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새해가 밝았지만 우리나라 경제는 여전히 어둠 속이다. 돈줄을 쥐고 있는 은행들이 몸 사리기에 나서면서 시중에 자금을 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경제를 살리겠다며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2년이 지났지만 ‘백약이 무효’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단연 서민들과 중소기업이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11월 동안 29만1000건의 혼인신고가 접수됐다. 전년의 같은 기간에 비해 4.8%(1만4700건) 줄어든 규모다. 특히, 11월 한 달만 따지면 1년 전보다 19.6%(6600건)나 줄었다. 통계청의 관계자는 “경제가 나빠지면 결혼을 미루는 탓에 혼인 건수도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대규모 감원바람과 대졸자들의 실업난으로 실업자 수가 100만 명을 돌파할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됐다. 기획재정부의 한 관계자는 “작년 말 실업자 수가 78만7000명인데, 오는 2월이면 2001년 3월(112만9000명) 이후 처음으로 1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며 “경기침체로 일자리가 줄어드는데다 2월 초에 대졸 구직 예정자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매년 55만 명의 대졸자 중 군 입대, 대학원 진학 등을 제외하면 노동시장 유입 인력은 30만~40만 명에 이르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할 것으로 우려 된다”고 분석했다. 중소기업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연간 60억 원의 매출을 올리던 L 사장은 작년 10월부터 매출이 절반 이상 줄어들면서 수억 원의 적자를 냈다. 이 회사는 그 동안 장비 구입과 원자재 대금, 운영 자금을 위해 대출받은 돈이 30억 원인데, 다음 달에 갚아야 할 원금과 이자가 7000만 원에 이른다. L 씨는 은행에서 추가대출을 받아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면 어떻게든 해결이 될 것으로 믿고 있지만, 은행에서는 ‘대출불가’로 낙인찍혔다. 재무 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10여 명의 직원들이 이제는 3명으로 줄었다. 중소기업의 자금난이 한순간에 7명의 실직자를 만든 셈이다. 우리 경제가 ‘날개 잃은 새’처럼 끝없이 추락하고 있지만, 돈줄을 쥔 은행들은 좀처럼 자금을 풀지 않고 있다. 쉽게 돈을 빌려주면 제때 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몸 사리기’에 나섰기 때문이다. 특히, 은행들이 올해 ‘설 자금’으로 9조원을 지원한다고 밝혔지만, 한국은행이 설을 앞두고 열흘 간(12~23일, 영업일 기준) 금융기관을 통해 시중에 푼 돈은 3조2000억 원이어서 오히려 작년보다 34% 정도 줄었다. 반월공단 내의 자동차 부품 업체인 D중소기업의 자금 담당 김모 이사는 “운영자금이 급해 시세로 25억 원 정도 하는 공장을 담보로 제시하고 2억 원 대출을 요청했지만, 은행 담당자는 ‘요즘 공장 매물이 많이 나와 있어 경매에 들어갈 경우 낙찰가가 시세만큼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며 거부했다”고 말했다. ■ 중소기업 70% 자금사정 ‘곤란’… 은행돈은 어디에? 중소기업들의 자금난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중소기업중앙회가 1월 7~13일 전국의 중소 제조업체 531곳을 대상으로 자금 사정을 조사한 결과, 무려 69%가 ‘곤란하다’고 답했다. 작년의 같은 시기에 비해 25.5%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이번 조사에서 “자금 사정이 원활하다”는 응답은 4%에 불과했다. 조사 대상의 3분의 1 정도가 세금과 공과금을 연체하고 직원들에게 월급을 제때 못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은행 돈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사실상, 한국은행과 정부의 각종 유동성 공급 조치로 은행권은 자금이 넘쳐난다. 