈이로 초선 비율이 62.5%에 이르러 의정사상 최대를 기록하는 등 고무적인 분위기 속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152석으로 원내 과반수 의석을 확보한 열린우리당이 국가보안법 폐지 등 이른바 4대 개혁입법을 제시하고 이에 한나라당이 결사 반대로 나서면서 극한 여야의 대립이 시작됐다. 그리고 17대 국회 말미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및 정부의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장관 고시 강행과 관련하여 통합민주당 의원들이 농성에 돌입하는 등 여야 간의 타협없는 대결국면으로 이어져 17대 국회는 최악의 마무리를 하게 됐다. 지난 4년 간 의원들에 손에 의해 양산됐던 수많은 민생법안도 17대 국회와 함께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한나라당과 통합민주당은 주요 민생법안을 처리하겠다는 의지에서, 18대 총선을 치른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임시 국회를 여는데 합의했다. 마지막 임시국회에서 해결하려 했던 법안은 출자총액제한제 폐지를 골자로 한 공정거래법 개정안과 한미 FTA 비준동의안 등 친기업 정책 관련 법안이었다. 여기에는 물가안정 및 대학등록금 상한제 관련법과 미성년자 대상 범죄피해 방지법, 식품안전기본법, 군사시설 인근지역 개발 법안, 유류세 추가인하 등 서민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법안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4월 말 미국산 쇠고기 협상으로 인해 정국이 한미 FTA 비준안과 쇠고기 재협상으로 쏠리면서 다른 민생법안은 자연히 임시국회에서 묻히게 됐다.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법안처리 현황을 조사한 결과, 18대로 접어들면서 자동 폐기된 법안 중 서민생활과 소수 보호를 위해 시급히 처리해야 하는 민생법안이 188건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됐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17대 국회에서 접수된 전체 법안은 7488건인데, 이 가운데 처리된 4335건(58.2%)을 제외한 나머지 계류 법안은 의원발의 2943건, 정부제출 210건 등 모두 3172건(42.3%)이었다. 계류 법안 가운데에는 학원 수강료 초과징수 관리감독 강화 등 사교육비 절감 관련 법안, 개인정보 유출 방지와 금융 소비자 보호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 관련 법안, 국민기초생활보장 법안과 학교 급식 원산지 표시 등 서민의 삶에 영향을 미치거나 양극화 해소에 기여할 법안 등 188건이 민생법안으로 분류됐다. 이 법안들은 대부분 법안발의 이후 제대로 논의되지 않거나 상임위에 상정되어 전문위원의 검토보고서를 통해 해당 소위에 상정된 후 더 이상 진척되지 못했다. 법안 제·개정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결국 법안 관련 이해관계자들, 나아가서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반영될 기회가 상실된 것이다. 법의 제·개정 절차에는 경제적·시간적 비용을 포함한 많은 사회적 비용이 소요된다. 국회의 입법행태를 꾸준히 감시해 온 함께하는 시민행동 측은 “입법 과정에서 무수히 논의되었던 논의기록들이 폐기되고 막대한 검토보고서가 무용지물이 되고, 간신히 상임위 상정단계에 올라선 법안들의 입법 기회도 사라진다”고 전했다.
■사학법 투쟁으로 등록금상한제·사교육비 관련법 외면 교육위원회는 17대 국회에서 사립학교법 개정 등 정치적 사안에 쏠려, 교육환경 개선과 교육격차 해소 등과 관련된 법안 처리에 소극적이었다. 교육위원회에는 대학 등록금 인상과 사교육비 문제의 해결을 위해 모두 12건의 교육 법안들이 계류돼 있었다. 특히, ‘등록금 1000만 원’ 시대에 가장 많은 기대를 모은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의 등록금 인상 규제 등을 골자로 한 ‘고등교육법 일부 개정안’의 폐기는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한 법안이다. 저소득 가계 대학생 등의 학자금을 무상 지원하기 위한 국가장학기금 설치를 위해 한나라당 이주호 의원이 제안한 ‘학술진흥 및 학자금 대출 신용보증 등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과 통합민주당 정봉주 의원 등이 발의한 고등교육법 일부 개정법률안도 폐지됐다. 