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가 한국 경제를 뒤덮고 주식이 급락했던 지난해 10월. 우리나라 경제 수장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미 시장에서 신뢰를 잃고 물러나야 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그가 바로 강만수 현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이다. 하지만, 강 전 장관이 재임시절 딱 한 번 시장에 기대감을 준 적이 있었는데, 바로 한-미 통화 스와프 체결이다. 미국으로부터 마이너스 대출을 받은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는 비난도 있었지만, 원·달러 환율이 2000원을 돌파하면서 원화가치가 크게 떨어지고 있을 즈음에 스와프 체결이 시장에 안정을 준 것은 사실이다. 또, 당시 통화 스와프 체결에 강 전 장관은 뒷전에 있었고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가 주요 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지만, 이 역시 이유가 어찌 되었든 ‘급한 불’은 껐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정부는 통화 스와프 체결을 통해 은행들이 기업대출을 적극 권장하여 시장이 잘 돌아가기를 기대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통화 스와프 체결 외에도 기준금리를 사상 처음으로 2%대로 인하하고, 4개월 간 시중에 22조 원에 이르는 유동성을 공급하기도 했다. 환매조건부채권(RP) 매각 및 매입 15조9000억 원, 통안증권 중도 환매 7000억 원, 국고채 단순 매입 1조 원, 채권안정펀드 지원 2조1000억 원, 예금지급준비금 이자 지급 5000억 원 등이다. 이 금액은 당초 공급하기로 계획했던 22조7000억 원 가운데 거의 100%에 달하는 규모다. 특히, 자산운용사의 초단기 금융상품인 머니마켓펀드(MMF), 증권사의 종합자산관리계좌(CMA), 단기채권펀드 등 1년 미만 단기유동성은 모두 500조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정부가 이렇게 막대한 유동성을 공급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계와 기업들은 ‘돈가뭄’에 허덕이고 있다. 이른바 유동성은 넘쳐나는데, 돈이 시중에서 제대로 돌고 있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이유는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다. 은행들이 ‘돈놀이’에 빠졌기 때문이다. 현재 은행들은 한국은행에서 싸게 빌린 돈을 시중에 풀지 않고 초단기 금융상품은 MMF(머니마켓펀드)에 예치해두고 있다. 기준금리가 4%대에 이를 때에는 무분별한 양도성예금증서(CD) 발행으로 변동 대출자들의 피를 빨아먹었지만, 이제는 연 2.5%의 낮은 이자로 돈을 빌려 3%대의 이자를 받는 단기 이자놀이에 치중하고 있는 셈이다. 즉, 한은이 2.5% 금리로 환매조건부채권(RP)을 사주면, 이 돈을 받아 3%대 이자를 주는 MMF에 예치하는 식이다. 저리로 공급받은 돈을 대출 확대보다는 정례 환매조건부채권(RP) 매각 입찰에 참여하는 등 한은에서 풀린 돈이 다시 한은 금고로 되돌아오는 형국이다. 이 때문에 가계와 대출은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 정부가 막대한 유동성을 풀어 시장에 돈이 돌 수 있다고 기대감만 줄 뿐 실질적으로는 한은과 은행들 사이에서 돈이 돌고 도는 셈이다. ■ 은행들, “나부터 먹고 살자”… 대기업ㆍ우량기업은 유동성 넘쳐 그렇다고 은행들이 기업대출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다만, 안정적이고 망하지 않는 대기업과 우량기업에만 치중할 뿐이다. 은행 본연의 역할은 잊고 원금과 이자를 확실히 받을 수 있는 곳만 골라서 대출하겠다는 속셈이다. 1월 국민·우리은행 등 시중 6개 은행의 중소기업 대출은 308조2039억 원으로 전달보다 0.7%(2조214억 원) 증가했다. 이 규모는 월별로 보더라도 작년 12월의 5조2611억 원보다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며, 그마저 우량 중소기업에만 몰리고 있다. 자영업자 대출은 크게 급감했다. 국민·신한·하나은행의 개입사업자(소호) 대출은 1월 29일 현재 55조4161억 원으로 작년 말보다 0.1%(430억 원) 줄었다. 반면, 기업은행을 제외한 5개 시중은행의 대기업 대출은 지난달 29일 현재 60조4407억 원으로 5.1%(2조9094억 원) 급증했다. 