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년 간 불황 헤쳐 나온 한국 영화의 힘
2006년부터 거품이 빠지기 시작한 한국 영화계. 하지만, 개봉 편수는 2006년부터 올해까지 3년째 100편 개봉을 이어 갔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1월 1일 개봉한 <기다리다 미쳐>를 시작으로 11월 30일까지 개봉된 한국영화는 딱 100편. <과속 스캔들> <달콤한 나의 도시> <로맨틱 아일랜드> <1724 기방난동 사건> <4요일> <쌍화점> 등 12월에 개봉한 영화들까지 합치면, 105편 이상이다.
한국 영화는 올해도 제작자·감독·배우 모두가 ‘어렵다’ ‘도와 달라’는 말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관객은 올해도 도와주지 않았다. 100여 편의 개봉작 가운데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는 10편도 안 되며, 수익을 올린 영화 역시 5편에 불과했다. 영진위가 올 1월부터 11월까지 집계한 한국 영화 점유율(전국관객 기준)은 41.6%에 그쳤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의 52.3%보다 10포인트 이상 감소한 수치이며, 올해 11월까지 전국 극장 관객 수는 1억3,490만 명으로, 지난해보다 660만 명이 줄었고, 2006년보다는 무려 1,500만 명이 감소한 수치다.
이처럼 꽁꽁 얼어버린 극장가를 그나마 달군 올해의 한국 영화는 무엇이며, 올해 국내외 개봉 영화의 성적은 어떤지 살펴본다.
■ ‘창고영화’ 빛 보는 순간 ‘깜깜’
<사과> <바보> <도레미파솔라시도> <날나리 종부전> <무림여대생> <아기와 나> <서울이 보이냐> <그 남자의 책 198쪽> <소년은 울지 않는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 등 올해 개봉한 100편의 영화 중에서 40편만이 올해 제작된 작품이며, 나머지는 ‘창고영화’로 채워졌다. ‘창고영화’란, 한국 영화가 호황을 누리던 막바지 2006년과 2007년 초까지 제작됐지만, 개봉일을 놓쳐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개봉된 영화들을 말한다.
영진위의 영화산업통계(전국)에 따르면, 1월부터 11월까지 개봉된 100편의 영화 가운데 10만 관객도 모으지 못한 영화는 무려 60여 편에 이른 것으로 집계됐다. <서울이 보이냐>(5만), <날나리 종부전>(3만), <무림여대생>(2만), <그 남자의 책 198쪽>(9만), <소년은 울지 않는다>(9만) 등의 ‘창고영화’는 오래 기다린 보람도 없이 제작편수를 채우는데 그쳤다. 영화계는 한국 영화 개봉 편수가 내년에는 40편보다 줄어들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저력
올해 한국 영화 점유율이 41.6%로 지난해에 비해 현격히 줄어든 데 반해, 외국 영화 점유율은 58.14%로 증가했다. 이 가운데 미국이 49.6%로 외화 점유율에서 3분의 2 이상을 차지해 위력을 과시했으며, 그 뒤를 유럽(3.6%)과 중국(3.2%)이 뒤따랐다. 올해 흥행 BEST 10에도 <쿵푸팬더> <맘마미아!> <아이언맨>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 <미이라3: 황제의 무덤> <다크 나이트> 등의 할리우드 영화가 6편으로 절반을 넘겼다. 하지만, 1위와 2위는 한국 영화가 나란히 올라 자국 영화라는 자존심만은 지켰다.
4월 9일 개봉돼 200만 관객을 모은 리암니슨 주연의 액션 영화 <테이큰>이 의외의 선전을 했으며, 30일 개봉된 <아이언 맨>은 전국 관객 430만을 돌파하며 할리우드 로봇 액션 영화의 건재를 과시했다. <아이언 맨>의 흥행은, 17일 영화 <스트리트 킹>의 개봉을 앞두고 내한한 키아누 리브스와, 같은 시기에 내한한 <아이언 맨>의 존 파브로 감독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상반된 매너가 언론의 도마에 오르면서 얻은 이득도 무시할 수 없다.