이 법안은 학교 설립·경영자가 수업료와 납부금을 당해연도 직전 3개년 물가상승률 평균의 1.5배 이상 인상하고자 하는 경우, 사유서를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에게 제출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 교육 관련 민생법안의 대다수는 서민들과 관련된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함께하는 시민행동 측은 “법안의 제·개정이 지연될수록 피해를 보는 것은 다수의 서민이다. 사교육비에 허덕이는 학부모가 그들이고, 등록금의 가파른 인상률에 학업을 포기해야 하는 대학생이 그들이고, 고리대금업이 아니면 대출조차 불가능한 저소득층 서민이 그들”이라며 법안 폐기를 안타까워 했다. 사교육비 절감과 관련해 통합민주당 이은영 의원 등이 지난해 12월 발의한, 학원 수강료 초과징수에 대한 관리 감독 강화와 수강료 상한 규정 등을 골자로 한 ‘학원의 설립·운영 및 과외교습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과, 학교 급식에 공급되는 식재료의 원산지 표시를 의무화하고 유전자변형농산물(GMO)을 급식에 사용하지 못하게 한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의 학교급식법도 폐지됐다. ■출총제·금산법 18대에서도 거론될 듯 17대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한 규제완화 관련 법률들은 이명박 정부의 친기업적 정책성향으로 볼 때 경제 살리기의 일환으로 18대 국회에서 다시 상정될 가능성이 높다. 우선, 적대적 인수합병에 대한 보호장치를 도입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안이 여야 합의에도 불구하고 처리에 실패했다. 공정거래법 개정안과 금산분리 완화가 핵심인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도 18대로 넘어갔다. 공정거래법과 관련해서는 17대 국회에서 출총제 폐지부터 순환출자제 도입까지 내용이 다른 개정안이 17건이나 올라왔던 만큼 계속 여야 간에 논쟁이 이어질 전망이다. 특히, 중소기업협동조합법안·여신전문금융업법안·조세특례제한법안 등 중요 경제법안들도 재정경제위원회에서 지난 2월 27일 이후 한 번도 논의되지 않아 통과가 무산됐다. 일반사업자가 SK텔레콤 등 통신사업자로부터 통신망을 임대해 통신시장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하는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도 논란 끝에 통과되지 못했다. 신용 카드 수수료 인하를 위한 여신전문금융업법 개정안 등 세법 개정안도 마찬가지이다. 수도권의 산업입지 관련 규제 완화를 골자로 하는 수도권 정비법 개정안은 수도권과 지방 출신 의원들 간의 이견으로 18대에서도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휘발유 및 경유 부과세의 인하 등을 내용으로 하는 조세특례제한법은 최근의 유가 급등과 맞물려 벌써부터 세금인하 폭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국회 안팎에서 나오고 있어 우선 처리 대상으로 꼽힌다. 야당은 정부의 통상조약협상권에 제동을 거는 통상절차법과 대운하 등 민자사업에 대해 국회의 승인을 거치도록 하는 관련 특별법 제정안을 낼 예정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외교분야, 통상절차법 폐기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 계류된 통상절차법은 국회가 정부의 해외협상과 관련해 개입의 여지를 주는 법안으로, 지금의 쇠고기 파동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법안이다. 이 법안은 쇠고기 협상이 있기 전에 이미 권영길·이상경·송영길·정문헌 의원에 의해 2006년과 2007년에 걸쳐 발의됐다. 하지만,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는 5월 20일에야 이 법안들을 통합한 위원회 나름의 대안을 마련했을 뿐, 그 이후로 논의를 멈췄다. 지난해 4월에는 법안심사 소위에서 논의에 들어갔으나, 이후 범여권의 거부로 논의가 진행되지 못했다. 이 법안이 본회의에서 통과됐다면, 정부는 매년 조약체결계획을 수립해 국회에 보고해야 한다. 특히, 이번 쇠고기 협상과 같은 통상조약이라면 이해 관계자와 관계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공청회가 선행돼야 한다. 외교통상부 장관은 협상의 주요 진행상황을 국회에 보고해야 하고, 국회는 비준동의안을 심사·의결하기 위해 조약위원회를 둘 수 있다. 정부는 국가기밀이라는 이유로 조약에 관한 보고나 자료 제출을 거부할 수 없다. 