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그리워 햇빛을 따라 날아가는 북극제비갈매기, 북극에서 남극까지 세상에서 가장 멀리 날아가는 북극제비갈매기가 잠시 날개를 접고 아름다운 門을 세우고 그림 굿판을 벌인다. 김순이는 설경과 해변 풍경을 주로 선보인다. 설경이나 해변 풍경은 얼핏 보면 단지 풍경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쉬우나,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림을 잘 그렸다거나 그렇지 못했다거나 하는 가벼운 잣대만으로 감상자의 눈길을 사기 쉬운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그의 경우는 좀 다른 측면에서 접근하고 싶다. 그림이란 자신의 생활감정의 조형적 표현이라는 점을 전제해 볼 때, 그는 우선 강원도 태백 쪽 철암이란 곳에 여러 해 살았다는 배경을 지니고 있다. 그 곳은 높은 산으로 첩첩 둘러싸인 곳. 진달래 꽃피고 아름다운 새소리와 맑은 계곡의 물소리도 잠시, 어둠과 추위와 견디기 힘든 날을 지새워야 하는 인내만을 요구했던 갇힌 동네이다. 구름도 쉬어 넘고 바람도 시린 손을 움켜쥐어야만 하던 그 시절의 추억이 설경에 관심을 갖게 한 그녀의 이유로 들 수 있겠다.
설경과 함께 보여주는 해변 풍경도 우연만은 아닌 듯 싶다. 시간이 나면 가끔 들른다는 울진의 작은 포구.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다 풍경은 그의 생활의 질곡을 밀고 당기는 마음의 조리개였으리란 생각도 해본다. 김순이의 상상의 터요 환상이고 희망이던 바다. 그런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에서든 만날 수 있다. 마음의 창문을 세우고 문을 열고 바다를 보려는 마음만 있다면야. 그래서 그의 해변 풍경은 어디에서나 장소에 구애 없이 성립될 수 있다.
이처럼 기억과 관심은 한 작가를 형성시키는 데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김순이의 그림은 대체적으로 실경 위주이다. 그림(예술)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변화하는 것을 모방하는 것이다. 패러디(parody)하는 것이다. 전경이 아닌 전경을 통해 만날 수 있는 후경의 환상(vision)을 그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림은 없는 것을 그리는 것이요, 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는 것이다. 상상의 세계를 만지는 것이다. 상상은 자유로워서 좋다. 직선적 눈길이 아닌 입체적 시선을 말함이다. 시야의 개방(out of lookness)만이 창작의 활성적 능력대를 확장시켜줄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이 그를 새롭게 해주리라 확신한다.
생명 충만한 대지 위에서의 자유로움 자연은 발전될 수 없는 순환 고리를 갖고 있다. 그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 같으나, 일정한 궤적 안에서 스스로 주동하며 유기체에 자양분을 제공하고 이의 순환을 관장한다. 겨울 동안에 마치 죽은 듯 앙상한 나무는 봄에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어 씨를 다시 부활시킨다. 김순이는 이 같이 생명력이 가득한 자연의 향기를 화면에 담아 냄으로써 거역할 수 없는 순리의 소중함을 표현해 왔다. 최근 김순이의 작품은 자연의 무거움과 사색을 깊게 묘사하고 소박하고 친근한 우리 주변의 생명력 있는 터를 발견해준다. 무한한 대지가 작가 자신의 앞에 우뚝 서 있을 때면 어떤 느낌으로 올까? 작가는 자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하지만, 그 속에서 아주 작은 존재임을 발견한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 작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 앞에서 엄숙해지고 깊은 감동까지 받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모습이 김순이에게는 색다르다.
흔히들 자연 하면 나뭇잎이 무성하고 초록색을 한껏 머금은 대지를 연상한다. 오히려 화려함마저 드는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자연은 그렇게 자기의 모습을 마음껏 여주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작가는 바로 자연의 내면의 모습을 파헤치고 싶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왜 그렇게 존재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대상은 자연이지만 작가의 주관이 개입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이 문제를 대상의 완성된 모습으로부터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으로 회귀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연의 근원적인 문제를 찾기 위하여 그것을 해체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연의 외양(外樣)이 아니라 작가의 마음에 의해 내면화된 회화 표현의 관습, 다색의 풍요로움이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대기의 온도와 빛과 바람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작가가 파악하고 있는 삶의 의미마저 배어 있다.
이제는 그의 그림에서 절규도 몸부림도 없다. 대상을 인식하는 관념적인 화려함도 찾아볼 수가 없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더 이상의 색채는 향유될 수 없고, 고독한 갈망으로 인한 내면의 색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야만 작가가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행위의 한 단면을 보여줄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작가는 항시 유기적으로 자신을 내찬해야 한다고 본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의 깊게 일정적으로 사물을 주시해야 한다. 실체가 무엇인가, 삶 속에 내재된 자연은 어떤 모습으로 또다시 다가올 것인가? 또 다른 고심을 안은 채 관조적 형태, 절제된 색채, 빛의 조화를 추구하는 그의 회화 작품에서 자연의 내면화된 본래의 의미를 감상하면서 또 다른 기능성과 전개를 기대해본다.
김순이 Kim Soon-ee 개인전 및 부스전 10회 그룹전 및 초대전 200여회 해외전(우즈벡, 일본, 중국, LA문화원, 프랑스 미술관) 행주미술대전 심사위원, 남농미술대전 심사위원, 환경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서울여성미술대전 운영위원장 역임 미술평론, 세계여성미술대전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 서울여성작가회 회장 역임 롯데MBC문화센터 예원예술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서양화(단과반) 강사 현 한국미술협회 이사 현 서울아카데미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