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해 두는 능력을 기억력이라고 한다. 사람에게는 기억이 정체성을 부여하며, 지식 습득을 위한 토대가 된다. 이와 같은 기억은 기업에게도 같은 역할을 한다. 기업의 핵심가치나 문화를 규정해주고 역량 구축을 위한 기반이 된다. 이처럼 기억이 중요하지만, 기억력이 좋은 기업은 많지 않다. 탐욕이 기업을 근시안적으로 만들어 기억을 없애고, 변화에 대한 강박증이 과거를 부정하게 한다. 또한, 보신주의가 실패 경험을 숨기게 하고, 시스템보다 사람에 의한 경영이 지식과 노하우의 전수를 막기 때문이다. 건망증이 심한 기업의 공통점은 경영의 시각이 근시안적인 반면, 기억력이 좋은 기업은 경영을 보는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현실에 충실하면서도 가능하면 장기적인 시각으로 경영을 바라보며, 과거의 소중한 경험을 잊지 않고 현실에 되살려 기업의 프로세스나 제도에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과거를 반추하는 까닭은 과거에 얽매이거나 안주하기 위함이 아니다. 과거를 기억하고자 하는 일은 미래를 더 낫게 살아가기 위함이며, 그들의 경영은 과거와 미래의 대화다. 기억력이 개인 지식 축척의 토대가 되는 것처럼, 기업경영의 핵심가치나 문화를 규정해주고 역량 구축을 위한 기반이 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LG경제연구원은 ‘기억력이 좋은 기업’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건망증이 심한 기업의 공통점은 경영의 시각이 근시안적인 반면, 기억력이 좋은 기업은 경영을 보는 스펙트럼이 매우 넓고 장기적”이라며 기억력에 바탕을 둔 온고지신의 노하우를 잘 활용하기 위한 조건들을 소개했다. 연구원은 “우선 기업의 기억이란 종업원이 가진 지식이나 노하우를 조직화해 기업의 핵심 역량으로 체화한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기업의 핵심가치나 문화를 규정하고 역량을 쌓는 기반이 된다는 얘기다. 이는 우량기업의 필수 요건이지만 현실적으로 기억력이 좋은 기업은 매우 드물다며, 경계해야 할 요인으로 탐욕과 보신주의, 변화 강박증, 사람에 의한 경영 등을 꼽았다.
연구원은 탐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분야로 금융을 손꼽았다. 금융위기는 실제 예상 수익 이상으로 투자 대상의 가치가 부풀려지고 무분별한 투자로 신용이 대폭 확대되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런 위기가 수백 년에 걸쳐 반복됐음에도 눈앞에 보이는 수익 때문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연구원은 보신주의로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문화가 퍼지면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마련하기보다 문제점을 덮어버리는 방식을 취하게 되고 실패의 기억은 사라진다고 설명했다. 연구원은 “부단히 변화해야 한다는 강박증 때문에 의도적으로 과거와는 정반대의 정책을 실행함으로써 경험과 기술이 일시에 사라질 수 있고, 시스템이 아닌 개인의 역량에 의존해 조직이 운영되면 조직의 자산으로 전환되기 어렵다”고 충고했다. 이어 “불확실한 경영환경에 대응하고 혁신하려면 기억력이 매우 중요하다”며 “학문의 발전처럼 기업의 핵심역량도 과거의 경험과 지식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는 경험을 재해석해 현재의 제도와 문화에 녹여내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연구원은 “경영환경이 더 빠르고 불안전하게 변하는 지금, 미래를 바라보는 데 힘을 써도 부족한데 과거 타령이나 하자는 것은 아니다”라며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단순히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자 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우리의 앞날에 적용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과거를 알고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미래를 더 낫게 살아가기 위함”이라며 “과거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과거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기억력 좋은 기업의 특징 기억력이 나쁜 기업의 공통점은 근시안적으로 경영을 바라본다는 점이다. 단기성과에 집착해 욕심을 부리거나 당장 편한 길을 찾다 보니 나타난 현상이다. 기억력이 좋은 기업은 성장을 위한 토대를 구축하고 경영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과거를 기억한다 = 기억력이 좋은 기업은 과거를 있는 그대로 기억한다. 즉, 기억에서 직접적으로 배운다. 과거에 축적된 기업문화나 경영 관행을 그대로 실행하고 있으며, 심지어 과거에 경험한 사례를 그대로 기억해 교훈을 찾는데 활용한다.
