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발유 가격이 최근 리터당 2000원 대까지 치솟고 경유 가격도 휘발유 가격을 넘어설 정도로 급등하는 등 유가가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말 그대로 자고 일어나면 기름 값이 오르는 요즘이다. 지난 3일 한국석유공사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2일 두바이유 가격은 배럴당 120.98달러로 전거래일인 지난달 30일의 120.01달러보다 97센트가 상승했다. 최근 국제 유가가 횡보하면서 두바이유 가격 역시 큰 변동을 보이지 않고 있다. 서부 텍사스산 중질유(WTI) 7월물 인도분 가격은 지난달 29일부터 30일까지 이틀 동안 126∼127달러선에서 횡보를 했고, 2일 거래에서도 127.76달러로 소폭 오르는 데 그쳤다. 이에 따라 국내 주유소에서 파는 기름값은 상승세를 지속했다. 주유소정보 시스템 오피넷에 따르면, 지난 6월 2일 전국 평균 경유 가격은 리터당 1914.49원으로 전일보다 2.3원이 올랐다. 휘발유 가격도 2.04원 오른 1905.4원으로 오름세를 지속했다. 보일러 등유는 리터당 13.83원이 올라 1525.57원을 기록했고, 실내등유도 1514.16원으로 전일보다 8.52원이 상승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업계 전문가들은 국제 유가가 배럴당 200달러까지 돌파하는 게 아니냐는 전망도 속속 제기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보면 하락세로 전환하겠다는 주장이 아직까지는 힘을 얻고 있지만, 단기적으로는 배럴당 200달러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만약 유가가 배럴당 200달러를 돌파한다면 국내 시장은 어떤 변화가 예상될까? 전문가를 통해 일종의 시나리오를 그려봤다. ■난방비 아껴라… 직장인 격주 오전 근무 대세 서울에 사는 나주부(34) 씨는 그 동안 모은 돈과 대출금 등으로 새 아파트에 계약을 하러 가다 깜짝 놀랐다. 같은 평수인데도 아파트 가격이 많게는 1억 원 가까이 차이났기 때문이다. 나 씨가 담당자에게 “같은 크기의 아파트인데 왜 가격은 이렇게 크게 차이가 나느냐”고 물어보자, 직원의 답변은 단호했다. 나 씨가 원하는 아파트가 남향이기 때문이라는 것. 담당자는 “겨울철에 난방비를 아낄 수 있어 요즘 남향집이 인기 폭발”이라며 “장기적으로 보면 1억 원이 훨씬 이익”이라고 덧붙였다. 나 씨는 오랜 고민 끝에 결국 남향 쪽의 아파트를 선택했다. 직장인 나열심(33) 씨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서류를 떼려고 구청으로 향했다.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냉방비 절약을 위해 금요일은 격주로 오전 근무만 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세상이 온통 유가 절약 일색이다. 그러고 보니 회사에서도 자동차 휘발유 쿠폰을 없애는 대신 대중교통 이용자들에게만 30% 보조금을 주기로 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정부는 학교에 단축 수업을 실시하라고 공문을 보냈다. 고속도로 제한 속도를 조만간 낮춘다는 발표도 나왔다. 신문에는 비행기 때문에 사라졌던 대서양 횡단 여객선이 다시 등장했다는 뉴스가 사진과 함께 크게 나왔다. 물론 이는 일종의 가상 시나리오다. 하지만 1년 안에 유가가 배럴당 200달러를 돌파한다면 결코 가상일 수는 없다. 오히려 실제 상황은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할 수 있다는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또 다른 문제는 시간이다. 만약 200달러 시대가 서서히 닥친다면 인류가 준비할 시간을 벌 수 있고 큰 문제없이 극복할 수도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송재은 연구원은 “장기적으로 보면 유가는 하락세로 전환할 가능성이 크지만 문제는 단기적인 현상”이라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200달러 시기가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예측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송 연구원은 이어 “만약 오랜 시간을 두고 유가가 상승한다면 충분한 준비를 하고 어떤 식으로든 적응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강성대 한국은행 차장은 “예컨대 2년쯤 뒤에 배럴당 200달러가 되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어 ‘힘들지만 견딜 만한 수준’이 되겠지만, 6개월 이내에 200달러 시대가 찾아오면 얼마나 타격을 받을지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올해 유가가 급등세를 지속해 연평균 유가가 200달러를 기록할 경우 경제성장률(GDP)이 5%포인트 가까이 떨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올해 성장률 전망치가 4.8%인 점을 감안하면, 마이너스 성장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지훈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2차 오일 쇼크 때인 1970년대 말의 유가(30달러 대)를 물가 수준과 석유 의존도 등을 감안해 현재 가격으로 환산하면 150달러”라며 “결국 지금 유가가 평균 150달러로 오른다면 충격이 과거 2차 오일 쇼크와 비슷해지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미 재앙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 5월 27일과 28일 런던과 워싱턴에선 트럭 운전사들이 유가 안정 대책을 요구하며 차량 시위를 벌였다. 프랑스에선 어민들이 선박 연료(디젤유) 가격 인상에 반발해 거리로 나섰다. 자카르타에서도 학생, 택시 기사들이 연료 가격 인상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국내에서도 인천경제자유구역 ‘영종하늘도시’ 조성 공사가 5월 23일부터 전면 중단됐다. 덤프 트럭 기사들이 유가 폭등에 따른 운반비 인상을 요구하며 운행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중소기업들도 유가 인상으로 원자재값과 물류비가 치솟자 가동을 중단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백화점 매출은 떨어지고,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발길이 남대문시장 등 재래시장에 몰리고 있다. 그렇다면 전문가들의 견해는 어떨까?
