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대 정기국회 첫 국정감사가 중반에 접어들고 있다. 매년 10월마다 실시되는 국정감사는 지난 1972년 유신헌법 제정으로 폐지됐다가 1988년 부활했다. 새로워진 1988년의 국감에서는 전두환 정권의 각종 비리가 파헤쳐져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과정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인제 의원 등 정치인들이 각광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매년 정기국회 중 국정감사에 할당되는 기간은 20일에 불과해, 짧은 기간 동안 400여 개에 달하는 피감기관을 상대로 감사를 실시함으로써 시간적·인력적 무리가 발생한다. 매년 ‘부실국감’이라는 비판이 따라붙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올해 진행되고 있는 국감은 국회의원들의 높은 관심 속에서 진행되고 있어 고무적이다. 정권교체와 맞물린 국정감사라 전 정권과 현 정권에 대한 평가가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더 많은 관심이 모이고 있다. 국감 첫날 국회의원 출석률은 사상 처음으로 100%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전과 달리 시청각 자료 등이 효과적으로 사용된 입체적인 질의가 나오는 등 새로운 시도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하지만, 곳곳에서 이전 국정감사에서 문제점으로 지적돼 온 구태가 재연되기도 했다. 짧은 감사기간에 따른 과부하로 국감이 부실하게 준비되거나 자료 부실 등의 문제는 만성적인 문제점이다. 처음에 각 당이 내건 정책에 대한 국감이 아니라 정쟁의 장으로 이용되는 모습도 보는 이를 씁쓸하게 하고 있다. ■ 여권판독기 등장, 외통부 ‘깜짝’ 단순히 질의서를 읽기보다, 시각물을 이용하거나 일정 상황을 설정한 시연은 답변자와 시청자에게 문제의식을 각인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이번 국정감사의 새로운 트렌드로 시청각 자료가 떠오르는 것은 여기서 기인한다. 이 방법은 제한된 시간에 피감기관의 과실을 증명하고 의원 자신을 부각시키기에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7일 친박연대 송영선 의원(외교통상통일위)은 외교통일부 회의장에 사제 여권판독기를 갖다 놓고 전자여권의 개인정보 유출 문제를 지적했다. 송 의원은 호텔 숙박체크인 과정을 시연하면서 전자여권을 열지 않아도 여권에 기입된 개인정보가 곧바로 판독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테러리스트나 여권을 사고 파는 이들이 호텔 카운터에 판독기를 내장한다면 1m 내에 있는 여권의 정보를 다 알 수 있다”면서 “이 판독기는 용산에서 20만 원에 구입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카운터에 있는 접수자가 여권 정보를 거래하는 사람과 계약을 맺었다면, 여권을 놓는 카운터 밑에 미리 프로그램이 내장된 판독기를 놓고 신원정보를 유출할 수 있다”며 “전자여권의 칩이 주파수로 조정되는 비접촉식 ‘RFID 방식’으로 되어 있어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사진전사식보다 보안이 강화된 것도 아니고, 위·변조가 방지된 것도 아니고, 출입국심사 절차가 빨라지지도 않은 전자여권을 만들기 위해 764억 원의 예산을 배정한 이유가 뭐냐”며 “이 예산 중 44%는 로열티로 지불된다”고 밝혔다. 송 의원은 “외통부는 전자여권의 취약점을 인정해야 한다”면서 “취약점 보완을 위해 전자여권 발급 여부를 개인선택권으로 허락하고, 지문정보 수록은 완전 취소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허가한 판독기를 통해서만 판독이 가능하다는 외교부의 주장을 정면 반박한 것이다. 송 의원은 전자여권이 오히려 사진전사식 여권보다 더 신속하게 정보가 유출된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증명했다.