6월 5일 개봉한 미국 3D 애니메이션 <쿵푸팬더>는 467만의 관객을 돌파하는 동시에, 올해 개봉한 외국 영화 가운데 가장 높은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이어 8월 7일 개봉한 <다크 나이트>는 개봉 첫 주 만에 109만 관객을 끌어 모아 ‘배트맨 시리즈’의 위력을 보여줬다. <메멘토>(2000), <배트맨 비긴즈>(2005)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뛰어난 각본과 연출, 역대 조커 가운데 가장 사악하다는 평을 받은 히스 레저의 광기 어린 연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했다. 지난 1월 약물 과용으로 사망한 히스 레저의 유작이 된 <다크 나이트>는 히스 레저의 ‘조커’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아쉬움까지 배가되며 관객을 극장으로 이끌었다. 400만 관객을 돌파한 <다크 나이트>는 역대 국내에서 개봉한 ‘배트맨 시리즈’ 중 가장 높은 성적을 기록했다.
또, 70년대 4인조 혼성 그룹 아바(ABBA)의 히트곡을 소재로 한 뮤지컬 영화 <맘마미아>는 9월 3일 개봉해 입소문을 타고 조용히 448만 관객을 모으는데 성공했다.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과 <미이라3: 황제의 무덤>은 각각 430만, 413만 관객을 돌파하며 할리우드 시리즈 영화의 인기를 입증했다. 이 밖에도 <원티드> <핸콕> <이글아이> 등이 신선한 소재로 젊은 관객의 구미를 당기며 200만 관객 돌파에 성공했다.
한국 영화, 스타 감독↓ 신인 감독↑…세대교체 이뤄질까
올해 전반적으로 부진을 면치 못했던 한국 영화계는 칸·베를린·베니스 등 국제영화제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며 고전했다. 지난해 제60회 칸국제영화제에서 <밀양>으로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한국 영화계를 빛낸 것과 사뭇 대조적이다. 임권택·이창동·박찬욱 등 한국 영화를 이끌던 대표 감독들은 올해 작품을 내놓지 않았다.
또한, <슈퍼맨이었던 사나이>(정윤철 감독·55만), <숙명>(김해곤 감독·85만), (공수창 감독·94만), <무림여대생> (곽재용 감독·2만), <다찌마와리>(류승완 감독·62만), <모던보이>(정지우 감독·75만), <고고70>(최호 감독·58만) 등 스타급 감독에 거는 기대가 큰 영화들도 부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전국 관객 500만 명을 돌파한 <추격자>의 나홍진 감독을 비롯하여 <영화는 영화다>(130만)의 장훈 감독, <고死: 피의 중간고사>(163만)의 창 감독, <미쓰 홍당무>(53만)의 이경미 감독, 그리고 12월 3일 개봉하여 개봉 12일 만에 손익분기점을 돌파한 <과속 스캔들>의 강형철 감독 등이 한국 영화계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다. 특히, <영화는 영화다>와 <고死: 피의 중간고사>는 적은 제작비를 투자해 대박을 터뜨려 올해 가장 효율 높은 영화로 꼽혔다.
이들 중에서도 나홍진 감독은 <추격자>로 ▲제44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신인감독상 ▲제45회 대종상영화제 감독상·최우수작품상 ▲제16회 이천춘사대상영화제 신인감독상·각본상 ▲제17회 부일영화상 최우수감독상 ▲제41회 시체스 국제영화제 오리엔탈 익스프레스상 ▲제7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각본각색상·감독상·신인감독상 ▲제11회 디렉터스 컷 어워드 올해의 신인감독상 ▲제4회 대한민국 대학영화제 감독상 등 거의 모든 상을 석권하며 올해를 <추격자>의 해로 만들었다는 평을 받았다.
■ 스타급 영화배우 ‘주춤’, 실력파·신인배우 ‘활개’
2008년은 스타급 감독뿐 아니라, 스타급 영화배우들도 고전한 불운의 해였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400만)의 문소리·김정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668만) 의 이병헌·송강호·정우성, <강철중: 공공의 적 1-1>(430만)의 설경구·정재영, <눈에는 눈, 이에는 이>(205만)의 한석규·차승원, <아내가 결혼했다>(177만)의 손예진·김주혁, <신기전>(372만)의 정재영 등은 흥행과 연기에도 호평을 받으며 이름값을 했다.