그렇지만, 은행의 소극적인 자금운용으로 정작 필요한 곳에는 돈이 가지 않고, 돈은 단기 금융상품으로 몰리고 있다. 자산운용사들이 운용하는 MMF 설정액은 1월 7일 기준으로 전날보다 1조7730억 원 늘어난 99조9550억 원으로 사상 첫 100조 원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수탁고가 100조 원에 이른 것은 지난해 12월 24일 90조 원을 돌파한 지 불과 2주 만이다. 자금 유입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는 추세다. 은행·연기금 등 기관투자자가 주요 수요자인 MMF는 만기가 짧은 국채나 은행채, 양도성 예금증서(CD), 기업어음(CP), 정기예금 등에 투자해 얻은 수익을 돌려주는 만기 30일 이내의 초단기 금융상품으로, 투자된 자금은 일정한 용처가 정해지지 않은 대기자금으로 인식된다. 이런 가운데 MMF 수탁고를 폭발적으로 늘린 돈은 주로 은행권 자금이라는 것이 업계의 설명이다. BIS 자기자본비율 등 재무구조 개선에 여념이 없는 은행들은 기업대출은 꺼린 채 넘치는 자금을 MMF와 같은 단기 금융상품에 넣어두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말부터 본격화된 한국은행의 공격적인 기준금리 인하로 경쟁상품인 증권사의 환매조건부채권(RP) 금리가 낮아지면서 MMF로의 자금 유입이 더욱 가속화된 것으로 분석된다. 대형 증권사들의 환매조건부채권(RP) 금리는 4.5%에서 4%로 낮아진 반면, MMF는 아직 4% 중반에서 5% 초반 수준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 정부, 뾰족한 대책 없나 그렇다며 정부의 대책은 없는 것인가? 정부는 우선 지난달 초에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열어 은행의 중소기업 지원을 독려할 목적으로 신용보증 비상조치를 1년 간 한시적으로 운영키로 결정했다. 경기침체기에 중소기업 대출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신용보증기관의 심사기준을 완화하여 중소기업이 쉽게 보증서를 발급받을 수 있도록 하고, 보증한도 산출기준도 중소기업에 유리한 방향으로 개선하기로 했다. 은행이 보증서를 담보로 대출하면 대출자산에 대한 위험가중치가 낮기 때문에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 하락에 대한 걱정 없이 자금을 지원할 수 있다. 또, 은행의 중소기업 지원 실적을 월별로 점검하는 한편, 보증서를 담보로 한 대출을 거부하는 사례가 확인될 경우 즉시 현장점검을 실시해 조치할 계획이다. 금융위원회는 경기침체가 더욱 심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올해 국책은행과 시중은행을 통해 중소기업에 모두 50조 원 규모의 신규자금을 공급하고, 이 중 60%를 상반기에 집중 투입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20조 원 규모의 자본확충펀드를 통해 은행의 대출여력을 키우고,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 등 보증기관을 통한 중소기업 보증을 확대한다는 것이 정부의 구상이다. 금융위는 신·기보의 중소기업 보증 규모를 지난해 13조5000억 원에서 올해 25조2000억 원으로 확대한다. 보증 문턱을 획기적으로 낮추는 비상조치도 올해 한시적으로 운영한다. 지금은 최근의 회계연도 매출액이 25% 이상 감소한 기업은 보증서를 발급받을 수 없지만, 앞으로 매출액이 40% 이상 감소하지 않은 경우 보증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보증을 받을 수 있는 매출액 대비 차입금 비율도 현행 70% 이하에서 100% 이하로 바뀌며, 부채비율이 상한선(도매업 600%, 제조업 550~600%)을 넘거나 2년 연속 매출이 감소한 중소기업도 신보의 판단으로 보증이 이뤄진다. 신보가 보증한도를 정할 때도, 중소기업은 결산이 끝난 회계연도 매출액과 최근 1년 간 매출액 가운데 유리한 쪽을 선택할 수 있고, 운전자금에 대한 보증한도는 현재의 1억 원에서 3억 원으로 늘어난다. 보증거절 기업의 재심의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본점에 설치된 재심의위원회를 대구경북본부 등 전국 9개 영업본부에도 설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