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9일 치러진 18대 총선 이후 되도록이면 외부 활동을 자제하면서 정중동(靜中動)의 행보를 보여온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친박계 인사는 물론 최근 친이계와 중립계 인사 등과도 비공개 회동을 갖는 등 외연 넓히기에 나서면서, 박 전 대표의 향후 행보가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박 전 대표는 지난달 여의도의 한 중식당에서 권영진·김선동·김성식·윤석용 의원 등 친이계 또는 중립 성향이 강한 4명의 서울지역 초선 의원들과 오찬을 함께 하며 당내 현안을 놓고 가벼운 대화를 나눈 것으로 전해졌다. 이 자리는 지난 7월 박 전 대표에게 전당대회 출마를 강하게 주장했던 권 의원이 우연히 만난 박 전 대표에게 “밥이나 한번 사주시죠”라고 요청해 마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한 의원은 “참석자들은 박 전 대표에게 초선 의원들과 자주 만나서 ‘좋은 말씀’을 많이 해달라고 부탁드렸으나, 박 전 대표는 ‘너무 자주 만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며 겸양했다”고 전했다. ■ 초선 의원들 박 전 대표에 잇단 ‘러브 콜’ 박 전 대표는 최근 김세연·장제원·현기환 의원 등 부산 출신의 중립 성향 의원들과도 만났으며, 이 외에도 대부분 친이계 또는 중립계 초선 의원들이 먼저 박 전 대표에게 만남을 요청해서 몇 차례 초선 의원을 중심으로 친이계나 중립 성향 의원들과 자리를 함께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부터 이달 초까지 박 전 대표와 처음으로 밥을 먹은 초선 의원이 2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식사 모임에 참석했던 ‘비친박계’의 한 의원은 “요즘 정부와 당이 어렵다 보니 원칙을 지키는 박 전 대표의 모습에 끌리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 것 같다”고 말해, 잠행이 길어질수록 오히려 그의 주가는 올라가고 있는 셈이다. 그 이유는 박 전 대표가 당내 차기 대권 주자 중 가장 인지도가 높고 다양한 계층으로부터 고른 지지를 받고 있는 후보 중 하나라는 점과 당내에서 가장 큰 조직과 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게 당 안팎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또한, 친이계 내부가 세포분열을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과 친이계 또는 중립계 의원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현실적 공간이 부족하다는 점도 한몫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지난 9월 7일 한 라디오 프로에서 한나라당 나경원 의원은 “경선 때 이명박, 박근혜계로 계파가 나눠졌는데, 요즘 당내에서 박근혜 전 대표 쪽으로 옮기는 분들이 많다는 얘기가 들린다”며 이 같은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 박 전 대표에 대한 ‘러브 콜’은 당내에서만 이어지는 게 아니라, 지난 9월 3일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 대사의 환송 오찬도 미 대사관 측이 먼저 요청해 이뤄졌다고 한다. 그리고 박 전 대표는 친박 무소속연대가 모태이고 복당 이후 김세연·장제원·현기환 의원이 가입해 외연을 넓힌 ‘여의포럼’ 정기모임에도 최근 두 차례나 방문한 바 있으며, 심지어 8월 26일 회동에는 선약이 있었음에도 일정을 마친 후 뒤늦게 잠시 들르는 등 이래저래 당내 의원들과 접촉면을 확대하는 모습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이와 관련, 박 전 대표의 한 측근 의원은 9월 7일 “박 전 대표를 잘 모르는 초선 의원 들 중에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의원들이 제법 많다”면서 “그런 의원들이 박 전 대표 쪽에 면담을 요청해 온 경우 면담이 이뤄지는 것일 뿐”이라며 정치적으로 확대 해석되는 것을 경계했다. 또 다른 측근도 “박 전 대표가 의도적으로 사람을 만나거나 끌어 모으는 것이 아니라, 중립지대 사람들 중에 박 전 대표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꽤 있기 때문에, 그런 분들과 한두 명 내지는 서너 명씩 만나는 정도”라고 해명하면서 “그러므로 조직적인 외연 확대라든가 그런 의도는 전혀 아니다”라고 적극 부인했다. 