반면, <숙명>(85만)의 송승헌·권상우, <모던보이>(75만)의 김혜수·박해일, <멋진 하루>(39만)의 전도연, <걸스카우트>(24만)의 김선아, <라듸오 데이즈>(21만)의 류승범, <가루지기>(27만)의 봉태규 등은 흥행과 연기력 면에서 이름값을 못했다.
한편, 전도연과 충무로에서 쌍벽을 이루는 여배우 이영애는 <친절한 금자씨>(2005) 이후 특별한 출연작이 없으며, 조각미남 장동건과 원조 꽃미남 원빈도 올해 스크린에서 볼 수 없어 팬들의 궁금증을 더했다. 또한, 충무로 스타 장진영은 위암 판정을 받고 모든 활동을 중단했다.
2008년을 최고의 해로 보낸 연기자도 눈에 띈다. 이들 가운데 <추격자>의 김윤석과 하정우는 단연 돋보인다.
1988년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데뷔해 오랫동안 무명배우로 살아온 김윤석은 영화 <타짜>(2006)의 ‘아귀’ 역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추격자>로 그는 최고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실력파 배우가 됐다. 이 작품으로 김윤석은 ▲제4회 대한민국 대학영화제 남우주연상 제7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남우주연상 ▲제29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 ▲제17회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제9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2008 제16회 이천춘사대상영화제 남우주연상 ▲제45회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 남자인기상 등을 수상하며 2008년을 최고의 해로 마무리했다.
<추격자>에서 살인마로 소름끼치는 연기를 보여준 하정우는 탤런트 김용건의 아들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예인 2세들이 그렇듯 하정우 역시 늘 연예인 2세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하지만, <추격자>로 하정우는 ▲제11회 디렉터스 컷 어워드 올해의 연기자상 ▲제9회 대한민국 영상대전 영화배우부문 포토제닉상 ▲제16회 이천춘사대상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김용건의 아들’이 아닌 연기자 하정우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들 외에도, 얼마 전에 200만 관객 돌파에 성공한 영화 <미인도>의 김민선은 파격적인 노출과 섬세한 연기로 연기 변신에 성공했으며, 상대 역 ‘강무’로 열연한 김남길은 전작인 <강철중: 공공의 적 1-1>과 <모던보이>에 이어 <미인도>까지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데 성공했다. 또한, 영화배우 김영호는 홍상수 감독의 <밤과 낮>이 호평을 받은데 이어, <미인도>에서 욕망에 사로잡힌 화가 ‘김홍도’로 분하며 작품성과 흥행 두 마리 토끼를 끌어내는 배우로 떠올랐다. 끝으로, 올 연말 흥행의 축포를 쏘아 올린 코미디 영화 <과속 스캔들>의 박보영은 ‘제2의 문근영’으로 떠오르며 주목받고 있다. 그는 <초감각 커플> <울학교 이티> 등 올해에만 3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 한국 영화 살리자!…제작비·몸값 낮추기 열풍(?)
올해 최대 흥행작인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668만 관객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200억 원의 제작비를 맞추는데 급급했다. 또한, 10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신기전>은 간신히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등 높은 제작비로 인해 실패 아닌 실패를 맛본 대작 영화들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적은 예산으로 큰 이문을 남긴 영화가 눈에 띄는 한 해였다.
6억5,000만 원의 제작비를 들인 <영화는 영화다>는 130만 관객을 동원해 몇 배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으며, 영화 <고死: 피의 중간고사>는 25억 원의 총제작비를 들여 163만 관객을 모으며 수익을 남겼다. 이는 배우가 출연료를 영화에 투자한다거나, 최대한 적은 촬영 회차로 전체 예산을 줄임으로써 가능했다. <영화는 영화다>의 경우 주연인 소지섭과 강지환이 자신의 출연료를 영화에 투자했으며, <고死: 피의 중간고사> 역시 출연 배우들이 자진해 출연료를 낮췄고, 촬영 회차도 절반으로 줄여 제작비용을 대폭 절감했다.
출연료를 자진해 낮춘 스타는 이들 만이 아니다. 김혜수·박해일·최민식·봉태규·전도연·문소리 등 최근 많은 스타들이 영화 규모에 맞게 출연료를 받겠다고 나서고 있다. 이는 거품이 빠진 한국 영화의 현실을 영화인들 스스로가 절감하면서 영화계에 변화를 부르고 있다.
이우인 jarrjee@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