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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하는 문(門)의 실재

허훈의 평면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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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0호 편집팀⁄ 2008.06.09 17:25:12

중앙대학교 예술대 회화학과 졸업 중앙대학교 대학원 서양화학과 졸업 개인전 2007 제5회 개인전 (분당중앙문화정보센터) 2007 제4회 개인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서울) 2006 제3회 개인전 (인사갤러리, 서울-소나무갤러리, 안성) 2002 제2회 개인전 (인사갤러리, 서울) 1996 제1회 개인전 (도올, 서울) 단체전 2008 성남의 얼굴(공간의생산전)-성남아트센터, 정예작가소품초대전-(분당 율갤러리), 신춘중견작가9인초대전(외환은행 분당중앙WMC갤러리), 한국현대미술의 조망전(살아있는미술관,잠실), 안성미술협회기획전(안성시민회관) 2007 스위스 취리히 아트페어(스위스 취리히), 한국,터어키 미술교류전(터어키), 분당미술제(성남아트센터,분당), 분당작가협회전(조형갤러리,성남아트센터), 한·중·일 우수작가초대전(평택호예술관,평택), 한국정예작가초대전(안산단원미술관,안산), 안성미협기획전(안성시민회관) 2006 SIAC(Open Art Fair, 서울 코엑스, 조선화랑초대), 평택 국제아트페어(평택호예술관 초대, 평택), 분당작가협회전(성남아트센터, 분당), 안성아트페어(안성시민회관, 안성), 자유표현전(성남아트센터, 분당), 2005 예우전(중앙대병원, 서울), 성남아트센터 개관기념전(성남아트센터, 분당) 2004~1992 추상회화 동상이몽전(수원미술전시관, 수원), 서울방법전(세종문화회관, 서울), 서울현대미술제 초대작가전(문예진흥원미술관, 서울), 대한민국미술대전(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동아미술제(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미술세계대상전(서울시립미술관, 서울), 그 외 단체전 현재 한국미술협회, 자유표현전, 분당작가협회 회원, 분당미술제 운영위원, 중앙대학교 ,한서대학교 강사,신세계문화센터 강사

글·중앙대교수/미술평론가 김영호 허훈의 그림을 언뜻 대하면 문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것은 벽에 달린 하나의 창문이거나 아니면 깊은 사각의 공간을 따라 첩첩이 세워진 다수의 출입문이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하여 다시 보면 정작 그의 문은 보는 사람의 상상 속에 존재할 뿐, 완성된 외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작가는 문의 사실적 형태를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하지 않은 듯 하며, 실제로 그의 그림에는 문의 세부적 형상이 그려져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그림은 부재하는 문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는 가설에 이르게 된다. 없는 것이 있음, 여기에 허훈의 그림을 해석하는 하나의 실마리가 있다.

문이 아닌 문을 그리는 허훈의 그림은 문의 허상을 나타내고 있다.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관객이 그의 그림에서 문의 허상을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그림이 문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장치가 되어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 장치란 수직과 수평의 선들이 교차하며 만들어진 격자무늬이며, 수직으로 겹쳐 세워진 직사각형들도 그의 작품을 문의 이미지로 연결해 주는 요인들이다. 이렇듯 관객의 생각 속에 재구성된 허상으로서 문의 형상은 실재 문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상상의 영역으로 그 나래를 펼치게 하는 통로가 된다.

