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세계경제가 빠르게 냉각되고 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부실로 불거진 신용 경색 여파로 글로벌 금융시장의 불안이 고조되고 있고, 국제 원유 및 원자재 가격의 급등으로 국내 경제도 경제성장률을 비롯한 제반 거시 경제지표들이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다. 나아가, 경제성장은 둔화되는 가운데 물가는 오르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의 우려마저 대두되는 상황에서, 국내 기업들은 불황을 극복할 돌파구를 찾기 위한 다각적인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리먼브러더스발 금융 쇼크’로 국내 산업계에는 위기감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어, 세계경제 중심지인 미국의 유동성 불안이 국내 기업들에게도 ‘돈줄’을 죄는 악재로 겹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가뜩이나 ‘9월 위기설’로 홍역을 치렀던 재계는 3분기 실적 악화설과 일부 기업의 유동성 위기설, 검찰의 기업비리 수사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면서 전전긍긍하고 있다. 산업계에 따르면,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신청과 메릴린치 매각 등 미국발 금융위기가 세계로 확산되면서 재계는 경기침체·수출위축·유동성 위기에 따른 ‘후폭풍’을 우려하고 있다. 기업들의 3분기 예상 실적도 비관적이다. 삼성전자는 분기 영업이익이 다시 1조원 아래로 떨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LG전자·현대차·포스코 등도 영업이익이 30% 이상 줄어들 것으로 전망됐다. SK에너지 등 정유업계는 환차손과 정제 마진 축소의 이중고에 노출돼 있다. 삼성전자는 LCD TV와 휴대전화 등 북미 수출제품들이 경기 흐름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사태의 추이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현대차는 국내외 투자에서 외자를 끌어다 쓴 비중이 미미해 다소 여유가 있지만, 금융위기가 지속되면 국내 경기침체로 내수가 어려워질 것을 걱정하고 있다. ■ 산업계에 번지는 위기감 현실로… 중소기업이 더 걱정 이처럼 국내 산업계에 불황의 그림자가 짙어지면서 미국·중국·유럽(EU) 등 세계적인 경기 하강 국면에 불황이 장기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는 우리 중소 산업계까지 영향을 주고 있어 조업을 중단한 수출업체들이 늘고 있다. 하이닉스는 9월 18일 경기도 이천공장 내 일부 반도체 생산 라인을 9월 말 폐쇄했다. 청주공장도 일부 제품만 생산하다 점차 문을 닫는다는 계획이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반도체 경기가 침체되자 생산량을 줄여 자금회전을 빨리하기 위해서다. 하이닉스 고위 관계자는 “시장점유율을 확대시키기보다는 현금흐름·재무안정성·수익성을 높이는 방향의 경영이 필요하다고 보고 200mm 공장을 대폭 조업 중단했다”며 “반도체 공급이 과잉인데다 금융위기로 인한 경기 침체와 불황의 골이 깊어지는 상황에서 내린 고육책”이라고 말했다. 건설업체는 지방에 이어 수도권 회사들까지 흔들거리고 있다. 올 들어 8월까지 부도를 낸 수도권 소재 일반 건설사는 34곳으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22% 정도 늘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승승장구해오던 해운·조선업계 경기마저 비상이 걸렸다. 원자재 운송에 쓰이는 벌크 선박의 운임료 수준을 보여주는 발틱운임지수(BDI)는 지난 6월 1만1,689포인트로 올해 정점을 찍은 후 이달 들어 4,760포인트를 기록하며 절반 미만으로 추락했다. 물동량이 급감하면서 운임은 떨어지고 선박은 남아도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전남 목포의 C&중공업은 조선소 건설에 필요한 자금 1,700억 원을 금융기관에서 제때 대출받지 못해 올해 말로 예정됐던 선박 인도를 내년으로 연기했다. 전남 해남에 위치한 대한조선도 은행 보증을 못 받아 조업 일정에 차질을 빚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금융위기로 위축된 국내 금융권이 자금을 회수하거나 대출을 꺼리고 있어 중소기업은 물론 어지간히 자리 잡은 중견기업조차 몸살을 앓고 있다. 중소기업들은 더 걱정이다. 