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변하기 어려운 보수 집단 중 하나였던 정치권에서 연공서열이 파괴되고 관행이 무시되는 가운데, 10월 6일부터 시작된 제18대 국회 첫 국정감사에서 차기 대권 반열에 오를지도 모를 ‘할 일 바쁜’ 거물 정치인들이 국감장을 지키며 질의는 물론 대안까지 내놓는 등 초선 의원들 못지 않은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어 ‘후배 의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예전에는 전·현 당 대표, 최고위원, 원내대표, 장관 출신 등 주요 당직자나 중진 의원들은 국감장에서 보기가 쉽지 않았으며, 나온다 하더라도 인사치레로 잠깐 얼굴만 보이고 돌아가는 등 국감이 초·재선 의원들 위주로 진행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결론을 내리기에는 빠른 감이 없지는 않지만, 10월 6일 국정감사 첫날 의원 출석률이 역대 국감 사상 처음으로 100% 출석률을 보이는 등, 18대 국회 첫 국감이 예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번 국감은 정치적 도약을 위해 정책 전문가의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측면에서, 무책임한 폭로나 비방 등의 정치공방에서 벗어나 정책국감으로 변화하는 흐름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실정에서 ‘거물 정치인’들이 구태(舊態)에 사로잡혀 뒷짐만 지고 있다가는 언제 도태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따른 참여라고 정치권 일각에서는 풀이하고 있다.
■ 박근혜, 국감 대비 많은 공부 돋보여 국회 보건복지가족위원회 소속인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는 초선의원처럼 국감장을 지키며 잔잔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목소리로 피감 기관장들의 기선을 제압하면서 질의에 이어 대안까지 내놔 피감 기관장으로부터 “참고로 하겠다”는 답변을 얻기도 했다. 박 전 대표는 국감 첫날인 6일 보건복지가족부 국감에서 전재희 장관을 상대로 위해식품 회수대책과 복지제도 전달체계를 꼼꼼히 따진 뒤 보건당국의 대응부재를 문제 삼으며 대안까지 제시했다. 박 전 대표는 “최근 멜라민 사건을 계기로 정부에서 많은 조치를 취하고 있지만 여전히 국민들의 불안감은 가시지 않고 있다”며 보건당국의 납득할 만한 조치가 아직 취해지지 않고 있다고 박근혜 의원을 추궁하는 등 야당 못지않게 신랄한 대응을 보였다. 박 전 대표는 “미국과 중국 간엔 위해 우려 식품을 정부에 등록하고 사전검사를 거치도록 약정을 맺었다. 우리도 위생협정을 개정하는 조치가 필요하다”며 “위해식품은 회수가 중요하다. 소형 상점에 대해선 연락망을 확보해 문자 메시지나 빠른우편으로 알려주면 어떻겠나”라고 강조하자, 전 장관은 “그것까지는 생각 못했다. 앞으로 적극 활용하겠다”고 답변했다. 이어 박 전 대표는 “작은 정부를 사회복지를 줄이자는 뜻으로 오해해선 안 된다”며 “국민 혈세가 새는 곳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지, 사회복지 전담 공무원같이 꼭 필요한 인원은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전 대표는 7일에 이어진 보건복지가족부 감사에서 “정부가 신성장동력 마련을 위해 제시한 ‘보건의료 연구개발(R&D) 중장기 계획’의 핵심과제가 불과 4개월 새 바뀌어 혼선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복지부는 지난 5월 ‘보건의료 R&D 중장기 계획’을 발표하면서 “순환기·내분비·신경계 등 중대질환과 감염·소화기·호흡기 등 생활질환 등 질병 중심의 R&D가 강화될 것”이라고 예고한 바 있으나, 지식경제부는 9월 진단·치료제·임플란트·융합의료기기 등 4개 분야에 대한 R&B가 강화된다고 발표해 복지부와 다른 입장을 보였던 것이다. 이에 박 의원은 “보건의료분야 중에서 집중적으로 R&D 하겠다고 발표한 대상이 몇 달 사이에 이렇게 다른 것은 문제”라며 선택과 집중을 주문했다. 그리고 박 전 대표는 신약의 약값 중북 인하와 관련해 “신약은 기등재 약의 목록정비 때 한 번, 특허가 만료될 때 또 한 번 약값이 인하돼 복제약보다 약값이 더 낮아질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며 “이렇게 되면 연구해서 신약을 개발하기보다는 복제약만 만들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다. 또한, 박 전 대표는 “이러한 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신약의 경우 기등재 약 목록정비 제도를 유예했다가 특허가 만료된 후에 적용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자, 전 장관은 “박 의원님 말씀대로 하거나 이중 인하가 안 되도록 하는 방안도 있다”고 말해 제도를 수정할 계획이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박 전 대표는 국감 전부터 전문가들로부터 조언을 듣는 등 많은 준비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표는 멜라민 함유 식품파동이 일어나자 9월 27일 자신의 미니홈피를 통해 “요즘 중국산 멜라민 파문으로 국민들의 불안이 커지고 있어 걱정이 크다. 지금까지도 어느 제품에 어느 정도까지 들어갔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국민들이 먹는 것만큼은 걱정하지 않고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국가가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책무이자 책임”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박 전 대표는 “차제에 보다 확실한 식품검역 체계를 만드는 계기로 삼아야 하고,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국가에서 철저하게 관리해야 할 것”이라며 “국민들의 먹거리 안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면서 국감에 임한 것으로 전해졌다.
