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체류 중인 이재오 전 최고위원의 조기 귀국설 논란이 금융위기로 뒤숭숭한 정국을 외면한 채 집권여당인 한나라당이 ‘친이’ ‘친박’ 등 계파 간 신경전으로 또다시 갈등이 불거질 조짐을 보이고 있어 정치권의 주목을 받고 있다. 논란의 발단은 친이명박 세력 내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이 전 최고위원의 조기 귀국설을 흘리면서 당내 친이 직계 인사들의 움직임이 최근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친이 직계의 이러한 움직임은 지난해 대선 경선 당시 친이 세력의 3두 마차였던 이재오·이상득·정두언 의원 등 세 사람 가운데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이 전 최고위원뿐이라는 주장과도 맥이 닿아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1일 이명박 대통령의 직계로 분류되는 ‘안국포럼’ 출신 의원 12명은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만찬을 갖고, 정치 현안을 두루 협의하면서 일부 의원들이 이 전 최고위원의 귀국 문제를 적극 제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이 대통령은 별다른 언급 없이 “잘 있다고 하드냐”는 안부 정도만 물어봤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어떤 식으로든 이 전 최고위원의 귀국과 관련해 구체적인 논의가 있었을 것이라는 관측이 정치권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친이’계가 지금 시점에서 이 전 최고위원의 귀국을 열망하는 이유는 최근 당내 기류가 박근혜 전 대표에게 힘이 쏠리는 것을 막을 사람은 이 전 최고위원이 가장 적임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 朴, ‘친이’ 중립계 의원 회동 요청 잦아 박근혜 전 대표는 그 동안 공식적인 정치 행사나 모임 외에는 거의 ‘정중동’의 행보를 보였으나, 지난 여름부터 친박계 인사는 물론 최근 친이계와 중립계 인사 등과도 접촉면을 확대하는 등 외연 넓히기에 나서고 있어 향후 행보가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박 전 대표와 지난 8월 우연히 마주친 같은 당 권영진 의원이 박 전 대표에게 “밥 한번 사주시죠”라고 요청해, 권영진·김성식·윤석용 의원 등 친이계 또는 중립계 초선 의원들과 오찬을 함께 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러한 사실이 공개됐다. 당시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한 의원은 기자들과 만나 “참석자들은 박 전 대표에게 초선 의원들과 자주 만나서 ‘좋은 말씀’을 많이 해달라고 부탁했고, 박 전 대표는 ‘너무 자주 만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며 겸양했다”고 전했다. 박 전 대표는 그 뒤에도 김세연·장제원·현기환 의원 등 부산 출신의 중립 성향 의원들과도 만났으며, 이 외에도 몇 차례 초선 의원을 중심으로 친이계나 중립 성향 의원들의 요청으로 자리를 함께 한 것으로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박 전 대표는 이은재·조윤선·정옥임·김소남 의원 등 여성 비례대표 의원들의 요청에 따라 처음으로 회동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여성 의원들이 “그 동안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바쁜 와중에도 참석해주셔서 감사하다”며 “말씀도 참 격의 없으시다”고 인사말을 건네자, 박 전 대표는 “이번 국회에서 전문성 있는 의원들이 많이 배출돼 기쁘다”며 “18대에서는 정말 달라진 국회의 모습을 보여주자”고 화답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박 전 대표는 특히 정옥임·이은재·조윤선 의원 등 당시 미국 공화당·민주당 전당대회에 다녀왔거나 외교 전문가인 의원들의 얘기를 경청하는 등 의원 외교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외에도 박 전 대표는 몇 차례 초선 의원을 중심으로 친이계나 중립 성향 의원들과 자리를 함께 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대부분 이들 의원이 먼저 박 전 대표에게 만남을 요청했다는 후문이다. 또한, 최근에는 지난해 경선 때 경쟁자인 이명박 당시 후보를 지원했던 뉴라이트 운동의 대부격인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의 요청으로 그와 만나기도 해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이렇듯 박 전 대표에게 만나자는 요청이 쇄도하고 있는 이유는 당내 차기 대권 주자 중 당내에서 가장 큰 조직과 세를 가지고 있다는 점과 다양한 계층으로부터 고른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 당 안팎의 시각이다. ■ TK 박근혜 대세, PK ‘월박’ 늘어나 그리고 친이계 내부가 세포 분열을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과 초선 의원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현실적 공간이 부족하다는 점도 한 몫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얼마 전 나경원 의원이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지난 경선 때 이명박·박근혜계로 계파가 나눠졌는데, 요즘 당내에서 