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채·은행채 등의 신용경색이 카드채·할부금융채로 확산되고 외화조달 사정이 급격히 악화되는 등 자금시장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이에 따라 국내외 경제연구소들은 우리나라의 내년 경제 성장률이 1% 미만이거나 마이너스 성장률을 나타낼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잇따라 내놓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유동성 공급을 강행한 정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강력한 대책이 시장에 무용지물로 인식되면서 신뢰도가 급격히 저하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12월 11일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1%p 대폭 인하하는 정책을 내놨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일부 유동성 해소에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신중론’이 힘을 얻고 있다. 심지어 시장에서는, 금융당국이 카드만 소진하고 있어 시장이 더 어렵다는 반응을 나타내고, 오히려 마이너스적인 요인이 많을 것이라는 전망마저 제기되고 있다. 풀리지 않는 금융권의 ‘돈맥경화’, 그 현황을 짚어봤다. ■ 자금시장 혹한기 여전 자금시장이 회사채 금리가 급등하고 외화조달 사정이 다시 나빠지면서 혹한기를 맞고 있다. 지난 10월 은행권 단기의 외화차입금의 순유출이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하는 등 연말 결산을 앞두고 기업과 은행의 자금난이 가중되고 있어, 정부의 추가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투자적격 등급인 BBB- 등급의 회사채(3년 만기) 금리는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사태 직전인 지난 8월 말의 10.27%에서 9월 말 10.81%, 10월 말 11.32%, 11월 말 12.53%로 급등했다. AA- 등급의 회사채(3년 만기) 금리도 8월 말의 7.34%에서 11월 말 8.91%로, 91일 물 기업어음(CP) 금리는 같은 기간 6.10%에서 7.12%로 상승했다. 상반기에 5~6%에 머물던 카드채 금리도 최근에는 8~9%로 뛰었다. 미국발 금융위기와 경기침체에 따른 신용경색으로 채권시장이 얼어붙어 기업들의 자금조달 비용이 커지고 있고, 높은 금리를 주더라도 채권 발행이 어려운 실정이다. 한국은행이 11월까지 기준금리를 1.25%포인트 내리고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하고 있지만, 각종 은행 대출의 기준이 되는 91일 양도성 예금증서(CD) 금리는 0.38%포인트 떨어지는데 그쳤고, 정부가 지급보증하는 국고채와 통안증권에만 자금이 돌고 있다. 10월 말에 1500원 선까지 치솟던 원·달러 환율은 한국과 미국의 통화 스와프 협정 체결로 11월 초에 1200원대로 떨어졌다가, 외국인의 국내 주식과 채권 매도로 달러화 수요가 급증하면서 지금은 다시 1500원에 육박해 있다. 해외 은행들이 연말에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높이려고 자금 회수에 나서면서 국내 은행들의 외화차입금 만기 연장률이 30%에 불과할 정도로 외화 사정이 악화하고 있다. 예금은행의 10월 단기 외화차입금 순유출액은 200억5490만 달러로 월별 기준 역대 최대치를 나타냈다. 은행들에 들어오는 외화보다 나가는 외화가 많다는 뜻이며, 이 추세는 11월과 12월에도 이어지고 있다. 외환시장에서 스와프 포인트(1개월 물)는 10월 20일 -3.00원에서 12월 5일 현재 -20.50원으로 확대됐다. 마이너스 수치가 커지면 원화를 대가로 달러화를 빌리기가 그만큼 어려워진다는 뜻이다. ■ 내년 경제성장률 마이너스 전망도 설상가상으로, 내년 경제성장률이 최대 3% 미만에서 최저 마이너스 성장까지 우려된다는 전망도 잇따르고 있다. 산업은행 경제연구소 김상로 소장은 12월 11일 서울 쉐라톤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비즈니스 리더스 포럼 창립행사 강연에서 ‘경제전망과 성장기업의 대응’을 주제로 “우리나라가 지난 3분기에 3.9% 성장률을 기록해 외환위기 당시보다는 양호한 상황이지만, 내수와 수출이 급격히 둔화하고 있어 내년에 최악의 경우 마이너스 성장을 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그는 “내년에 원·엔 환율이 1125∼1380원에서 움직이며 평균 1200원 선이 될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엔화 차입 기업은 당분간 차환하되, 원·엔 환율이 안정되기 시작하면 단계적으로 원화로 전환하라”고 권했다. 또, 원·달러 환율은 1150∼1350원에서 변동하면서 평균 1250원 대에 머무를 것으로 예상했다. 한국은행은 내년도 경제성장률을 2.0%으로 전망했다. 한은 관계자는 “내년 경제성장률이 예상보다 크게 나쁘게 나왔다”며 이 같은 입장을 밝혔다. 한은의 이러한 전망치는 지난 1980년(-1.5%)과 1998년(-6.9%) 이래 가장 낮은 수준이다. 대다수 민간 연구기관의 전망치(3%대)보다도 낮다. 내년도 성장률 전망과 관련해, 정부 내에서도 연이어 3%를 밑돌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2%대로 굳어지는 분위기다. 