일상으로부터 벗어난 허훈의 문은 시인의 문이자 심리학자의 문이며, 신화의 세계로 통하는 문이 된다. 그도 아니면 그 밖에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의 문이어도 무방하다. 어린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문일 수도 있고, 사춘기의 심리적 불안을 나타내는 문이 될 수도 있다. 종교적 명상으로 안내하는 문인들 어떠하랴.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은 하나의 문이 본래적 기능을 박탈당하고 실용적 의미를 상실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자연스런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허훈의 작품을 이해하거나 감상하는 일은 이렇듯 이미지를 배반하여 자신의 정신을 반영하는 일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예술가의 작품 앞에서 작가의 의도와 전혀 무관한 해석을 내릴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작품 감상의 행위는 우리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작품에서 시작되며, 해석은 감상의 원인인 작품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림을 해석하는 일은 작품과 관객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게임이며, 이 게임을 위해서 작가가 제공하는 어떤 규칙이나 방법이 무엇인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허훈은 자신의 작품에 <사이>라는 일련의 제목을 부여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작품을 해석하는 게임을 위한 하나의 규칙이자 방법이다. 이제 우리는 허상으로서 우리 눈앞에 놓인 문의 이미지와 작가가 설정한 주제 사이에 놓인 연관성을 찾아야 할 순서가 되었다. 허훈의 문은 관객의 시지각을 서로 대립되는 두 개의 영역으로 갈라놓는다.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관객의 머리속에 떠오르는 상대적 심리적 공간 사이에 놓여 있다. 창문이며 출입문은 이 공간들을 가르는 경계이며, 두 개의 세계가 문을 경계로 분리된 채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문은 안과 밖을 경계 지운다. 마치 인체의 눈이 그러한 것처럼 그의 문은 내면과 외부를 경계하는 수정체이다. 어느덧 가상의 이미지로서 문은 눈이 되며, 그것은 또한 작가가 제목으로 설정하고 있는 철학적 개념으로서 <사이>와 동의어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허훈의 그림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두 개의 영역 사이에 놓인 그의 문이 보인다. 부재하는 문이며 상상의 문이다. 그것은 내면으로 열려 있거나 아니면 밖으로 향해 열려 있다. 프랑스 미술사가 마크 르보(Marc Le Bot)는 이러한 눈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관찰하고 있다. 눈이 밖을 향해 열려 있을 때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 현실을 비추어 받아들인다. 거대한 자연이나 숲, 그리고 도로를 지나는 무수한 인파들이 거기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눈이 안으로 향해 열려 있을 때 그것은 깊은 내면에 자리한 영혼을 비추어낸다. 거기에는 심연으로부터 피어나는 무의식의 거품들과 감각의 향연이 있다. ‘눈이 마음의 창’이라는 말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허훈의 그림에 허상으로 존재하는 문의 이미지는 눈과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또한 그의 문은 두 개의 세계를 연결하는 <사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문이 밖을 향해 있든, 아니면 안을 향해 있든, 그것은 관객의 마음과 독자적인 시각체험에 따르게 될 것이다. 만일 문이 밖으로 열려 있다면, 그것은 작가가 속해 있는 도시와 환경을 반영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작가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도시와 아파트의 구조물들 그리고 전자매체들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또한 문이 작가의 내면을 반영하고 있다면, 환상의 터널을 미로처럼 빠져나가는 과정에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사색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허훈의 그림은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넘나든다. 허훈의 작품을 순수 시각 이미지로 바라볼 때, 거기에는 점과 선이 만들어내는 기하학적 구조가 우선적으로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앞서 말했던 격자무늬와 단색조의 색면들도 역시 작품해석에 빼놓을 수 없는 조형 요소들이다. 이러한 순수 시각 이미지는 김환기나 몬드리앙의 작품세계와 연계성을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무런 현실적 외관을 나타내지 않으면서도 자연이나 도시와 같은 현실의 리얼리티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회화예술이 순수추상의 세계를 드러낸다 하더라도 작가의 창작과정에서 작가의 주관적 삶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도 이들 작품에서 찾아낼 수 있는 공통분모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허훈의 작업은 두 개의 영역 사이를 끊임없이 왕래하는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그것은 융화될 수 없는 것들을 하나로 포괄하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허구와 실재의 사이, 현실과 이상의 사이, 실재와 관념의 사이, 평면과 공간 구조 사이, 순수 시각 이미지와 일루전 사이, 순수 추상과 삶의 리얼리티 사이... 이 <사이>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작가의 작업에 나타나는 역설이며, 그것은 현대적 삶이 드러내는 이율배반의 모순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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