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광복절에도 어김없이 특별사면이 이루어졌다. 역대 대통령들은 정권이 출범할 때마다 사면권을 남용하지 않겠다고 공언해 왔으나, 김영삼 대통령이 모두 9차례, 김대중 대통령과 대선 후보 시절 사면권에 엄격할 것을 공약으로 내세운 노무현 대통령도 임기 중 각각 8차례나 사면을 단행했다. 특히, 매번 ‘경제 살리기’라는 명목 아래 경제인들의 대거 사면이 이루어져 왔다. 그중에는 배임이나 횡령 등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이하 특경가법) 위반 판결을 받은 재벌 총수들이 대거 포함돼 국민적 비난에 휩쓸리기도 했다. 이번 사면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한상공회의소 등의 경제 5단체는 재계인사 대거 사면에 앞서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등이 포함된 106명의 기업인들에 대한 사면·복권 건의서를 청와대와 법무부에 전달해 사면결정을 압박(?)했다. 이에 따라, 특경가법상 배임·횡령 등의 범죄로 유죄가 확정된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을 비롯하여, 최태원 SK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조동만 한솔아이글로브 회장 등 재벌 총수가 사면 대상에 다수 포함됐다. 보복 폭행으로 폭력범으로 분류된 한화 김승연 회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업인은 특경가법상 배임과 횡령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은 인사이다. 김동진 현대자동차 부회장 등 현직 기업 간부와 함께 손길승 SK그룹 전 회장, 장치혁 전 고합그룹 회장,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 김영진 전 진도 회장, 김운규 전 현대건설 대표이사, 안병균 전 나산그룹 회장, 이재관 전 새한그룹 부회장 등 전직 기업인들도 다수 포함됐다. 이번에 사면된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 나승렬 전 거평그룹 회장, 장치혁 전 고합그룹 회장, 엄상호 전 건영그룹 회장 등은 과거 정부에서 사면대상으로 제안돼 왔지만 번번이 제외된 끝에 이번에 포함된 케이스다. 이들은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방만한 경영과 과도한 차입으로 쓰러져 재계 총수직을 떠난 이들이다. 이들은 기업의 부실경영으로 외환위기 당시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해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게 한 장본인이다. 이들의 죄과야 어떻든, 매년 광복절에는 경제인 사면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재계에서는 8월 15일을 기업 총수들이 죄목에서 해방되는 ‘재계의 광복절’이라고 부르는 실정이다. ■ 야당 “회장님 사면”한나라당 “경제 살려 보답하라는 배려” 15일 특별사면 중 경제인 사면 명단이 발표되면서 야당들은 일제히 ‘국민 분열용 사면’, ‘회장님 사면’ 등의 격한 용어를 써가며 강하게 반발했다. 김유정 민주당 대변인은 “국민적 동의 없이 마구잡이로 재벌 총수들을 사면 대상에 포함시킨 ‘회장님 사면’은 기득권층은 어떻게든 면죄부를 받는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것”이라고 우려했다. 박선영 자유선진당 대변인도 “사면권은 국민통합 차원에서 최소한으로 행사돼야 함에도, 경제인을 대거 사면하면 사회통합이 저해되고 국민이 분열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박승흡 민주노동당 대변인은 “무분별한 사면권 오남용과 촛불집회에 대한 법·원칙 강조라는 이율배반 사이에서 국민은 이명박 정권의 실체를 똑똑히 확인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민주당은 대통령의 사면권을 제한하는 법률개정안을 발의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정작 한나라당에서는 사면자 명단 발표 이후 “비록 기업인들에 대한 사면에 부정적 인식이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지만, 사면은 용서와 관용의 결단”이라며 “대통령의 기업인 사면은 그 분들로 하여금 세계로 뛰어나가 국가경제를 살리는 일에 헌신하는 것으로 국민들께 보답해 달라는 배려”라고 해석했다. 이러한 한나라당의 태도는 정권교체 이전과는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참여정부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 의원들은 정권 말엽 경제범죄 사범에 대한 무분별한 사면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특경가법상 배임·횡령 등의 범죄를 저지른 경우 특별사면을 금지하자는 내용을 담은 개정안을 줄기차게 입법 발의해 왔다. ■ 야당 시절과 입장 뒤바뀐 한나라당 특경가법 위반자의 사면 금지를 규정한 개정안은 2003년 16대 국회에서 원희룡 의원의 대표발의로 제기됐다. 