전문가들은 성장률이 2%대에 그치면 연간 수출증가율은 마이너스로 돌아서고, 소비와 투자는 1%대 증가에 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연간 수출증가율이 마이너스로 돌아서면, 지난 2001년 정보기술(IT) 버블 당시 -12%를 기록한 이후 8년 만이 된다. 중소기업들은 내년도 경제성장률이 외환위기 이후 가장 낮은 2.4%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또한, 우리 경제가 회복하려면 최소한 2년 이상 시간이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중소기업 제조업체 1454개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84.8%가 내년 국내 경제상황이 ‘매우 나빠질 것’(33.3%) 또는 ‘약간 나빠질 것’(51.5%)이라고 예상했다. 이 중 ‘좋아질 것’이라는 응답은 3.8%에 불과해, 전반적인 경제불안심리가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중소기업들은 내년 경제성장률이 2.4%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우리 경제가 외환위기 이후 기록한 가장 낮은 성장률이다. 경제회복 시기에 대해서는 2010년이라는 응답이 49.8%로 가장 많았고, 2011년(28.2%), 2012년(10.3%), 2013년 이후 등의(5.9%) 순이었다. 이는 최소한 2년 이상이 지나야 경기가 회복될 것으로 내다 본 것. 3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하는 응답도 44.5%나 돼, 경기침체의 장기화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았다. 내년 경기전망은 최악의 수준이었다. 내년도 중소기업 업황전망 건강도지수(SBHI)는 올해 실적에 대한 전망지수인 69.9보다 6.2P 떨어진 63.7을 기록했다. SBHI는 기업경기실사지수(BSI)의 하나로, 100보다 높으면 다음달 경기가 좋아질 것으로 전망하는 업체가 그렇지 않을 것으로 보는 업체보다 많음을, 100보다 낮으면 그 반대를 뜻한다. 특히, 전체 20개 업종 가운데 16개 업종에서 올해 실적보다 더욱 부진할 것으로 전망됐다. 그 중 가죽·가방·신발(51.1), 의류(51.9), 자동차부품(53.4), 1차 금속(54.5), 나무·목재(55.8%) 등은 경기가 극히 안 좋을 것으로 예상됐다. ■ 유동성 해소 해법은 없나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국은행 금통위원회는 12월 기준금리를 연 4.00%에서 3.00%로 1%p 전격 인하하는 특단의 대책을 내놓았다. 한은은 앞으로 경제가 감당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라고 판단되는 2.5% 수준까지 기준금리를 끌어내릴 것으로 보인다. 경기가 내년 상반기에 최악의 상황으로 추락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공격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은행의 이런 조치가 어느 정도 효과를 가져올지는 분명하지 않다. 경기하강과 자금경색은 해외 신용위험, 경기침체 등에 따른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실물경제가 급속도로 하강하고 있는데 대한 금통위원들의 선제적 대응이라는 데 시각을 같이 했다. 최근 정부와 은행권이 주축이 돼서 기업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지만,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 등 은행들 스스로도 자본확충에 비상이 걸린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자금 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한은의 1%포인트 금리인하는 시중에 자금이 유통될 수 있도록 한다는 데서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소 안순권 박사는 “최근 통화신용 통로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며 “하지만 기준금리를 낮추면 채권 보유의지가 강해지게 되고 신용채권에 돈이 돌아간다는 점에서 돈맥경화가 해소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임희정 현대경제연구소 연구원은 “한은이 채권을 발행했을 때 은행권에 자금이 돌아간 게 아니고 은행권이 내부적으로 단기 자금을 보유한 상황”이라며 “여러 상황들을 고려한 선제적 조치로, 예상을 뛰어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격적인 금리인하에 대해 일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한은이 지난 10월 27일 0.75%포인트를 인하하는 ‘깜짝쇼’를 펼쳤지만 신용 스프레드(채권 간 금리차)는 더 커지는 등 효과가 크지 않은데 공연히 ‘실탄’만 소모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차라리 금융위기와 실물경기 위축이 본격화할 내년을 위해 여유를 남겨두는 게 낫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하락추세에 있지만 1300원대에서 횡보하는 환율도 문제다. 안순권 박사는 “환율이 현재 지나치게 높은 수준이기 때문에 파격적 금리인하가 외환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주시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