■ 정몽준, 외통위에서 장관들 무차별 질타 국회 외교통상통일위 소속인 한나라당 정몽준 최고위원도 6일 열린 통일부 국감에서 김하중 통일부 장관과 날카로운 일문일답을 이어 갔다. 이날 정 최고위원이 “북한은 ‘우리 민족끼리’란 용어를 사용하며 민족주의를 강조하는데, (통일부는) 같은 동포가 고생하는 것에 대해선 얘기하지 말라고 한다”며 “장관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했다. 이에 김 장관이 “‘우리 민족끼리’라는 말은 북한이 남남갈등을 위해 쓰는 말이므로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아도…”라고 답변하자, 정 최고위원은 김 장관의 답변이 끝나기도 전에 “언제 장관더러 민감하게 반응하라고 했느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장관으로서 (북한 인권에 대해) 최소한의 답변을 할 책임이 있다는 거다”라고 강하게 질책했다. 정 최고위원은 15대 국회 이래 줄곧 외통위를 지켜온 것으로 알려졌다. 정 최고위원은 외교통상부 국감에서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에게, 일본이 1996년 5월 배타적 경제수역을 독도로 정한 반면, 1997년 7월 우리 정부가 배타적 경제수역을 울릉도로 정한 것에 대해 “독도 침탈 의도에 지나치게 안이하게 대처했다”며 “배타적 경제수역을 울릉도로 정한 정부, 대한제국 말기에 일본의 이익을 대변한 정부 책임자와 같다”고 질책했다. 한편, 1일 한나라당이 ‘한국의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전략’이라는 주제로 개최한 ‘수요정책마당’ 토론회에서 한미 FTA의 국회 비준 시점을 놓고 당내 의원들 간에 치열한 격론을 벌였다. 이 자리에서 정 최고위원은 “미국의 대선이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언제 비준을 해야 할지 (내부적으로) 의견을 모아야 한다”며 “17대 때처럼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국회 내 기구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중국발 멜라민 공포가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한나라당 지도부는 9월 29일 윤여표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여의도 당사로 불러 가능한 한 빨리 사태 수습에 나서줄 것을 촉구하며 식약청의 안이한 태도와 늑장대응을 질타했다. 이 자리에서 정 최고위원은 “식약청장이 보고에서 멜라민의 유해성에 대해 ‘독성이 매우 약한 화학물로 인체 발암물질로 분류할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인체 유해가 적다는 점을 강조하려 한 게 아니냐”며 “매우 적절치 않은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홍준표 원내대표도 “정 최고위원의 지적처럼 발암성 물질이 아니라고 아무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보는 것은 국감 때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발언”이라며 “이 말을 보고에 넣은 자체가 식약청이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 정세균, 수십개 질문 만들어 ‘기관총’ 질의 역시 국회 외통위 소속인 민주당 정세균 대표도 국감 질의에 나서 “‘비핵 개방 3000’은 상생과 협력하고는 (의미가) 다른 정책”이라며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따졌다. 특히, “이 대통령이 북한에 연락사무소 개설을 제안한 것은 진정성도 없고 망신만 당한 케이스”라며 목소리를 높이면서 계속 20여 개의 질문을 던지던 정 대표는 김 장관에게 “아무 반응도 없는 대화 제의만 계속하지 말고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 수 있는 방안을 대통령께 말씀드리고 야당과도 협력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에 김 장관이 “북한이 10·4선언을 무조건 이행하라고 요구하고 우리의 대화 제의를 거절하고 있다”며 “북한의 10·4남북정상선언 이행 요구로 남북관계가 어려워졌다”고 주장하자, 정 대표는 “남북관계는 상대가 있는 중차대한 문제인데 양측의 최고책임자가 합의한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 누가 진정성을 믿고 대화 상대로서 신뢰를 보내겠느냐”며 “10·4선언이 남북관계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면서 합의정신을 존중하고 있다는 말도 모순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정 대표는 YTN 노조원 해직 파문과 관련해 “한마디로 10월 7일은 제2의 언론 대학살로 기록될 잘못된 날”이라고 규정하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7일은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에서 민주당이 가장 크게 벼르고 있는 최시중 방송통신위원회에 대한 감사가 있는 날이어서 위원들과 함께 전의를 불태웠던 것이다. ■ 이회창, ‘강소국 연방제’ 제시 역시 외통위 소속인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는 7일 열린 외교부 감사에서 유 장관에게 “북미 협의에서 북한이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에게 검증 대상을 영변 핵시설로 제한하는 내용이 있었느냐”고 질문하자, 유 장관은 “북핵 검증 대상은 모든 핵시설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며 “북한이 제출한 핵 프로그램 신고서를 대상으로 1차 목표를 협의 중에 있다. 따라서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UEP) 등은 언제 어떻게 다룰지 기술적인 사항으로 남아 있다” 고 밝혔다. 이 총재는 8일 한나라당이 입법을 추진하고 있는 ‘사이버 모욕죄’와 관련해 “현행법으로도 (처벌이) 가능한데 굳이 특별법을 만들어 다스리겠다는 것은 지금 사이버상에 여러 형태로 (존재하는) 표현들을 제압하겠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 총재는 “인터넷에 난무하는 무책임한 사이버 언어폭력은 반드시 근절돼야 한다”면서도 “다만 폭력을 규제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이나 집권층에 대한 정당한 비판·평가를 규제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주장했다. 이 총재는 정부가 발표한 100대 국정과제에 지방행정체제 개편이 포함된 것과 관련해 “정부의 지방행정조직 개편안은 시·도를 없애고 지방행정조직을 단순화해 60~70개의 광역시를 만든다는 것인데, 이는 중앙 지배권을 더욱 효율화하기 위한 제도일 뿐”이라며 “국가 발전의 엔진을 찾는 방법은 강소국 연방제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거물 정치인’들의 적극적인 국정감사 참여가 자신들의 정치적 도약을 위해 정책 전문가의 이미지가 중요해지는 흐름을 반영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기는 하지만, 정치를 한 단계 상승시키는 데는 적지 않은 역할을 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