이 같은 부인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스스로 극도의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여 왔던 박 전 대표가 계파 내부가 아닌 외부 인사들과 ‘스킨십’을 강화하는 모습은 장기적으로는 먼 미래를 염두에 둔 포석이 아니냐는 정치권의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 외연확대·내공연마 두 마리 토끼 쫓아 이런 가운데, 박 전 대표는 대구지역 경제 살리기와 공부 모임 참석에도 열심이다. 지난 9월 4일 예산 대책을 위한 대구지역 의원 모임에 얼굴을 비쳤던 박 전 대표는 9월 10일 오후 대구지역 경기 활성화를 위한 의원들과의 ‘끝장토론’에 참석해 3시간이 넘게 자리를 함께 하는 등 전통적 지지 기반인 영남권 돌보기에도 열중하고 있다. 경선 때부터 이어져 온 자문교수들과의 공부 모임에도 3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참석하고 있으며, 특히 소속 상임위인 보건복지가족위의 현안과 업무를 익히기 위해 관련 분야의 젊은 교수들을 소개받아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한다. 작은 정부와 감세를 기반으로 한 경제성장을 중시하는 박 전 대표가 복지 쪽으로도 시야를 넓히려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다. 결국, 잠행 기간 중 그는 당 안팎의 외연 확대와 함께 내공 연마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박 전 대표는 최근 친이계 모임인 ‘함께 내일로’ 등의 결성에 자극받은 측근 의원들이 친박계 모임을 결성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하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등 적극적인 대외 행보에는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박 전 대표의 좌장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한나라당 허태열 최고위원은 지난 8월 19일 평화방송 라디오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에 출연해 “박 전 대표에게 ‘저쪽(친이명박계)에서 서클을 만드는데 우리도 의원 모임을 하나 결성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니까, 박 전 대표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저쪽이 한다고 우리도 하면 이건 완전히 계보로 보이지 않겠느냐’고 반대했다”고 전했다. 허 최고위원은 또 “박 전 대표는 ‘저쪽은 저렇게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대로 갈 길이 있는데, 꼭 그렇게 대립적으로 모든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며 박 전 대표가 자신의 계보만 챙긴다는 일각의 주장을 반박했다. 허 최고위원은 정치권 일부에서 박 전 대표를 가리켜 ‘복당녀’라고 표현하는데 대해서는 “박 전 대표가 복당을 주장한 것은 총선 민심을 받들라는 이야기”라며 “그런 이름을 붙여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의 이 같은 신중한 자세는 아무래도 모임을 갖다 보면 ‘자기 계파를 불리려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 당 안팎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박 전 대표는 박희태 대표 취임 후 부활한 당내 최고·중진 연석회의에도 첫 회의 때만 참석한 뒤 계속 불참하고 있다. 이에 대해 허 최고위원은 최근 “박 전 대표는 현재 당직도 당무도 맡고 있지 않은 데, 참석을 하면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고, 현안에 대해 얘기를 하면 대통령이나 이명박 정부에 누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박 전 대표의 생각”이라고 전했다. 이를 뒤집어 보면, 자칫 잘못 나섰다간 견제를 받을 것이란 우려도 깔려 있다. 아직 차기 대선이 4년 이상이나 남아 있는 상황에서 박 전 대표의 공개 움직임이 잦아진다면 “계파 세 불리기를 한다”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최대한 노출 줄이기’란 전략을 선택했다는 얘기로 풀이되고 있다. 한 핵심 측근은 “현재로선 잠행이 최선의 선택이다. 최소한 올해 말까지는 이런 행보가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 ‘미니홈피 정치’ 재개 박 전 대표는 지난 8월 3일 미니홈피 인사말의 내용을 ‘안팎으로 어려운 지금, 삶의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에서 ‘편안할 때 위태로워질 것을 잊지 말라는 옛 말씀은, 그래서 인생살이의 중요한 지침이 될 것입니다’로 바꾸고 ‘미니홈피 정치’를 재개했다. 