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은행들이 잇따라 후순위채 발행에 나서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후순위채권이란 기업이 파산할 경우 채권자들에게 진 빚(은행차입금·물품대금·회사채 등)을 모두 갚은 후에 지급을 요구할 수 있는 채권을 뜻한다. 순서가 가장 늦다는 의미에서 후순위채라고 부른다. 또, 채권 확보가 불확실해 채권 이자가 시중금리보다 월등히 높은 것이 보통이다. 은행들의 후순위채 발행 현황을 살펴보면, 국민은행은 7000억 원을 판매 중이다. 지난 11월 10~13일까지 발행한 8000억 원 규모의 후순위채를 합하면 3분기(7~9월) 이후 국민은행이 발행한 후순위채는 총 1조5000억 원어치에 달한다. 이에 따라, 4대 시중은행 중 유일하게 10% 아래로 떨어졌던 국민은행의 올 3분기 BIS비율은 0.98%포인트 상승한 10.74%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은행도 개인고객을 대상으로 5000억 원 규모의 후순위채를 판매하고 있다. 특히, 11월 18일부터 같은 규모로 발행한 기관고객 대상 후순위채는 하루 만에 다 팔리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에 따라, 우리은행의 BIS 비율도 3분기의 10.53%에서 11.23%까지 0.7%포인트 가까이 급등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나은행도 5000억 원 규모의 후순위채권 발행 안건을 의결했다. 앞서 하나지주는 3월에 연 6%대 후순위채 4000억 원을, 9월에 연 7%대 후순위채 3800억 원을 발행하여 지금까지 7800억 원어치를 판매했으며, 5000억 원을 발행할 경우 올해 1조2800억 원의 후순위채를 발행한 셈이 된다. 농협도 4000억 원 규모의 후순위채를 추가 발행했다. 이에 따라, 바젤II 기준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이 0.32%포인트 가량 상승할 것으로 예상했다. 농협은 지난 9월에도 4000억 원 규모의 후순위채권을 발행해 BIS 비율이 6월 말 10.15%에서 9월 말에는 10.46%로 올라갔다. 농협보험(공제) 역시 11월 12일 2000억 원 규모의 만기 5년 3개월짜리 후순위채권을 발행한 바 있다. 이 밖에, 기업·외환은행 등도 후순위채권 발행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보험사도 은행의 BIS 비율에 해당하는 지급여력비율을 높이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네덜란드 보험회사인 ING생명이 연말까지 3500억 원 규모의 자본을 확충해 지급여력비율을 150% 수준으로 높이기로 했다. 이를 위해 네덜란드 본사로부터 후순위 차입을 실시할 계획이다. ■ 은행들, 대규모 증자도 잇따라 후순위채뿐만 아니라 대규모 증자도 잇따르고 있다. 하나금융지주는 5000억 원 이상을 하나은행 증자에 사용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하나금융 관계자는 “증자 규모가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하나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 건전성지표 중 핵심인 기본자본비율(Tier1)을 8% 이상으로 높이려면 5000억 원 이상을 증자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금융지주도 조만간 이사회를 열어 최대 1조 원 규모의 회사채 발행을 결의할 예정이며, 이 가운데 일부를 우리은행 증자에 사용할 계획이다. 증자 규모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우리금융에선 6000억 원 가량을 고려하고 있다. BIS 기준 기본자본비율이 9월 말 기준 7.63%인데, 이를 금융감독 당국의 권고대로 8% 이상으로 끌어올리려면 6000억 원 가량의 증자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우리금융은 나머지 중 3000억 원은 연말까지 돌아오는 회사채 상환에 쓴다는 계획이다. 신한금융지주와 국민은행·농협 등도 유동성 시장 상황에 따라 대규모 증자를 계획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금감원, 은행들 증자 추진 제동 이처럼 은행들이 앞다퉈 후순위채를 발행하는 이유는 BIS 자기자본비율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중소기업 대출 확대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향후 부실대출이 늘어날 것에 대비해 미리 후순위채 발행을 통해 BIS 비율을 높여놓겠다는 전략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후순위채도 엄연한 빚인 만큼 막대한 후순위채 발행이 향후 은행의 자금 압박 요인이 될 수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국민·신한·우리·하나·기업·외환 등 6개 은행이 발행했거나 발행 예정인 후순위채 규모는 7조 원에 육박한다. 지난해 2조9000억 원의 배가 넘는 실정이다. 특히, 발행 금리도 크게 높아져 은행들에게 수익성 악화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 은행의 이자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다. 금감원의 한 관계자는 “아직 후순위채 발행은 용이하지만, 너무 과다하게 발행하는 것은 해당 은행의 경영에 좋지 않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와는 별개로, 회사채 발행과 대규모 증자 역시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날 확률이 높다. 금융지주사들이 회사채를 발행해 조달한 자금을 자(子)은행의 유상증자에 쓰려고 하는 데 대해 금융감독원이 적절성 여부를 따지고 나섰기 때문이다. 지주사가 차입한 돈을 계열 은행의 증자에 쓸 경우, 연결재무제표 기준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이 낮아지는데다, 지주사 건전성이 흔들릴 경우 은행 외 다른 자회사에 악영향이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금감원이 이 같은 방식의 은행 증자를 불허할 경우, 은행들은 BIS 비율을 높이는 데 차질이 빚어질 것으로 우려된다. 주요 내용을 보면, 금감원은 하나금융· 우리금융 등이 회사채 발행을 통해 계열 은행 증자를 추진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따져보고 있다. 금감원의 고위 관계자는 “지주사가 상환능력·부채비율 등을 따져 회사채를 발행하는 것은 괜찮지만, 이를 자회사의 증자에 쓰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사실상 차입한 돈으로 자회사의 기본 자본을 채워 넣는 것은 편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금감원은 2006년에 이 같은 방식의 증자를 자제토록 지도한 바 있다. 하지만, 금감원의 한 간부는 “지금은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여서 평상시의 잣대로 은행 증자를 판단해선 곤란하다”고 다른 의견을 냈다. 금감원은 내부 의견을 조율해 조만간 은행 증자 허용 여부를 확정지을 방침이다. 금융권의 관계자는 “후순위채 발행은 당장 BIS 비율을 높이기 위한 가장 손쉬운 수단”이라며 “내년에도 보수적 운영이 필요한 만큼 향후 증자, 배당 축소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자본 증식을 이뤄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