당시 공동발의자 중 서상섭·최병국·오세훈·김용학 등 다수의 전·현직 의원이 한나라당 소속이다. 최연희·김부겸 전 의원도 발의 당시 한나라당 소속이었다. 이어, 17대 국회 들어서는 대통령의 사면권을 통제하자는 취지에서 사면심사위원회를 설치하는 사면법 개정안을 국회가 통과시켰다. 이 같은 사면법 개정안을 제출한 한나라당 소속 전·현직 의원들은 이성권(대표발의)·곽성문·남경필·김명주·권영세 등 16명이다. 또한 2005년에는 안상수 의원이, 2007년에는 전여옥 의원이 사면권 개정안의 ‘대표발의자’로 대통령 사면권 제한의 선두에 서기도 했다. 민주당의 이낙연 의원도 특경가법의 특정 범죄에 대해서는 특별사면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의 개정안을 대표발의했으나, 공동발의한 의원들은 대부분 한나라당 의원이었다. 현재 청와대 수석비서관으로 활동 중인 박재완 국정기획수석과 박형준 홍보기획관, 주일대사로 파견된 권철현 전 의원도 17대 국회의원 당시 특별사면 대상에서 특경가법 위반자는 제외해야 한다는 사면법 개정안을 공동발의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어 지난 정부와 똑같은 특별사면이 이뤄지고 있음에도, 이들은 입장이 바뀐 배경을 밝히지 않은 채 입을 다물고 있다. 참여연대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당시에 기세등등하던 소신이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서는 어째서 뒤바뀌었는지 밝혀야 한다며 한나라당 의원들의 입장표명을 촉구했다. 참여연대는 이 같이 태도가 뒤바뀐 한나라당 의원들에 대해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특경가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재벌 총수 등의 특별사면을 강력하게 비난하고 이를 막겠다며 사면법 개정안까지 제출할 정도로 열의를 보이던 정치인들이 이제 와서 입을 닫고 있는 태도는 납득할 수 없다”며 “일관성 없는 정치인들의 행동은 국민 불신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박근용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팀장은 “이번 사면으로 재벌들은 장기적 생산 활동보다 단기적 로비에 역량을 집중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비판했다. ■ 경제인 사면해도 경제는 제자리 경제인에 대한 사면이 경제를 살리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사면 이후 응당 경제가 더욱 성장해야 하나, 그렇지도 않다. 무원칙한 경제인 사면으로 불거지는 사법불신은 단순히 사회적 정의 및 형평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민경제의 효율성 제고와 장기적 성장에도 악영향을 미친다는 지적이다. 경제개혁연대는 “사법불신은 경제주체들이 장기적 생산활동보다는 단기적 로비 활동에 역량을 집중하도록 하고, 결국 경제성장의 잠재력을 훼손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경제인 사면 남용으로 기업인의 범죄 가능성만 더 키우고, 국민들 사이에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사법불신만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는 비판이다. 특히, 집권 초기부터 법과 원칙을 강조해 온 이명박 대통령이 경제인에게 사면 특혜를 준다면, 현 정부가 주장하는 법치주의도 극소수 재벌 총수를 위한 이중잣대에 불과함을 스스로 증명하는 모순을 낳게 된다. 경제개혁연대는 이에 대해 “기업인 범죄에 대한 편향적인 사면은 성장잠재력을 오히려 후퇴시킨다”며, “더 이상 경제 살리기라는 미명하에 법과 원칙을 훼손하는 사면으로 경제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사면심사위원회는 ‘유전무죄,무전유죄’라는 말에 담긴 국민의 사법불신을 무겁게 인식하고, 법이 위임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대통령의 사면권이 사법부의 형벌권을 침해하고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권운동사랑방 등 39개 인권단체가 모여 만든 ‘인권단체 연석회의’는 “이명박 정부는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배임·탈세·횡령·뇌물수수 등의 죄를 저지른 재벌 총수들은 사면한 반면,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침해하면서 처벌한 500여 명 양심수들의 외침은 철저히 외면했다”며 “이로써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로 대표되는 사법불신은 더욱 심해지고 경제 선진화의 길은 더 멀어졌다”고 주장했다. 사면심사위원회는 엄격하고 객관적인 심의를 통해, 헌법 제79조에서 명시하고 사면법에서 위임된 대통령 사면권의 남용에 대하여 견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특히 기업인 범죄에 대한 사면권 남용으로 국민의 사법불신이 심화되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