수출기업들은 당장은 환율 급등에 따른 환차익을 보고 있지만, 미국의 금융위기가 글로벌 경기 위축으로 이어져 수출이 줄고 외화자금 조달이 어려워질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특히, 외화차입금을 안고 있거나 환율 하락 피해를 막기 위해 환을 헤지해둔 업체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피해액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폴리에틸렌을 취급하는 무역업체 A사는 지난해 하반기에 환차손 피해를 줄이기 위해 환변동 보험에 가입했지만, 올 초부터 환율이 급등하는 바람에 더 큰 피해를 봤다. 이 회사 관계자는 “환차손으로 인한 피해가 만만치 않은데다 지난해 10월부터 한국은행이 달러화 대출을 규제하면서 제때 자금을 조달하지 못해 피해가 더 커졌다”고 토로했다. 파주의 반도체 패키지 생산업체 B사도 “올 상반기 100억 달러 규모의 외화자금을 차입했는데 별도로 환을 헤지하지 않아 현재 평가 환차손이 어마어마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문제는 세계경제의 불황이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전망돼 우리 기업들의 어려움이 쉽게 개선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국제무역연구원은 금리를 내리고 대출규제를 줄이는 등 수출기업들의 자금 부담을 덜어줄 대책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LG경제연구원 신민영 수석연구위원은 “금융기관들이 대출을 꺼리면서 신용창출기능이 약화돼, 세계경제 전체적으로 성장세가 약화되고 이에 따라 수출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설명했다.
■ 한달간 마리끌레르·트래드클럽 등 3곳 부도 어려운 경제상황으로 소비자들의 씀씀이가 줄어드는 바람에 중소 패션업계에는 ‘줄도산’ 바람이 불고 있다. 여성복 회사인 ‘패션네트’가 8월에 도산한데 이어, 9월 들어 남성 정장 브랜드 트래드클럽을 갖고 있는 ‘유앤드림’이 쓰러졌다. 국내 중소 패션업체들이 부도 공포에 휩싸이며, 최근 한 달여 동안 3곳이 도산했다. 그나마 현상 유지를 해온 중견 패션업체들마저 수익성이 나쁜 브랜드를 접는 등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경기 한파로 소비가 위축돼 자금 사정이 열악한 업체들이 직격탄을 맞으면서 패션업계 전체가 술렁이고 있다. 추석 연휴 직전인 9월 10일 남성복 브랜드 ‘트래드클럽’과 ‘WXM’을 운영해온 트래드클럽&21이 최종 부도 처리됐다. 올 초만 해도 브랜드 리뉴얼과 함께 탤런트 이서진을 모델로 기용하며 적극적으로 유통망 확보에 나섰던 업체라 패션업계에 충격이 컸다. 이어 9월 12일엔 트래드클럽&21의 관계사이면서 캐주얼 ‘티피코시’와 ‘제이코시’를 둔 유앤드림도 부도를 냈다. 무리한 사업확장과 경기악화의 엇박자로 자금난에 시달리면서 연쇄 부도를 맞았다. 이에 앞서 8월 달엔 마리끌레르·이지엔느·이지엔느스포츠·에부 등을 운영하며 연간 1,200억 원대 매출을 올리던 패션네트가 갑작스레 부도를 냈다. 직원들이 단체 휴가를 떠난 사이 회사가 문을 닫아 직원들은 물론 유통업체들까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외에도 업계에선 몇몇 중소 패션업체들의 위기설이 돌고 있다. 그나마 자금사정이 나은 중견 패션업체들도 이익을 내지 못하는 브랜드들을 일제히 정리하고 있다. 최근 2~3년 사이 공격적으로 론칭했던 신규 브랜드를 접고 대표 브랜드에만 집중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톰보이는 지난해 선보인 세컨드 브랜드 ‘잇셀프바이톰보이’를 최근 접었다. 예신퍼슨스도 영캐주얼 브랜드 ‘허스트’를 백화점 매장에서 철수하고 주력인 ‘코데즈컴바인’에만 집중한다는 방침이다. 여성 캐주얼 ‘크로커다일’을 운영하는 형지어패럴은 여성복 ‘끌레몽뜨’ 매장 운영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매장을 올 초 100개까지 늘리며 급속도로 외형을 키웠지만 2006년 48억 원, 지난해 37억 원의 영업 손실을 냈다. 형지어패럴 관계자는 “밀려드는 수입 브랜드와 차별화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잠시 매장 운영을 중단하고 리뉴얼 작업 중”이라고 말했다. 결국 업체들마다 장사가 안 되는 신규 브랜드를 접고 기존 브랜드라도 지키겠다는 분위기다. 위축된 국내 경기가 단기간에 회복되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자금 확보를 위해 서둘러 사옥을 정리하는 업체도 나오고 있다. 조이너스·꼼빠니아·예츠·트루젠 등 가두점 중심으로 매출을 유지해오던 인디에프(옛 나산)는 서울 도곡동 본사 사옥을 1,000억 원에 팔았다. 