존슨&존슨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창업자의 아들이자 3대 CEO였던 로버트 우드 존슨 2세(Robert Wood Johnson II, 1893~1968)가 회사를 경영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1943년에 ‘우리의 신조(Our Credo)’를 제정해 고객과 직원, 지역사회와 의료업 종사자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회사의 목적이라고 선포했다. 이 신조가 적용된 가장 유명한 사례가 타이레놀 사건이다. 1982년 미국 시카고에서 존슨&존슨의 타이레놀 제품을 복용한 사람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존슨&존슨 ‘우리의 신조’에 따라 소비자경보를 발령하고 원인이 규명될 때까지 타이레놀 제품을 절대 먹지 말도록 대대적인 홍보를 전개했다. 또한, 존슨&존슨은 당시 시가로 1억 달러에 해당하는 전국 모든 제품 3,000만 병을 거둬들였다. 결국 소비자들은 존슨&존슨을 신뢰하게 됐고, 타이레놀의 매출은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처럼 기억력 좋은 기업은 오래 전에 경험한 중요한 사건을 잊지 않고 후세에 전달한다. 과거를 체화한다 = 스탠포드 대학의 명예교수이자 저명한 조직이론가인 마취(James March)는 조직이 반드시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 않더라도 약한 형태로 기억이 유지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시간에 따라 기억은 엷어지고 과거의 사건은 잊혀지지만, 그 사건의 영향으로 바뀐 제도, 규칙, 프로세스, 프랙티스 및 행동 패턴이나 관행은 그대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그래서 기억력이 좋은 기업은 과거를 체화한다. 즉, 간접적으로 배운다. 말하자면, 과거의 경험을 전부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그것을 제도에 녹여서 오늘의 경영에 활용하는 것이다. 금융회사는 이직도 많고 제조업보다는 직원 개개인에 의해 수행되는 일이 많기 때문에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되살리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골드만 삭스의 과거의 경험을 기업문화, 제도, 의사결정 관행에 반영해 지속적으로 유지시켜 왔다. 금융위기가 본격화되지 않았던 2007년에 모기지 담보 증권을 미리 팔아버려 미국의 투자은행 중에서는 기업 규모 대비 서브프라임 모기지 관련 손실이 가장 적은 편이었다. 실제로 골드만 삭스는 2008년 자산상각 및 신용손실 규모는 71억 달러였지만, 이는 672억 달러의 씨티그룹과 559억 달러의 메릴린치보다 훨씬 적은 액수이다. 과거를 재해석한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 기억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이 과거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풍경이 지금은 선명하게 떠오른다는 내용이다. 사람들은 반드시 실제로 일어났던 사실만을 기억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꿈을 꾼 내용도 실제로 경험한 일처럼 기억되기도 하듯이,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기억한다. 그래서 인간은 과거를 재해석해 기억을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경험이 재창조되기도 한다.
기억력이 좋은 기업도 필요에 따라 과거를 재해석한다. 즉, 과거의 경험을 새롭게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뜻이다. 할리데이비슨이 그런 경우이다. 1903년 창업 이후 반 세기 가량 미국의 오토바이 시장을 장악하던 할리데이비슨은 1960년대 일본의 오토바이 업체들이 미국 시장에 진출하면서 타격을 받았다. 이후 1981년에 할리데이비슨의 경영진은 각자 돈을 모아 회사를 독립시켰다. 그리고 최고의 모터사이클을 만들기 위해 기존의 V-트윈 엔진을 개량한 새로운 엔진을 개발하여 제품력을 높여 나갔다. 동시에, 사람들에게 편리함과 즐거움을 주고자 하는 창업자들의 생각을 본받아, 모터사이클링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통해 고객들의 꿈을 실현시켜주는 회사라는 가치를 만들어냈다. 이 같은 맥락에서 할리오너스그룹(Harley Owners Group)을 만들어 고객들의 투어와 모터사이클링을 회사에서 지원하기 시작했다. 즉, 고객에게 단순히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경험을 선물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이처럼 창업시대의 가치를 현재 시각에서 재해석하여 경영에 활용한 결과 높은 성과를 거두었다. 과거를 가져온다 = 사람의 기억 중에 많은 부분은 그 사람의 두뇌 바깥에 저장돼 있다. 이를 교류적인 기억(Transactive Memory)이라고 하는데, 사실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사실을 모두 머릿속에 넣어 두지는 않는다. 그 사실을 금방 찾아낼 수 있는 실마리만을 기억하고 있으면 된다. 최근 휴대폰이나 전자사전이 발달해 친구들의 전화번호를 직접 기억하지 않고 전자 장치에 저장해 둔다. 또 가까운 사람들끼리는 기억을 서로 공유한다. 가령, 조직의 상위 관리자나 경영자들이 비서를 두는 것 역시 기억할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억력이 좋은 기업은 기억을 외부에서 가져오기도 한다. 특히, 새로운 역량을 개발하기 위해서 필요한 경험이나 지식 등의 기억은 조직 내에 없으면 주저하지 않고 외부에서 조달한다. 이러한 회사로 P&G를 들 수 있다. 2000년에 P&G의 CEO가 된 래플리(Alan Lafley) 회장은 환경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 경영에서 속도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짐을 감지했다. 그래서 회사 밖에서 기술 개발의 50%를 이뤄내야 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전 세계의 다양한 연구기관들이나 전문가들과 협업을 통해 기술을 개발하는 C&D(연결개발, Connect & Development) 전략을 R&D의 새로운 방법론으로 제시했다. C&D 전략으로 외부에 많이 알려진 것이 감자칩 프링글스(Pringles)에 글씨를 새기는 기술을 개발한 사례이다. 인터넷과 P&G가 가지고 있는 네트워크에 이 기술을 공모한 결과, 이탈리아의 볼로냐대학 교수가 운영하고 있는 제과점에서 사용되던 식용 잉크 분무기에서 아이디어를 가지고 왔다. 이를 개량해 감자칩에 글씨를 새기는 ‘프링글스 프린츠(Pringles Prints)’ 기술이 탄생됐다. 저명한 역사학자인 카(E.H. Carr)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기억도 마찬가지이다. 기억력이 좋은 기업은 모두 오늘을 위해서 과거의 기억을 끊임없이 되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