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호 박현군⁄ 2009.05.19 14:05:32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의 흐름이다. 이 때문에 국가는 자본, 즉 돈이 원활하게 흐르도록 하기 위해 금융을 적극 육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금융회사들을 통해 국민의 사유재산을 합법적으로 유통시킴으로써, 돈이 개인의 호주머니 속에서 정체되는 현상을 막기 위한 것이다. 국가경제가 발전하고 자본주의 및 시장경제에 대한 국민의 의식수준이 높아질수록 발전하는 것이 바로 직접금융시장. 이 중에 서민들이 직접 참여하기 쉬운 주식 채권 선물 시장의 비중이 점차 커지게 된다. 한 나라의 주식시장의 성장은 그 나라의 경제 발전과 비례한다. 하지만 주식시장을 움직이는 동력은, 국가 혹은 기업의 운영 결과가 아닌, 잘 될 것 같은 기대감 혹은 침체될 것만 같은 우려감에 의해 좌우된다. 이는 주식시장에서 국가 및 기업실적이 좋아져 주가가 올라갈 때 팔아 치워 차익을 남기기 위해 미리 주식을 사 놔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주가지수는 그 나라의 경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국가경제가 점진적으로 발전해 간다면 주가지수 곡선도 완만한 상승곡선을 그린다. 반면, 국가경제 하락으로 소속 국적의 기업들이 신용을 잃게 된다면 주가지수도 추락하게 된다. ■李 대통령 임기 초 주가지수 복병에 고전 주식시장 관계자들은 최근 3년 간의 주가지수 변화추이가 그 이전의 20여 년보다 더 다이내믹하다고 말한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IMF 외환위기로 인한 리스크를 확실히 털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2007년 주가지수 매월 100포인트 이상 상승, 2007년 4분기 주가지수 200포인트 돌파라는 기염을 토하는 등 주식시장의 기대감이 커졌다. 하지만 2007년 12월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의 대선승리 소식이 전해진 후 주식시장에서는 차익실현을 위한 매도현상이 일어났다가, 유가·환율 악재가 맞물림에 따라 이명박 수혜주들의 차익실현 차원의 조정장세가 묻지 마 투매로 바뀌면서 주식시장은 끝없는 추락을 거듭했다. 그러나 현 정부 집권 초기 이명박 대통령의 비즈니스 플렌들리 선언과 친재벌·친부동산 정책 등에 대한 정치적 발언으로 시장에 심리를 불어넣었고, 한미 간 통화빅딜협정 체결, 강만수 장관의 전격 경질 등으로 최근 경제가 조금씩 살아나는 추세이다. ■올해 1분기 깜짝 실적으로 주가 회복세 최근 종합주가지수(KOSPI)는 올해 3월 2일 1018.81포인트 이후 최근까지 꾸준한 상승을 계속하고 있다. 이는 지난 1분기 기업들의 실적이 경기침체를 감안한 시장의 전망보다 월등히 높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기대에 부응하는 성과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1분기 영업에 대한 잠정적 실적이 나오는 3월 3주부터 4월 첫째주와 1분기 실적발표가 시작되는 4월 하반기 이후 급격히 상승했다. 다만, 3월 30일, 4월 8일, 4월 28일 등 일부 날짜는 외국인과 국내 금융사들을 중심으로 차액실현을 위한 매도세 때문에 점진적으로 하락세를 기록했다. 이에 따라 지난 3월 2일부터 이달 13일까지 49영업일 동안 주가지수는 무려 28.0%(396.35포인트)나 뛰어올랐다. 이는 대선특수를 누린 지난 2007년 상승세보다는 못하지만, 대체적으로 양호한 실적이다. ■은행 모럴 해저드 키코사태로 증시 타격 하지만 2008년 9월 이후 종합주가지수 추이로 표현된 국내 경제 상황은 그야말로 아찔 그 자체였다. 이 기간 동안 한국 경제는 환율급등, 키코사태, 미국 자동차산업의 붕괴, 쌍용자동차 파동 등 여러 가지 외적인 요인이 있었다. 특히, 동 기간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즈와 피치 신용평가회사의 한국 경제에 대한 악의적 평가 등도 우리 경제를 흔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 중에서 주식시장을 가장 얼어붙게 만든 요인은 키코사태. 키코사태가 언론을 통해 세간에 알려진 지난해 9월 25일 이후 한 달 간 종합주가지수 그래프는 급전직하하는 모습을 나타냈다. 특히, 키코사태가 주요 일간지에 처음 보도된 지난해 9월 25일부터 한 달이 지난 10월 29일까지 24영업일 동안 종합주가지수는 무려 55.0%(532.66포인트)나 감소했다. 