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리·고환율·고물가의 3중고가 서민들과 중산층을 위협하고 있다. 일부 서민들은 “1997년 외환위기 때보다 더 살기 어렵다”며 “이제는 더 이상 허리띠를 졸라맬 여력도 없다”고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입증하듯 한계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파산신청을 내는 저소득층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중산층 역시 마찬가지. 그나마 기댈 언덕이었던 펀드·부동산 등 자산가치마저 하락하면서 경기불황에 따른 불안감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출범 6개월을 맞은 MB정부의 7·4·7 공약은커녕, 그나마 서민들이 가진 새 대통령에 대한 기대감마저도 점차 사그라드는 추세이다. # 제조업을 운영하는 김모(남·55) 씨는 얼마 전 강북에 있는 3억 원대 아파트를 부동산 업체에 내놨다. 최근 부동산 시장이 불황을 일으키면서 집값마저 떨어졌지만, 사업 자금을 마련하려고 할 수 없이 내놓은 것이다. 김 씨는 “40대에 처음 장만한 집이지만, 1억 원 대출 이자를 갚기도 버거워 결단을 내렸다”며 “부동산 거래가 뚝 끊겨 3주가 지나도록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 회사원 이모(남·32) 씨는 인터넷뱅킹으로 펀드 계좌만 보면 속이 쓰리다. 중국 펀드가 정점에 달했던 지난해 10월 은행 프라이빗뱅커(PB)의 권유로 3000만 원을 넣었는데, 잔액이 1800만 원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이 펀드의 수익률은 현재 마이너스(-) 40%다. 이 씨는 “아내가 출산을 앞두고 있어 펀드로 돈을 불려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할 계획이었지만, 당장 환매를 할 수도 없어 계획을 미루기로 했다”며 씁쓸해했다. # 회사원 강모(남·34) 씨도 일손이 잡히지 않기는 마찬가지. 이 씨는 입사 후 차곡차곡 모은 돈 5000만 원을 지난해 몽땅 주식에 투자하는 모험을 감행했지만, 올 들어 2000만 원 이상 원금을 날렸다. # 지난해 아들을 영국에 유학 보낸 천모(남·48) 씨는 요즘 마음이 무겁다. 올 여름 휴가 때 고유가로 비행기 값이 부담스러워 영국 방문을 단념했는데, 최근에는 환율이 껑충 뛰어 더 이상 아들을 영국의 학교에 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천 씨는 아내와 아들에게 현 상황을 설명하고 결국 귀국시키기로 했다. 경기침체로 살림 씀씀이를 줄이던 중산층이 최근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환율에다 고금리·고물가까지 겹쳐 살림살이가 한층 더 팍팍해지고 있다. 7월 소비자물가가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6% 가까이 뛴 상태에서 환율마저 1100원대로 급등해 물가 상승세를 부채질하고 있다. 임금은 오르지 않는데 물가가 뜀박질하면서 실질소득은 뒷걸음쳤다. 통계청에 따르면, 물가 상승분을 반영한 2분기 전국 가구의 실질소득은 1분기(341만5000원)보다 오히려 4.8% 감소했다. 주부들은 이구동성으로 “예전 같으면 1만 원을 들고 시장에 나가면 저녁 찬거리를 제법 살 수 있었지만, 지금은 살 게 별로 없다”며 “월급은 그대로인데 물가는 연일 치솟고 있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라고 호소했다. 덩달아 치솟은 사교육비 등을 감안하면 외식은 엄두도 못 낼 판이다. 지난 달 한 온라인 교육 사이트의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 가운데 80%가 가계경제를 구조조정했거나 할 예정이라고 답했고, 외식비(30.2%), 문화 및 여가활동비(19.5%), 교육비(18.6%) 등의 순으로 절감하겠다고 밝혔다. ■ 3중고에 개인파산 신청 7개월간 7만건 고금리·고환율·고물가 등 3중고는 저소득층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사람들은 법원을 찾아 ‘경제적 사망신고’인 개인파산 신청을 하고 있다. 대법원에 따르면, 개인파산 신청 건수는 7월 말까지 7만1654건으로 집계됐다. 개인파산 신청 건수는 2004년 1만2317건에서 2005년 3만8773건, 2006년 12만3691건으로 급증했으며, 2007년에는 15만4039건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소득의 양극화도 더욱 심해졌다. 통계청 조사를 보면 상위 20% 가구의 평균소득이 하위 20% 가구의 몇 배인지를 보여주는 소득 5분위 배율이 지난해 2분기 7.27배에서 올해 2분기 7.46배로 나빠졌다. 이 수치는 2분기 기준으로 2003년 이후 가장 높은 것이다. 다른 계층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흑자를 냈지만, 소득이 가장 적은 계층(1분위)만 2분기에 적자를 냈다. 1분위 계층은 처분가능소득(79만3000원)보다 소비지출(110만1000원)이 많아 월평균 30만8000원 적자였다. 저소득층 자녀들은 학자금 빚더미에 눌려 허우적대고 있다. 