우선 한국은행은 유가가 배럴당 평균 100달러에서 100% 상승해 200달러가 될 경우 소비자물가는 2%포인트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충격은 올해로 끝나지 않는다. 내년엔 4%P, 3년째엔 5%P 상승하는 등 물가에 주는 충격은 해가 갈수록 커지게 된다. 삼성경제연구소 분석에 의하면, 유가가 1년에 100% 오를 경우 성장률은 3.5%포인트 하락하고, 200억 달러의 무역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경제연구원은 ‘고유가, 한국경제 안전한가’ 보고서에서 올해 두바이유와 브렌트유, 서부텍사스유 등 3대 원유의 연평균 가격이 배럴당 130달러일 때 경제성장률은 지난해보다 1%포인트 떨어진 4%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130달러를 넘을 경우 140달러에서 3.8%, 150달러에서 3.7%, 190달러에서 3.0%의 성장률을 각각 나타내고, 200달러로 급등하면 2.8%로 내려앉을 것으로 연구소는 내다봤다. 또 지난 1월 1일부터 지난달 29일까지 3대 유종의 평균 가격인 103.3달러를 유지한다면 올해 성장률은 지난해 대비 0.54%포인트 하락한 4.46%에 머물 것으로 예상했다. 소비자물가의 경우, 두바이유 기준으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면 1.7%포인트, 130달러면 3.2%포인트, 150달러면 4.3%포인트씩 추가로 높아질 것으로 연구소는 예측했다. 유가 급등으로 상품 수입액이 늘면서 유가가 100달러에 이르면 경상수지가 160억 달러 적자를 보이고, 110달러에 이르면 상품수지까지 적자로 돌아설 것으로 추정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국제유가의 상승은 경상수지를 악화시키고 국내 물가를 높여 이에 따른 내수 부진으로 경제성장률을 떨어뜨린다고 설명했다. ■200달러 진입 가능할까 아직까지 이에 대한 시각은 크게 엇갈린다. 4년 뒤 500달러로 치솟을 것이라는 전망이 있는가 하면, 내년에는 80달러대로 다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까지 극과 극을 달린다. 비관론자들은 세계 석유 생산량이 머지않아 피크에 달해 근본적인 수급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며, 이 같은 불안이 유가에 반영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대하는 진영에서는 투기 세력이 유가 상승을 부추기고 있으며, 버블이 꺼지면 유가는 결국 정상적인 수준으로 돌아갈 것으로 본다. 어떤 편에 서든 세계 에너지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는 데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중국, 인도 등 인구 거대국이 본격적인 성장 궤도에 진입했다. 2025년엔 세계 인구가 80억 명이 된다. 급증하는 글로벌 중산층은 에너지 소비의 새 주역으로 떠오를 것이다. 심지어 중국이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석유를 사재기한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30년의 석유 수요는 지금보다 3200만 배럴(하루) 늘어날 전망이다. 그러나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 생산량은 하루 1000만 배럴(2006년 기준)에 불과하다. 2030년까지 3개의 사우디아라비아가 더 필요하다는 계산이다. 천연 가스 역시 2030년까지 수요 증가분을 충족시키려면 세계 최대 LNG 수출국인 카타르가 70개 필요하다. 문제는 이만한 수요를 충족시켜줄 만한 공급을 기대할 수 있느냐이다. 다만 유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대기업들은 이같은 시나리오를 현실화 하며 준비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