신한증권의 한 관계자는 “미국 시장, 환율 등 일반적인 악재는 2007년 말 이후 계속돼 왔던 것들이어서 특별할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키코사태는 기업의 유동성에 직접적인 타격을 줬을 뿐 아니라 국내 은행들이 자사 이익을 위해 중소기업에 리스크를 떠넘긴 것이라는 점에서 시장의 충격이 컸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의 효과적인 환율방어와 키코사태의 진정 등으로 인해 지난해 10월 27일부터 올해 3월 3일까지 960포인트~1230포인트에서 박스권을 형성했다. 1000포인트 미만에서 박스권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시장이 크게 침체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해 5월 이후 끝없이 추락해 오던 것에 비추면 나름대로 안정적인 박스권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평가할 수 있다. ■2007년 대선자금 등 과다 유동성으로 증시 폭등 한국 주식시장 역사 중 가장 빛났던 순간을 꼽으라면 지난 2006년 6월부터 2007년 12월까지를 꼽을 수 있다. 2006년 6월 12일 1239.84포인트이던 종합주가지수는 역대 가장 높은 주가지수를 기록한 2007년 10월 31일 2064.85포인트를 기록해 무려 40.0% 상승했다. 특히 종합주가지수는 2007년 4월에 1500을 돌파하더니, 5월 1600, 6월 1700, 7월 1800을 찍으며 거침없이 질주했고, 결국 10월에는 또 다른 하늘로 여겨져 왔던 2000을 돌파하며 팡파르를 울렸다. 월 평균 100포인트씩 예외 없이 상승한 셈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 결국 국내 주가지수의 한계치로 인식됐던 2000포인트를 단숨에 뚫어버린 저력에 대해 전문가들은 경제논리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현상으로 단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 증시의 한 전문가는 “이 기간 주식시장으로 과다하게 돈이 몰리면서 유동성이 커졌고, 가파르게 오르는 주가지수가 서민들에게 ‘무조건 투자하면 돈이 된다’는 환상을 심어줘 증시 자금이 끊임없이 유입된 것이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국내외 자금들이 이 기간 주식시장에 몰린 데 대해서는 “경제논리로는 도저히 알 수 없다”고 말해 여운을 남겼다. 사실 이 기간 중 국내외 자금이 왜 주식시장으로 몰렸는지에 대해서는 증권업계와 국가기관의 최고 전문가들 중 누구도 공식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은행권·증권가·사채시장 등에서 전주급들로 통하는 인사들을 중심으로 2007년 8월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대통령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과 동년 12월 19일에 있을 대선에 쓰일 자금들이 세탁 및 증식을 위해 국내 주식시장으로 들어왔다는 주장이 공공연히 퍼졌었다. 소문의 내용에는 정치권의 종잣돈이 코스닥 종목 등 가격이 싼 중소형주를 장내매입으로 매입하면, 명동의 전주 등 일부 큰손들이 해당 주를 대량 매수주문하는 등의 방법으로 가격을 올리고, 개인투자자 및 외국인 등이 참여하여 주가가 치솟으면 그때 정치권 자금이 차익을 실현하는 방법이 사용됐다는 내용의 이야기도 있다. 이와 관련, 일각에서는 최근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 수사를 통해 불거진, 당시 막대한 시세차익으로 거둬들인 현금의 향배와 관련하여 이 같은 추측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들은 해당 정치인이 고해성사를 하기 전에는 사실 확인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측면이 있다. 또 양심과 용기를 가지고 탈법 사실을 밝히더라도 정치적 음모론에 휩쓸려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의혹이 계속 제기되는 것은 정치권의 정치자금법 현실과 관련이 있다. 당시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 선거의 경선과 본선을 제대로 치르려면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하다. 하지만 정당 지원금만으로는 불가능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정치자금법 때문에 마음 놓고 모금을 할 수도 없는 현실”이라고 토로했었다. ■한국 증시, IMF 계기 체질개선 정치자금의 증시유입, 전 국민의 펀드 및 주식 열풍, 자본시장통합법 등 한국 경제에서 주식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또 소로스·JP모건·칼라힐 등 다국적 자본들이 일부는 호의적으로 혹은 악의적으로 한국 증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고 있다. 이는 한국의 유가증권시장이 그만큼 커지고 튼튼해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주식시장이 미국의 월가, 영국의 헵스트리트, 도쿄 증시 등과 함께 세계적인 증권시장으로 이름을 알릴 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IMF 외환위기였다. 우리나라의 주식시장은 1997년 11월 21일 임창열 신임 경제부총리에 의해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됐다. IMF는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국내 재계에 대한 강력한 구조조정과 금융시장 개방을 요구했고, 이때부터 외국의 기관투자자들이 국내 증시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외국인의 증시 참여, IMF 외환위기, 김대중 당시 대통령 당선자의 강력한 기업 빅딜은 한국의 기업·자본가·노동자 등 모든 경제주체들의 심리를 극도로 위축시켰다. 