박근혜 전 대표 쪽으로 옮기는 분들이 많다는 얘기가 들린다”며 이 같은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 즉,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실망감이 번지면서 한나라당 안에서는 가장 ‘차기’에 근접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박 전 대표 쪽으로 힘이 쏠리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주이야박’ ‘주박야이’ ‘월박’ ‘복박’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주이야박’은 “낮에는 친이, 밤에는 친박”이라는 뜻이며, ‘주박야이’는 그 반대로 “낮에는 친박, 밤에는 친이”라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월박’은 “친이에서 친박으로 넘어온 의원”들을 뜻하는 말이며, ‘복박’은 “친박에서 나갔다가 다시 복귀한 의원들을 뜻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박 전 대표에 대한 힘 쏠림이 가시화 되자,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박 전 대표와 밥먹는 자리에 안 가면 더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으며, 심지어 ‘친이’ 의원들 모임에서도 “TK(대구 경북)의 구심점은 박 전 대표가 돼야 한다”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는 얘기도 들리고 있다. 또한, 부산 지역에서는 친이계의 적극적 지원으로 당직을 맡고 있는 안경률 사무총장만 고군분투할 뿐, 다른 의원들은 모두 암암리에 ‘월박’했거나, 최소한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의원들이 이처럼 계파를 넘나드는 위험을 감수하는 이유는 오는 2012년 19대 총선 공천권이 누구한테 있느냐에 민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어차피 2012년에 이 대통령에게 공천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누가 당을 장악할지 ‘미래권력’쪽으로 쏠리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11월 3일 박 전 대표는 정부가 최근 빌표한 수도권 규제완화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지방 경제를 살리기 위한 투자환경 개선 등 현실적 대안을 먼저 내놓고 수도권 규제 완화를 해야 하는데, 현실적 대안이 없이 전면적으로 하는 것은 선후가 바뀐 것”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 박근혜, 수도권 규제에 직격탄 이어 박 전 대표는 “지방경제를 살리기 위한 대책이 반드시 전제돼야 한다”면서 “수도권 규제도 단계적으로 풀어 나가는 게 옳은 방향이고, 그렇기 때문에 선후가 바뀐 것”이라고 처음으로 정부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박 전 대표는 기자들이 “이 전 의원의 조기 귀국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질문을 던지자,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 관련된 일이 아니다”며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처럼 박 전 대표가 침묵을 깨고 수도권 규제 완화와 관련한 발언을 이어가는 것은 수도권-지방 구도로 사실상 전국을 편가를 수 있는 사안인 만큼 이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밝히고 넘어가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작심하고 얘기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분석이 많다. 단순히 이명박 정부 정책에 대한 지지· 비판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 지도자로서 향후 자질을 검증할 수 있는 잣대로서 이 문제가 작용할 수 있는 만큼, 미리 입장을 정리하고 있는 셈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박 전 대표는 최근 대하빌딩에 있는 자신의 후원회 사무실도 폐쇄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 한 측근은 “비용 문제도 있고 큰 규모의 사무실을 유지하는 것이 조직을 관리하는 모양새로 비칠 우려도 있어 폐쇄를 결정했다”면서 “박 전 대표는 내년까지는 일체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고 조용히 있겠다는 생각이 확고하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 사무실을 함께 사용하던 외곽 조직 모임인 ‘희망포럼’은 박영식 전 연세대 총장을 이사장으로 법인 등록을 마친 뒤, 후원회 사무실을 포럼 사무실로 바꾼 것으로 전해졌으나, 이에 대해 박 전 대표는 “포럼은 포럼 그 자체로 봐야 한다”며 정치적으로 확대 해석되는 것을 경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친이계 쪽에서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나,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친이계’에서는 박 전 대표에 대한 힘 쏠림 현상을 막기 위해서라도 MB 정권의 실질적 2인자인 이 전 최고위원의 복귀가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재오계’의 