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만하면 바퀴벌레처럼 스멀스멀 기어나오던 미국 서브프라임의 망령이 미국 5대 투자은행의 하나로 150여 년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던 리먼 브러더스를 단숨에 무너뜨렸다. 리먼 브러더스가 9월 14일 파산보호신청(챕터 11)을 하기 이미 오래 전인 지난 7월 중순부터 산업은행은 리먼 브러더스를 인수하기 위해 물밑 협상을 벌였다. 역사에 있어 가정(假定)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만약, 아직도 글로벌 금융시장의 변방에 있는 우리나라의 산업은행이 리먼 브러더스를 인수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가정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법하다. 우선 가장 낙관적인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리먼 브러더스는 파산을 면했을테고, 당연히 작금의 미국발(發) 금융위기가 더 크게 번지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금융산업이 글로벌 무대로 도약할 수 있는 주춧돌을 마련했을 수도 있을 것으로 일부 전문가들은 관측하고 있다. 여기서 리먼 브러더스 인수를 선두에서 지휘했던 민유성 산업은행장의 말을 잠시 빌려보자. 민 행장은 “리먼 브러더스가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파산보호신청이라는 카드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리먼 브러더스의 인수는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 협상을 진행한 것”이라고 덧붙었다. 특히, 내년 2월로 예정된 자본시장통합법을 앞두고 국내 증권사와 은행들이 앞다투어 미국식의 투자은행 전환을 준비해오고 있는데, 산업은행의 리먼 브러더스 인수가 이에 대한 모멘텀을 제공했을 것으로 점쳐진다. 여기에다, 민 행장 개인은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단숨에 각광받는 금융 CEO(최고경영자)로 떠올랐을 것이다. ■ “리먼 브러더스 인수 결렬은 다행한 일” 이제 비관적인 시나리오로 시공간을 옮겨보자. 산업은행의 인수 발표로 리먼 브러더스가 당장의 위기 상황은 넘기겠지만, 양파 껍질이 벗겨지듯 하나하나 부실이 드러나면서 산업은행마저도 위험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이 시나리오의 요점이다. 리먼 브러더스가 정상화되지 않는다면 산업은행이 국책은행인 까닭에 막대한 정부 재정까지 투입될 수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판단하고 있다. 국민은행의 한 고위 관계자는 “부실 규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리먼 브러더스 인수는 너무 위험했다”며 “결과적으로 산업은행이 리먼 브러더스를 인수하지 않은 것은 다행한 일”이라고 말했다. 물론, 민 행장은 보따리를 쌌을 것이고, 자칫 직무유기 혐의로 법정에 서는 상황까지 연출됐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산업은행의 리먼 브러더스 인수는 없는 일이 됐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양측 협상 결렬의 과정을 다시 한번 되짚어보자. 산업은행은 국제금융공사(KIC)와 자산관리공사에 이어 7월 중순부터 리먼 브러더스의 지분 20%를 사들이는 방안을 리먼 브러더스와 협상했으나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이후 다급해진 리먼 브러더스는 8월 초에 아예 경영권을 넘기는 방안을 다시 산업은행에 제안했다. 협상 결렬의 가장 큰 원인으로는 구조조정 후 자산에 대한 양측의 추정액 차이가 너무 컸던 것으로 꼽힌다. 여기에다 ‘9월 금융위기설’도 산업은행의 리먼 브러더스 인수에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