인디에프는 2년 전 세아상역에 인수된 뒤 캐릭터 캐주얼 브랜드 ‘테이트’를 전개하는 등 공격적인 경영을 폈지만, 매출 부진·이자비용 증가 등으로 사옥 매각을 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같은 중견·중소 패션업체들의 어려움은 해외 명품 브랜드와 대기업이 국내 패션시장을 주도하면서 고가 의류시장에 발을 붙이지 못하는 동시에 중저가 시장에선 소비자들이 싼 옷만 찾아 갈수록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연초만 해도 경기 호전을 예상해 매출 목표를 높이고 생산량을 늘린 곳이 많았지만, 갈수록 경기가 나빠져 업체마다 세일을 앞당기거나 매장 점주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지원책을 마련하는 등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한국경제연구원 배상근 연구위원은 “미국의 부동산발 금융위기가 중국·유럽 등으로 확산되면서 이들 국가의 소비가 급격히 줄고 있어 수출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 산업계가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 4/4분기 수출경기 ‘최악’ 전망 수출기업들은 올해 4/4분기 수출경기가 전분기보다 부진할 것으로 내다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올 4/4분기 전망치는 2002년 수출기업의 체감경기 전망치를 집계한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국제무역연구원은 국내 806개 수출업체를 대상으로 실시한 ‘수출산업경기전망(EBSI)’ 조사 결과, 올 4/4분기 EBSI 지수는 82.8로 전분기(90.6)보다 크게 하락했다고 밝혔다. 이는 2002년 3/4분기(144.5) 조사를 시작한 이래 가장 낮은 수치다. 그 동안 가장 낮은 수치는 2005년 1/4분기의 90.5였다. EBSI 수치는 100을 기준으로 그 이상이면 그만큼 경기호전을 전망하는 기업이 많음을, 100 이하라면 반대임을 의미한다. 최근 원·달러 환율 변동성 확대,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수출상품 제조원가 및 수출용 원자재 수입 부담이 커져 수출경쟁력·수출채산성·자금사정 등 대부분의 항목이 부진할 것으로 예상됐다. 업종별로는 경공업(84.6)이 특히 나빠지고, 1차산업(61.3)과 중화학공업(87.2)의 수출경기 역시 부진할 것으로 전망됐다. 품목별로 보면, 기초산업기계·산업용 전자제품·가정용 전자제품 등이 보합세를 보이고, 수송기계(84.2)·전자부품(83.5)·철강제품(82.5)·정밀화학제품(88.9)·산업기계(84.8) 등 대부분의 수출주력품목이 부진할 것으로 조사됐다. 국제무역연구원 관계자는 “4/4분기 전망이 부진할 것으로 전망한 것은 우리의 주수출시장인 미국·중국 및 일본 등의 경기 불확실성에 기인한 것”이라며 “최근 미국의 금융위기 사태로 수출업계의 체감경기는 더욱 위축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한편, 수출기업들은 올 4/4분기에 원재료 가격 상승(27.5%)과 원화환율 변동성 확대(17.9%), 수출대상국 경기 부진(15.5%)을 3대 애로요인으로 지적했다. ■ 국제 원자재값 완만한 하락세 연초부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국제 원자재 가격이 달러화 강세와 수요 둔화 등의 영향으로 완만한 하락세를 지속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원자재 가격 급변동의 원인과 전망’ 보고서에서 “2008년 하반기 원자재 가격의 급격한 조정은 국제 원자재 가격에 거품이 있었음을 입증한다”면서 “따라서 투기수요보다는 가격 결정의 근본적인 원인인 수급 상황을 더욱 주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달러화 강세와 수급 개선의 영향으로 원자재 가격은 올해 하반기에도 완만한 하락세를 지속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구소는 “가격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자원확보정책의 일관성을 견지해야 한다”면서 “원자재 가격이 하락하더라도 원자재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기업과 정부의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연구소는 “자원의 희소성은 원자재 가격의 장기적 상승을 유도할 수밖에 없는 만큼 적극적인 자원확보정책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특히, 자원개발사업은 일관성 있고 지속적인 장기투자가 요구된다면서 “그 동안 정부는 가격 하락기에는 원자재를 수입해 비축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가 급등하면 자원개발을 강조하는 등 정책기조의 일관성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삼성경제연구소 김화년 수석연구원은 “기존에는 대부분의 품목들이 원유에 높은 연동성을 보였지만 앞으로는 품목별로 가격이 차별화될 것”이라면서 “정부는 원자재 가격이 하락하더라도 안정적으로 자원을 확보하고 대형 자원개발 전문기업을 육성하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