■ 영수증 일일이 스캔…성실성 엿보여 보건복지위에서는 시각물을 이용한 질의가 잇따르고 있다. 민주당 전현희 의원은 대한의사협회·치과의사협회·한의사협회가 의료광고 심의료를 편법 전용한 사실을 적발, 문제시되는 영수증을 일일이 스캔해 공개했다. 전 의원이 제시한 영수증들에 따르면, 의협은 광고심의 수수료를 식사비·술값·주유비·골프 접대비·만년필 구입비·택시 영수증 등에 사용했고, 심지어 책상·테이블·소파 등에다 2700만 원짜리 차량까지 구입했다. 치협도 직원 회식비, 명절 선물세트 구입비, 면세점 물품구입 등으로 사용했고, 한의협도 백화점 물품구입비, 부의금, 명절 선물 세트 구입비, 불명확한 업무추진비 등으로 지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2007년 4월부터 2008년 6월을 기준으로, 의협은 8000여건, 치협은 1500여건, 한의협은 4000여건의 의료광고를 사전 심의했으며, 수수료 명목으로 의협은 9억 원, 치협은 1억4000천여만 원, 한의협은 4억여 원 등 총 14억 원을 징수했다. 전 의원은 “수수료 수입은 의료광고 사전심의 제도가 의료법상 국가업무여서 국고에 준하는 공금이므로, 이를 보관하는 입장에 불과한 협회가 이를 자의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라고 질타했다. ■ 시리즈물 국감 자료도 눈길 단발성 질의 자료가 아닌 시리즈물 형식의 자료를 준비한 의원도 있다. 이광재(민주당) 의원은 18대 국회 국정감사 첫날부터 무려 6권의 정책보고서를 펴냈다. 일반적으로 의원들이 국감이 끝나도록 3~4개의 정책보고서를 내기도 힘들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보고서를 시리즈로 쏟아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 의원이 이날 펴낸 정책보고서는 ‘으랏차차! 우리 경제’란 제목 아래 환율 불안, 산업은행 민영화, 한국판 서브프라임 사태 우려, 이명박 정부의 경제팀 평가, 공공기관 선진화 방안, 공공기관장 사퇴 종용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의원은 7일에도 종합부동산세, 세제개편안, 투자부진, 지방재정, 교육, 예산 등을 주제로 6권의 정책보고서를 추가로 발표하고, 이후에도 4∼5개의 보고서를 내기 위해 준비작업을 진행 중이다. 주승용 의원도 이틀 간 7권의 정책보고서를 펴내 눈길을 끌고 있다. ■ ‘여야 힘겨루기’ 고질병 하지만, 최근 국감에서 ‘막말파문’과 ‘정쟁국감’ ‘피감기관과의 향응 파문’에 시작부터 힘빠지는 모습이 재현된 점은 문제로 지적된다. 의원들의 준비 부족과 피감기관의 부실 자료 제출 등으로 국감 무용론마저 제기되고 있다. 18대 국회에서는 초선 의원들이 행정부 권력 감시라는 본연의 기능을 되찾자는 의지에 찬 결의가 돋보이기도 했지만, 정작 국감에서는 구태가 재연되고 있다. 국감 첫날인 6일에는 기획재정위에서 한나라당 김재경 의원이 “기획재정부의 국감자료 제출은 지극히 부실했고, 50건 정도를 요청했는데 17건밖에 되지 않아 국감을 중단하고 자료 검토를 하고픈 심정”이라고 푸념했다. 실제로 국내 자살자 현황 자료가 상임위의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6일 보건복지위에 따르면, 정부부처별로 5년 사이 5000명 가까이 차이가 났고, 연도별 자살자도 제각각으로 드러났다. 정쟁도 부실국감의 요인이다. 7일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에서는 YTN 대량 징계 사태를 놓고 민주당이 진상조사단 구성을 요구하면서 파행을 겪었다. 같은 날 행정안전위원회 국감에서는 자료 제출 부실 문제로 정회 소동이 빚어졌다. 여야는 국감 뒤에도 증인 채택을 둘러싸고 진통을 겪고 있다. 또, 지난 17대 국회에서 노회찬 전 의원이 발표한 1988~2005년 일반 증인의 국감 출석 자료 현황에 따르면, 일반 증인 2152명 가운데 17%인 370명이 불출석했다. 또한, 금융위기 이외에 별다른 빅 이슈가 없는 탓에 다소 맥빠지는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한다. 172석의 거대 여당 앞에 야당의 목소리가 줄어든 탓도 있지만, 여당 의원들도 나름대로 고민이 깊어 보인다. 국감을 준비해 온 여당 의원실 보좌관은 “19대 공천권을 쥔 청와대 눈치보기 바쁘다”고 말했다. 여기에다 18대 국회에 과거와 같은 파이터가 없다는 점도 꼽힌다. 한나라당 이춘식 의원은 “언론의 관심사가 금융대란이니 타 상임위는 뉴스 가치가 떨어지는 것 같더라”고 말했다. 의원들의 국감 성실도가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지만, 한 초선 의원은 “우리도 나름대로 정책국감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