올해 6월 말 현재 학자금 대출 연체율은 3.0%로 일반은행의 신용카드 대출 연체율 1.4%보다 두 배나 높았다. 이 뿐만이 아니다. 가계의 안전판 역할을 해주던 예금·펀드·주식·부동산 등 자산가치마저 하락하면서 서민들은 물론 중산층도 불안에 떨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1분기 말 현재 가계가 보유하고 있는 주식투자금액(직접투자+간접투자)은 350조4000억 원으로 작년 말보다 13조 원 하락했다. 코스피지수는 지난 달 22일 급락해 1년 4개월여 만에 1500선 아래로 떨어졌다. 부동산 114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값은 지난 6월 27일 이후 줄곧 하락세를 기록하다가 8월 21일 부동산 대책이 발표되면서 8주 만에 하락세를 멈췄다. 전문가들은 자산가치 하락은 실질구매력 저하→소비감소→내수침체의 악순환을 불러온다고 지적했다. LG경제연구원의 한 연구위원은 “경제주체들은 자산가격에 따라 소비 규모를 달리하는 경향이 있다”며 “자산가치가 높아질 것으로 기대하면 미리 소비에 나서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앞서 소비를 줄이게 된다”고 말했다. ■ 고유가 잠잠해지니 환율이 말썽 이처럼 3중고에 시달리는 서민들의 어려움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가장 큰 문제는 단연 환율이다. 일각에서는 “고유가가 잠잠해지니 이제는 환율이 말썽을 부리고 있다”며 “환율 변동이 커지면서 금리와 물가도 급등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문제의 환율은 언제쯤 그칠까? 이에 대해 전문가들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당분간은 지속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실질적으로 고공비행하던 물가상승률이 유가 안정과 금리인상 덕에 8~9월 고점을 찍고 이후 둔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았다. 물가 안정 수준을 3% 정도로 본다면 아직 요원한 일이지만, 4분기부터는 그나마 5%대 초반으로 안정될 것이라는 전망이 컸다. 그러나 환율 급등이라는 복병을 만나면서 이같은 전망이 수정되고 있다. 환율이 현재 수준을 이어갈 경우 고물가 국면이 좀 더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물가가 5% 초반으로 안정되는 시점을 대부분 연말로 늦췄고, 일부는 아예 내년이나 돼야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유가를 비롯한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물가는 작년 10월에 상승률 3%를 넘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11월에 한국은행의 물가안정 목표 상한선인 3.5%를 터치한 이후 더욱 속도를 내 지난달에는 5.9%를 기록했다. 8월에는 6% 초반을 기록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같은 물가상승률은 작년 같은 달과 비교하는 것인 만큼, 본격적으로 상승세가 시작된 지 1년이 되는 10월이면 기저효과로 인해 현저하게 둔화될 것이란 전망이 높았다. 게다가, 한때 배럴당 150달러에 육박했던 유가는 지난달 중순부터 뚜렷하게 하향 안정되면서 110달러대로 내려앉았고, 한국은행이 1년 만에 금리까지 올리면서 물가안정에 대한 기대는 더욱 고조됐다. 그러나 최근 환율이 급등하면서 이같은 기대는 다시 사그라들고 있다. 월 초 1010원대였던 환율은 최근 1080원대로 치솟았다. 따라서, 연말까지는 기다려야 물가가 주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높아졌다. 한화증권의 한 이코노미스트는 “해외발 요인이 소비자물가로 전이되는 시차를 감안할 때 소비자물가 상승률 고점은 10~11월경이 될 것”이라며 “최근의 환율 급등세가 지속될 경우 고물가 국면이 좀 더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한은의 거시계량경제 모형에 따르면, 환율이 1% 오를 때마다 소비자물가가 0.08%포인트 오른다. 최근의 환율 7% 급등을 이 공식에 넣어보면 물가는 0.56%포인트 오른다는 계산이 나온다. 내년까지도 고물가가 계속될 것이라는 의견 역시 상당하다. 추석효과로 농축산물 가격이 상승하고 공공요금이 인상될 가능성이 있어 연내 물가 급등세 진정은 물 건너갔다는 것. 키움닷컴증권의 한 이코노미스트는 “4분기 물가는 6% 전후 수준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아 물가가 안정적인 기조에 들어섰다고 보기는 힘들다”며 “결국 향후 국제 유가와 원자재 가격이 안정되더라도 물가 안정 기조는 내년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애널리스트는 “연내 소비자물가 고점은 3분기 중으로 예상되지만 이후 둔화폭은 극히 미미할 것으로 보여 숫자상 고점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실제 고물가 부담은 내년 상반기까지 지속될 것”으로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