박 전 대표는 또 이날 홈피에, 지난해 4월 7일 식목일을 즈음해 과거에 찍은 나무심는 흑백 사진을 게시한 이후 1년 4개월 만에, 서강대 재학 시절 바자에서 물건을 포장하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바자에서 물건을 사고 거스름돈을 주고받는 자신과 모친 고(故) 육영수 여사의 모습이 함께 담긴 사진 등 2장의 흑백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도 한 달에 한 번 정도 인사말을 올리거나 외국 방문 소식을 전하는 정도로 미니홈피를 활용해 왔지만, 최근 들어 글을 올리는 속도도 빨라지고 의미심장한 문구들을 사용하며 다양한 정치적 해석을 불러오고 있다. 따라서, 정치권 일각에서는 일단 친박 복당 이후 정치 무대에서 한발 물러나 조용히 지내는 가운데 일상적 소통의 창구로서 미니홈피가 다시 활용되는 것이고, 특히 최근 정국이 어수선한 만큼 이에 대한 간접적 우려가 자연스럽게 표시되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았다. 박 전 대표가 지난 9월 15일 밤 18대 국회 첫 정기국회를 맞아 자신의 소속 상임위원회인 보건복지가족위 활동에 대한 소회를 밝힌데서도 이러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박 전 대표는 이날 자신의 미니홈피에 올린 ‘나의 책임’이라는 글을 통해 “내가 복지위를 선택한 이유는 가장 중요한 우리의 기초적인 삶에 대한 문제를 찾고 싶기 때문”이라며 “이런 문제들이야말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꼭 겪는 삶의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면서 복지위를 소속 상임위로 선택한 배경을 설명했다. 특히, 박 전 대표는 동생인 박지만 씨의 아들인 조카 세현 군의 최근 사진을 게시하면서 “건강하게 자라준 세현에게 사랑을 보내며”라면서 각별한 조카 사랑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처럼 적극적인 대외 행보와는 거리를 두고 미니홈피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알리면서, 현안 챙기기와 상임위 공부, 친박계가 아닌 당내 인사와의 친분 확대 등 차분하게 내실 쌓기에 매진하고 있는 것이 요즘 박 전 대표의 모습이다. ■ 일각에선 ‘2% 부족’ 비판도 그러나, 박 전 대표의 ‘잠행정치’에 대해 “솔직히 답답하다는 느낌이 든다”고 비판하는 의원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수도권의 한 초선 의원이 “미국산 수입 쇠고기 파동으로 일어난 촛불 정국에 이어 불교계 갈등까지 박 전 대표가 나서면 해결될 수 있는 일이 많은데도 그는 주저하고 있다. 그래서 ‘2% 부족하다’는 평이 나오는 것 같다”고 토로한데서도 이 같은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박 전 대표 측도 이 대통령과의 신뢰 문제가 있기 때문에 정치권 전면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나라당과 정부의 어려움을 지켜만 볼 수도 없는 상황이 딜레마라고 인정하고 있다. 일부 보수 논객 사이에선 “박 전 대표가 현 정부를 계속 외면한다면 공동책임론을 면키 어렵다”는 비판도 나온다. 최근 미국의 민주당 경선에서 패한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이 버락 오바마 후보에 대해 갖는 상황과 비슷하다. 박 전 대표의 한 측근은 이에 대해 “보수 진영 전체에 위기가 닥쳐온다면 박 전 대표는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며 “다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지난 8월 16일 한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박 전 대표에 대해 “나라를 걱정하는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세우는 것이 좋겠다”며 “박근혜 전 대표는 어릴 적부터 내가 잘 아는데, 똑똑하고, 능력도 있고, 다 좋다. 다만, ‘친박’이하는 계파 보스 이미지를 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전 의장은 “지난번 한나라당 경선에서 박근혜 전 대표가 당내 투표에선 이 대통령을 이겼던 것이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은 유령이 나와서 찍으라고 부탁한 것의 아니지 않느냐”며 “그러나 대통령은 자기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고, 되려고 막 발버둥 치면 추태만 보이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기대와 우려 속에 잠행정치를 계속하고 있는 박 전 대표가 올 연말을 계기로 복격 진행될 것으로 보이는 잠룡들의 대권 행보에 어떤 식으로 대응 할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