수장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공성진 최고위원은 2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보수 실용정권의 안착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책임의식과 소명의식·역사의식을 가진 분들이 필요하다”며 “이제는 이재오·이방호·정두언 같은 분들이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공 최고위원은 박 전 대표를 의식한 듯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기 때문에 당이 오히려 잘 움직이기 위해서는 다이내믹스(dynamics)가 있어야 한다”며 “대세론으로 뒤덮여 있으면 오히려 발전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조기귀국이 거론되는 이 전 최고위원의 거취에 대해서는 “이 정권의 주역 중 한 사람으로서 정권의 성패에 운명을 같이할 소양이 있는 사람”이라며 “개각에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또한, 공 최고위원은 “연말 귀국은 물리적으로 힘들다는 것이 그 분 말씀이고, 내년 4월이 유효기간이니 본인이 결정해야 한다”며 “당이 여러 시각을 갖고 움직여야 발전할 수 있고, 대세론으로 뒤덮여 있으면 발전이 안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공 최고위원은 6일 박 전 대표의 수도권 규제 완화에 대한 잇따른 문제제기에 대해 “식품위기라든가 촛불시위라든가 여러 가지 국난이 지난 8개월 동안 많았는데, 그동안 박 전 대표께서는 소리를 안 내고 잠잠했다”며 “그 동안 가만히 계시다 왜 이런 소리를 하시나 하고 좀 의아해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 공성진, 박근혜 노골적으로 비판 공 최고위원은 또 박 전 대표를 지지하는 ‘희망포럼’ 재정비와 관련해 “지금은 당면 과제가 워낙 급박하기 때문에 다음 권력을 논의할 때가 전혀 아니다”라며 “이명박 대통령을 중심으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거듭 비판했다. 물론, 공 최고위원의 이 같은 언급은 이 전 최고위원의 복귀가 박 전 대표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증명하고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뿐만 아니라, 이 전 최고위원의 최측근인 한나라당 진수희 의원도 미국으로 건너가 이 전 최고위원의 조기 귀국을 종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10월 25일 공 최고위원, 진 의원 등 친이재오계 의원들이 회동해 이 전 최고위원이 내년 초 귀국해 여권 내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은 만큼 이 전 최고위원에게 이 같은 기류를 전한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홍준표 원내대표도 최근 한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정치인의 활동을 어떤 식으로든 계파적 시각에서 보는 것은 잘못됐다고 본다”며 “정치인이 당에서 일하는 것은 당원들이, 정부에서 일하는 것은 정부에서, 재보선에 나오는 것은 국민들이 결정할 문제지 본인이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해 이 전 최고위원의 정치복귀를 정당화했다. 특히, 홍 원내대표는 이 전 최고위원의 귀국 시점과 관련해 “때가 되면 이 전 의원에게 그런 기회(복귀)가 충분히 올 것으로 본다”며 “다만 지금은 여권 자체의 결집력이 약화되고 어렵다는 측면에서 이 전 의원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져 말이 나오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친박계 허태열 최고위원도 다른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나라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고 한나라당과 대통령에 대해 국민들이 우호적이지도 않은데 과연 이 시점에 (이 전 최고위원의 정계복귀가) 도움이 되겠느냐”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이어 허 최고위원은 “이 전 최고위원의 행동을 결정하는 기준은 이명박 대통령한테 도움이 되느냐, 또 한나라당에 도움이 되느냐로, 이 문제는 이 전 최고위원이 판단할 문제”라고 거듭 반대 의사를 밝혔다. 이렇듯 각종 신조어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여론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박 전 대표 측은 정작 ‘월박’이나 ‘복박’이란 용어가 퍼지는 것은 ‘이재오계의 전략’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박 전 대표의 한 측근 의원이 “이재오계에서는 우리가 마치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과장하면서 계파의 결집력을 강화시키는 한편, 이재오 전 최고위원이 빨리 복귀하도록 명분을 쌓는 것”이라고 비판한데서도 이러한 분위기를 익히 알 수 있다. 따라서, 결국 박 전 대표로의 힘 쏠림이나 그로 인한 친이계의 결집은 당내에 또 다른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반(反)작용만 불러오고 있다는 측면에서 새로운 계파 갈등의 고리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어 어떻게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