또 개인투자자들의 자살소동, 중산층 가정의 붕괴, 가장들의 노숙자 생활 등은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주식시장의 대폭락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하지만 임창렬 부총리의 IMF 선언 이후 주식시장의 폭락세는 생각보다 많이 이어지지 않았다. IMF 선언일로부터 불과 28 영업일 동안만 주식시장은 대폭락을 거듭했을 뿐, 다음달 26일부터는 다시 반등을 시작했다. 2007년 12월 28일부터 반등한 주가는 2003년 3월 13일까지 300포인트와 1000포인트 내의 박스권 속에서 M자형 모양으로 조금씩 증가했다. 이 기간에 한국의 증시는 외국인의 공격적 투자방식, 갖가지 전략들, 선진 금융기법 등을 몸으로 익히면서 새로운 주식투자 질서를 만들어 간 시기이다. 주가지수는 351.45포인트에서 저점을 찍고 반등하기 시작해, 다음해 1월 31일 567.38포인트까지 상승한다. 이 기간의 상승은 외국인에 의해 주도됐다. 그리고 국내 시중은행 및 삼성·현대·LG·SK 등 국내 굴지 재벌기업들의 지분이 전체 40% 가량 외국인에게 넘어간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한보부도에서 구제금융 구걸까지 주가지수도 급전직하 언뜻 보기에 IMF행 선언으로 인한 증시 대폭락 기간은 불과 1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정확한 날짜로 치면 34일이고, 주식시장 개장일수로 치면 28영업일이라는 극히 짧은 기간 동안의 폭락을 겪은 후 다시 반등해 버렸다. 그러나 IMF로 인한 주가 폭락은 이미 넉달 전인 8월부터 시작됐다. 주식시장은 이미 은행들의 펀더멘탈과 외환보유액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이때부터 서서히 폭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투자자문업계에서 애널리스트로 활동하는 A씨는 “주식시장은 이미 IMF의 충격을 선반영하고 있었으며, 임창렬 부총리의 비통한 선언은 다만 사실을 확인해준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사실 1997년 이후의 외환위기는 같은 해 1월 정태수 회장이 이끌던 한보그룹의 최종 부도로부터 시작된다.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은 당시 기업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문민정권 등 정치권과의 유대관계를 바탕으로 은행권으로부터 막대한 차입금을 끌어들여 경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보그룹이 망하면서 은행권은 한보가 끌어간 막대한 차입금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고, 위기를 느낀 은행들은 생존 차원에서 타 기업들에 빌려준 차입금에 대해 조기상환에 들어가면서 당시 수많은 기업들이 동반 부실해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됐다. 이 때문에 정보가 빠른 금융기관 및 전주급 투자자들을 시작으로 이상 징후를 포착하면서 주식시장에서 자금을 빼냈고, 이 같은 사실이 점차 알려지면서 8월 이후 본격적인 주가폭락이 시작된 것이다. A 애널리스트는 “IMF 선언은 11월 21일이지만 IMF로 인한 주가폭락은 8월부터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1986년 이후 중산층에 문을 연 한국 증시 우리나라에 증시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한 시기는 1986년 이후이다. 이 시기부터 상장 종목의 수가 늘어났으며, 시장 참여자가 은행 등 금융기관 및 군사정권 권력자, 재벌가문 등에서 일반 부유층과 일부 부유층 지식인들에게까지 확대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하나회 맴버들은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한국 경제의 발전상을 자신들의 업적화하여 전 세계에 알린다는 계획을 짰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주식시장 활성화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조금씩 시작됐으며, 그만큼 시장도 성장하면서 10년을 달려왔다. 이 기간 자본의 유입과 활성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기간 주가지수 추이는 정권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보였다, 1986년 10월 24일 225.92포인트에서 시작해, 1989년 4월 4일 1000.98포인트를 찍으며 1000포인트 시대를 열었고, 6개월 동안 840포인트에서 1000포인까지 박스권에서 등락을 거듭하다가, 1989년 9월 5일 971.90포인트에서부터 1992년 8월 19일 479.09포인트까지 떨어졌다. 그런데 이 기간은 정확히 6공화국 노태우 대통령의 집권기간과 일치한다.