한은 관계자는 “1월 들어 은행권의 기업대출이 늘어나고 있지만 중소기업 대출보다 대기업 대출이 더 많다”며 “이러한 상황이 지속될 경우 중소기업 연체율이 급격히 올라가면서 신용위험이 커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그만큼 정부의 말이 시장에서 신뢰를 잃었고 이 때문에 돈에 민감한 은행에는 통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또, 일부 국책은행의 경우에만 한정될 뿐 사실상 주주가 외국인인 국민·하나·신한·외환·제일 은행 등은 오로지 수익에만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은행업계의 한 관계자는 “외환위기 이후 국내 시중은행들이 정부의 말을 듣고 시중에 돈을 풀었는데 결국 해외 투자자들에게 매각당하는 수모만 겪었다”며 “지금도 이러한 현상과 무관치 않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정부가 아무리 돈을 풀라고 말을 해도 사실상 외국계 주주가 주류인 대부분의 은행들은 외환위기 이전처럼 쉽게 먹히지 않을 것”이라며 “결국 모든 피해는 고스란히 서민과 중소기업 등에 집중될 것”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 정부, 막대한 유동성 공급 교통정리 필요 가장 큰 문제는 시중에 떠돌고 있는 500조 원 규모의 막대한 부동자금이다. 특히, 각종 대출의 밑천으로 활용될 수도 있는 자금이 붕 떠 있어 ‘돈맥경화’를 심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이 돈은 어디든 흘러갈 수 있는 자금인데 갈 곳이 없어 맴돌고 있는 것”이라며 “정부가 나서서 유동성이 흘러갈 수 있도록 길을 내주는 방식의 교통정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증권업협회·자산운용협회 등 관련업계에 따르면, 이들 자금은 MMF(머니마켓펀드) 설정액, 증권사들의 환매조건부채권(RP) 자금, 종합금융사들의 종합자산관리계좌(CMA) 예탁금, 은행들의 실세요구불예금 등 단기운용상품에 들어가 있다. 사실상 언제든 다른 곳으로 이동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은행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도 가장 빨리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다. 그 동안 정부는 실물경기 침체에 자금경색까지 겹칠 경우 경기침체의 골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는 판단하에 시중은행들에 대출 활성화를 재촉해 왔다. 더욱이, 금융당국이 2월부터 각 시중은행에 대한 건전성 기준(BIS 비율 등)을 낮추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중은행들의 반응은 시큰둥이다. 향후 경기상황이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뻔한데, 자산건전성을 희생하러 나설 은행들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즉, 이미 유동성 지원을 할 만한 건실한 고객군은 대부분 대출을 한 상태라서, 새롭게 대출을 늘리려면 아무래도 위험성이 높은 기업들을 대상으로 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자산건전성 기준을 낮춰준다고 선뜻 은행 문턱을 낮추기는 어렵다는 속내이다. 일각에서는 건전성이 그런대로 괜찮은 기업에서 대출을 상환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오히려 은행에서 (당국에 제시할 외형상) 대출 규모를 맞추기 위해 상환 연기를 읍소한다는 보도까지 나온다. 자본비율 권고치가 오락가락하는 것도 시혜적 조치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오히려 어리둥절하거나 정책 신뢰도를 깎아먹는 소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도 문제이다. 즉, 정부 당국의 추진력도 관건이지만, 그에 앞서 금융난 타개에 나서야 할 은행들의 신뢰 형성을 차차 해 나가는 일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당국이 지속적으로 내놓고 있는 대출 후 부실에 대한 면책 등 수많은 약속에 대해, 은행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신뢰감 구축도 절실하다. 만약 이도저도 아니면, 긴급할 경우 한은이 시장에 직접 돈을 풀 수 있는 구조적인 방안도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