함께하는 시민행동 측은 “국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의 몫으로, 사회혼란으로 돌아온다”며 “이번 광우병 파동에서 보듯이 2006년에 발의된 ‘통상절차법’의 제정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졌더라면 오늘과 같은 사회혼란은 그 정도가 덜하거나 없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개인정보법 계류, 옥션 해킹 속수무책 개인정보보호법안은 최근 많은 네티즌들의 정보노출로 논란을 일으킨 옥션 해킹 사건을 막을 수 있었던 법안이다. 이 법안은 2004년 11월 노회찬 의원을 필두로, 2005년 7월 이은영 의원, 같은해 10월 이혜훈 의원이 대표 발의했다. 또한, 개인정보 보호와 관련해 박찬숙, 정청래 의원 등이 각각 대표발의한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개정법률안’ 2건, 양승조·이근식 의원이 각각 대표발의한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개정법률안’ 2건도 폐기법안에 들어갔다. 개인정보보호법안 처리가 17대 국회 내내 지연된 이유는 정부부처·정당·업계 간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 때문이다. 발의에 참여한 노회찬 의원은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각 부처가 개인정보 기구를 갖고 있었는데, 이를 통합하겠다는 법안을 내놓자 부처 반발이 있었고, 업계 로비로 인한 각 당의 소극적 태도도 한 몫 했다”고 말했다. 한편, 행정안전부는 연내 입법을 목표로 개인정보보호법 제정을 추진 중이다. 행안부 관계자는 “개별법 차원으로 발의된 안과 각계의 의견을 수렴해 통합적인 개인정보보호법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연금과 건강·고용보험 등의 관리·징수체계를 통합하는 법 개정안도 17대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복지분야에서 폐기된 대표적 민생법안은 사회보험료 부과 등에 관한 법률이다. 국민연금·국민건강보험·고용보험·산재보상보험 등 4대 보험의 적용·부과·징수 업무를 통합해 기구 관리 비용을 줄여 국민 부담을 줄이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여야 모두 징수체계 통합에 공감하고 있는데다 정부도 공공부문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관련 공단의 통합을 검토하고 있어 논의가 재개될 것으로 보인다. ■18대 국회는 순조로울까 18대 국회는 5월 30일 임기가 시작된다. 18대 국회의원 당선자들은 이날부터 국회의원으로 신분이 전환된다. 국회 의장·부의장 선출을 위한 1차 본회의는 6월 5일 열린다. 하지만, 본격적인 본회의 개최를 위한 상임위원회 구성까지는 험로가 예상된다. 원 구성을 위한 여야 협상에 따라 추후 국회 일정이 확정되지만, 현재 여야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다. 민주당의 송영길·조정식·강기정·김재윤 의원 등은 정부의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장관 고시 강행 중단을 촉구하는 농성을 시작했다. 또한 상임위 여야 배분 문제에 대한 이견이 크다. 국회 사무처에서도 여야 원 구성 협상이 원활치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17대 국회가 해결 못한 민생법안을 비롯한 국정 현안이 18대 국회의 우선과제가 됐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재협상 논란 등은 여야가 국론 통합 차원에서 후유증을 최소화하며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미국산 쇠고기와 연계돼 처리가 지연되고 있는 한·미 FTA 비준안은 가장 시급히 처리해야 될 사안으로 꼽힌다. 여기에 천정부지로 치솟는 유가대책을 비롯하여 서민물가안정대책, 금산분리.출자총액제한제 등의 기업활동 지원 및 규제완화 법안이 새롭게 시작할 국회가 서둘러 매듭지어야 할 과제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학과 교수는 “국회의원들이 시민단체 등의 외부평가에 민감해지면서 예산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과시용 법안이나 유사 법안 등을 쏟아내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란아 함께하는 시민행동 정책실장은 “법 제·개정에는 많은 사회적 비용이 소요되는 만큼 법안 상정을 하지 않은 이유라도 명확하게 밝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